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가르치듯 스스로 행한다면
그 자신을 잘 다룰 수 있고
남도 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다루기란 참으로 어렵다
- 『법구경』
『법구경』 제159게송은 빠다니까띳사스님(빠다니스님)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빠다니스님은 5백 명 비구 대중의 스승이었고, 5백 명 제자들에게 엄격한 수행을 시켰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자신의 거처에 들어가서는 좌선은커녕 누워서 편히 쉬고서는 다시 제자들에게는 고된 수행을 강요했다. 결국 제자들은 스승 빠다니스님에게 불신하는 마음이 커져서 육체와 정신적 피로로 참다운 수행을 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들으신 부처님께서 위의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스승이 되기에 앞서서 자신이 스승으로서 손색이 없는 가를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다. 참다운 스승의 길은 이것과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일상의 이야기를 기록한 경전들을 살펴보면 부처님은 항상 일일일식(一日一食)으로 평생을 변함없이 사신 분이다. 새벽 동이 틀 즈음에는 어김없이 대중과 함께 걸식을 하기 위하여 발우를 손에 들고 거리에 나스셨다. 병든 제자에게는 도반들이 음식을 나누어 주도록 가르치셨고, 몸이 허약한 수행자에게는 아침 죽으로 허기를 달래도록 배려하셨다. 오후의 불식(不食)을 어려워하는 제자에게는 과일 즙이나 미음으로 굶주림을 면하도록 마음을 쓰신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 자신은 항상 일일일식으로 음식에 대한 탐욕을 완전히 다스린 분이시다.
평생 대중과 함께 걸식한 붓다
스승의 모습은 멀리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의식주의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제자에게 비쳐지느냐가 곧 스승의 자격인 듯하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존경을 받기가 쉽지만, 한 지붕 아래서 함께 기거하는 사람들에게는 존경받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을 모두 여실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에게, 또는 직제자에게 존경을 받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부처님은 항상 1천2백여 명의 대중과 기거를 함께하셨다고 한다. 그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수행생활을 가다듬어 갔다고 한다. 제자들이 기록한 부처님의 전기에는 한결같이 존경의 염(念)으로 가득하다. 제자들에게 일부러 꾸며서 보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진리에 입각해서 행동하신 듯하다. 이미 진리를 보고나면은 삶이 그대로 진리일 수 있듯이 부처님도 그와 같이 사셨으리라 생각되어질 정도로 거룩한 언행이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칭(名稱) 중에는 조어장부(調御丈夫)라는 이름이 있다.
물론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으로 중생을 잘 다스려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서 깨달음에 이르신 분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는 이상으로 부처님은 자신을 잘 다스리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도(成道) 전에 6년의 고행도 바로 자신을 다스린 나날이었다고 본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이끌림으로부터 자신을 잘 제어하여 흙탕물의 찌꺼기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듯 참으로 자신을 완벽하게 다스리신 분이 우리들의 스승인 부처님이시다. 그러한 삶을 사신분이 제자들을 향하여 ‘남을 가르치듯 자신을 잘 다루라’는 경책의 말씀은 우뢰처럼 제자들에게 와 닿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159번 게송을 듣고 바로 예류과를 성취하였다고 한다.
근세 고승의 수행이야기로는 성철큰스님의 8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이야기가 유명하다.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 정진은 동화사 금당에서 견성한 뒤로 여덟 해 동안 줄곧 이어졌다고 한다. 한 때 도봉산 망월사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이다. 그날 밤도 여느 때처럼 장좌불와로 철야수행을 하였고 이 모습을 지켜본 망월사의 춘성노스님도 환갑이 다 된 연세에 장좌불와 수행을 시작하신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꾸며서 보이는 모습 쉽게 들통나
스승이 엄격하면 제자는 그 모습만 보고도 자신의 모습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삼독을 제어(制御)하고 지혜와 자비로 자신을 가다듬으신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커다란 가르침으로 남는다. 근세의 조사가 장좌불와로 오욕의 끝자락을 끊어버린 난행고행(難行苦行)은 새삼 이 시대의 스승의 상으로 가슴을 여미게 한다. 요즈음 우리는 자신이 바로서지도 않고서 남에게 바로서기를 강요하고, 자신은 포만에 빠져있으면서 남에게는 검소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본말(本末)이 전도되었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세태 속에 서로 간에 불신(不信)만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제 늦은 감은 있지만 ‘남을 가르치듯 자신을 잘 다루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소중하게 받드는 우리들의 삶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본각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원심회 김장경 회장
967호 [2008년 10월 01일 1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