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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 불교를 전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는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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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금관성 파사석탑’조와 ‘가락국기’조에 따르면 서기 48년 5월 인도 아유타국의 국왕과 왕후는 “공주를 가락국에 보내 수로왕의 배필이 되도록 하라”는 하늘 상제의 명을 받아 딸 허황옥을 동쪽의 가락국으로 보냈다.
불교국가였던 아유타국의 왕은 이때 먼 바닷길을 가는 동안 있을지도 모를 바다 신의 노여움(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는 탑을 실었고, 공주의 가야국 생활을 도와 줄 종복 20명을 함께 보냈다.
허황옥은 2개월 여 만인 7월 27일 가락국 별포 나룻목에 도착하자마자 비달치 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이를 폐백 삼아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른 후 성밖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장막 왕실에서 수로왕을 만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례를 치른 두 사람은 이틀 밤을 보내고 왕실로 돌아갔다.
『삼국유사』에서 가락국, 즉 가야와 허황옥을 언급한 대목의 대강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자료와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설화 등에 따르면 허황옥이 가야에 올 때 숨겨진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저 멀리 아유타국에서 가야까지 오는 동안 허황옥을 보살피는 한편 가야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허황옥의 오빠인 승려 보옥이 동행했던 것이다.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자료와 설화가 철저하게 가공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면 허보옥은 우리나라에 온 첫 번째 외국인 승려가 된다.
그렇다면 허황옥이 수로왕과 더불어 국사를 돌보는 동안 함께 온 오빠 보옥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가야에 도착한 이후 줄곧 수행에 전념하면서 장유화상(長遊和尙) 보옥선사(寶玉禪師)로 불리고 있었다. 때를 기다리면서 홀로 수행정진하던 그는 수로왕 57년(98)에 수로왕의 아들 10명 중 왕의 뒤를 이을 첫째와 허황옥의 성씨를 물려받은 둘째·셋째 아들을 제외한 일곱 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장산(지리산)으로 자리를 옮겨 정진한 끝에 수로왕 62년(103)에 일곱 왕자와 함께 성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수로왕은 왕자들이 있는 산으로 찾아갔으며, 왕자들이 수도한 하동 칠불사 자리에 칠불선원을 세워 일곱 아들의 득도를 기념했다.
장유화상 보옥선사에 대한 기록은 「칠불암 현판기」에서 나온 칠불암(七佛庵) 유사(遺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김해 가락국 수로왕이 잠룡으로 계실 때 서역 월지국 보옥선사가 큰 인연이 동쪽에 있음을 보고 그 매씨(妹氏)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수로왕과 배필을 이루니 아들 열 명을 두셨다. 한 분은 태자로 책봉하고 두 분은 허후의 성을 따르게 하고 남은 일곱 명은 보옥선사를 따라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우다가 다시 방장산으로 들어가서 운상원을 짓고 다년간 좌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 장유화상 실존 여부 가려야
또 17세기초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양지(晋陽誌)』에서는 칠불암을 기록하면서 “어느 왕이 일곱 왕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 그 선인과 놀다가 칠(七) 왕자가 성불했다”고 언급하고 있어 이 선인이 장유화상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고 있다.
현존 자료 중 장유화상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자료는 김해 옛 명월사(현 흥국사)의 「명월사사적비문(明月寺事蹟碑文)」이다. 이 비문에는 “절을 중수 할 때 또 하나의 기와를 무너진 담 아래에서 얻으니 그 뒷면에 건강원년갑신삼월남색(建康元年甲申三月藍色) 등의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장유화상이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받들어 와 왕이 중히 숭불하였던 것을 역시 가히 체험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이 비문은 1708년 증원이라는 승려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장유화상에 대한 기록은 현재의 김해시 장유면 불모산에 자리한 장유사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장유사(長遊寺) 사리탑 옆에 세워진 「가락국사(駕洛國師) 장유화상기적비(長遊和尙紀蹟碑)」에는 장유화상의 행적에 대해 “화상의 성은 허씨이며 이름은 보옥으로 아유타국 왕자이다.(…)만년에 가락국의 왕자 7명과 더불어 방장산(지리산)에 들어가 성불케 했으니 지금 하동군 칠불암이 그 터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 장유사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장유화상 사리탑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팔각사리탑으로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 사리를 봉안하고 있으며 가락국 제8대 질지왕(451∼492) 재위 중 장유암 재건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김해 은하사 대웅전 안에 있는 「취운루중수기」 현판에는 “장유화상은 허왕후의 오빠로 허왕후가 가락국에 올 때 동행했으며 도착 후 수로왕의 명으로 은하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812년에 만들어진 이 현판 기록은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빠로 직접 기록된 첫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현재까지 허황옥의 고향과 떠나온 장소 등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다. 허황옥에 대한 논란은 대략 기원전 3세기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서 크게 번성한 태양조 불교국 아요디야에서 왔다는 설, 아요디야에서 중국 서천성 보주를 거쳐 양자강 하구에서 황해를 건너온 일족이라는 설, 타이 방콕 북부의 고대 도시 아유타와 관련이 있다는 설, 일본 규슈 지방에서 도래했다는 설, 기원 초 중국의 전후한 교체기에 발해 연안에서 남하한 동이족 집단이라는 설 등이다. 이처럼 허황옥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마당에 조선시대 후기에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장유화상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회의적 반응이 이는 게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김수로왕릉 정문에 쌍어문양은 현재 인도 아야디야 주 정부의 문양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야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는 재야사학자들은 허황옥과 장유화상을 이 땅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인물로 믿고 있다. 따라서 불교학자를 비롯한 관련 학계의 공동연구를 통한 보다 체계적이고 깊은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 초전 마라난타는 인도승
