[초대석]정년퇴임한 ‘괴짜 천재’ 정창현 前 서울대 교수
35년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로 재직한 정창현 박사.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요즘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느라 바쁘다. 정세진 기자 |
《매년 3월이 되면 대학의 주인이 바뀐다. 정든 교정을 떠나는 교수와 학생이 있는가 하면 새롭게 둥지를 트는 교수와 학생이 있다. 떠나는 교수들은 청춘을 묻은 캠퍼스를 떠나는데도 변변한 사은회가 없다며 세태를 한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정창현(鄭昌炫·65·사진) 박사는 몇 차례나 ‘잔치’를 치러야 했다. 서울대의 공식 정년퇴임식 이후에도 제자들이 여러 번 퇴임식을 마련해 줬기 때문이다. 정 박사는 본보 보도(9일자 A10면) 이후 지인들에게서 많은 연락을 받았다.》
정 박사는 인터뷰 요청에 “등산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약속도 많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며칠 뒤에 그는 “관악산을 등산하고 막걸리 한 잔을 마시려는데 오겠느냐”고 말했다. 즉석 인터뷰였다.
그는 막걸리 집에서 만나자마자 ‘주졸(酒卒) 정창현’이란 에세이집 한 권을 건넸다.
정 박사는 “퇴임식에서 제자들에게 ‘주졸’이란 글귀를 써서 책을 돌리자 한 녀석이 ‘선생님 그럼 술을 졸업하시는 건가요’라고 물어 한참 웃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술을 좋아하지만 아직 주선(酒仙)과 주장(酒將)의 단계에는 못 들어섰소”라며 말문을 열었다.
정 박사는 본보 보도로 화제가 됐던 ‘짱구’ 발언에 대해 “그 이후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을 짱구라고 불렀다고 문교부 공무원들이 정색을 하며 사과하라고 합디다. 그래서 ‘장관님 짱구라고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했죠.”
그는 당시 장관이던 고(故) 민관식(閔寬植) 선생을 떠올리며 “올해 초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 한번 가 보고 싶었을 정도로 참 좋은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그의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제주지방 검찰청 차장검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뜻밖의 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뒤 동생 셋을 키워야 했다.
정 박사는 고학생이자 가장이었지만 중학교 시절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는 명문인 서울 경기고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하숙비와 수업료를 마련할 수 없어 부산 지역 명문인 경남고에 입학했다.
그는 돈이 없어 교과서도 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책 한 권에 여러 과목을 필기하며 공부했지만 고교 1학년 때 평균 100점 만점에 99.8점을 받아 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대학 갈 돈도 없는데 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에 고교 2학년 때는 기차역에서 짐꾼들과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친구 어머니가 입학금을 대주겠다고 약속하자 세 달간 공부해 서울대 공대에 수석 합격한 그는 대학을 마친 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결혼하고 싶었다. 상대는 당시 서울대 공대 신윤경 교수의 질녀인 신도형(64) 여사. 빈털터리인 그에게 딸을 줄 부모는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산 비행기 표를 ‘나를 남편으로 섬길 생각이 있으면 오라’는 간단한 편지와 함께 보냈다. 신 여사는 보따리 두 개를 들고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와 결혼식을 올렸다.
정 박사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땐 딸이 두 명이었고 6000달러나 빚을 진 상태였다. 당시 월급으로 1000달러나 주겠다는 미국 회사도 있었지만 술값이나 될까 말까 한 월급을 받는 서울대 조교수를 택했다. 그는 당시 30세로 최연소 서울대 교수란 기록을 세웠다.
정 박사는 “미국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작은 일에도 만족할 수 있고 조그만 일에서부터 충실히 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이라며 “후진들을 위해 귀국했다”고 말했다.
한참 동안 지난 이야기를 하던 정 박사는 최근 현안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교육은 불평등해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을 폈다. 정 박사는 “학생들에게 최대한 기회를 주어야 하지만 결과의 차이에 대해선 철저히 평가해야 한다”며 “모든 학생을 똑같은 수준으로 만들려는 교육정책은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 사건에 대해 그는 “과학자가 연구의 한 과정 과정에 진실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말했다.
정년퇴임 이후의 생활을 묻자 그는 “정말 바쁘다”고 말했다.
“10년째 친구와 같이 매달 한 번씩 등산을 하는 오늘 같은 날이 이제 더 많아져야 되지 않겠느냐. 정년 이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최대한 만끽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다.”
한국의 원자력공학 1호 박사인 그의 인생 2막은 이미 열렸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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