조선 후기 문헌만으로 장유화상의 실존 여부를 명확하게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땅에 들어온 첫 번째 외국인승려는 진나라 부견(符堅) 왕의 명으로 372년 고구려에 온 순도(順道)라고 할 수 있다. 순도는 소수림왕 2년인 372년 부견 왕의 명을 받아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했고, 이어 2년 후에 또다시 부견 왕의 명을 받은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들어왔다. 그러나 후한 때부터 양나라 때까지 760명에 달하는 고승들의 행적을 수록한 중국의 『고승전(高僧傳)』에 따르면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당시 유명한 중국 강남지방의 승려 지둔(支遁, 314∼366)과 교류한 사실이 있어, 이미 순도 이전에 중국 승려가 고구려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고구려에는 순도와 아도 이후에 광개토대왕 당시(391∼412) 중국 승려 담시(曇始)가 경과 율 10여 부를 가지고 고구려에 와서 불교 가르침을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시대에는 침류왕 원년인 384년에 서역 출신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남중국의 동진(東晋)에서 뱃길로 들어와 다음해에 수도인 한산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배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라난타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이어 『해동고승전』에서도 “인도 출신인 마라난타가 교화를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중국을 거쳐 백제에 왔다”는 고기(古記)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백제 역시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침류왕 때 불교의 공식적 수용 이전에 외국인 승려가 들어왔을 가능성은 있으나 현재까지 구체적 자료는 없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마라난타의 백제 전법이 간다라 지역 마을에서도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민희식 박사와 장성욱 박사는 함께 엮은 전기적 소설 『마라난타』에서 “마라난타는 백제에 갔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절을 짓고 포교활동을 계속했으며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여정과 모험담을 이야기하곤 했고 이것이 1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간다라(지금의 파키스탄)의 분드 마을과 갈리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고 밝혔다. 이어 『삼국유사』에서는 겸익이 522년 최초로 인도에 유학한 후 율장의 경전과 다른 경전 등을 배에 싣고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과 더불어 526년 백제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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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해시 장유면 불모산에 자리한 장유사에는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남아 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31호. |
고구려와 백제에 이어 신라에서는 576년에 외국인 승려가 들어온 첫 기록이 나타난다. 안홍법사가 진흥왕 37년(576)에 구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와 있던 인도승 비마라(毗摩羅), 농가타(農伽陀), 불타승가(佛陀僧伽) 등과 함께 귀국한 것.
이들 인도승은 공식적으로 신라에 온 최초의 외국인 승려다. 또 『해동고승전』에서는 “진평왕 42년(620)에 안홍법사가 서역 및 중국 승려들과 함께 당으로부터 귀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의 안홍법사가 앞서 삼국유사에 나타난 안홍법사인지는 알 수 없다. 혹, 누군가 착각해 이름을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인도와 당나라 승려들이 신라에 입국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신라에 서역·중국 승려 다수 입국
신라에 외국인 승려들이 적지 않았음은 『삼국유사』「홍법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종은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은 순교하다’조에서는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처럼 연이어 섰다.(… )타방의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분황의 진나, 부석의 보개, 낙산의 오대 등) 서역의 명승들이 이 땅에 오시니 이로 말미암아 삼한은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온 세상은 어울려 한 집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서역의 명승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는 나오지 않으나 적지 않은 수의 서역 승려들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이 시기는 이미 우리나라의 유학승들이 중국과 인도 등 해외로 유학을 떠나면서 서역 여러나라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으므로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 중 승려들의 방문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아랍의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마스오디나 알 마끄디시가 “신라에 간 사람들은 공기가 맑고 부(금)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조계종에는 숭산 스님이 해외포교에 나선 이후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불교에 귀의해 직접 출가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77호 [2008년 12월 08일 1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