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조계종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0. 해외 유학승(중)

淸潭 2008. 8. 13. 18:05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0. 해외 유학승(중)
신라 법랑이 중국 선법 이은 첫 선승
기사등록일 [2008년 08월 11일 월요일]
 
중국 황메이현 사조사 비로탑안에 도신 스님 입상과 함께 봉안된 법랑 스님 입상.

삼국시대 초기 유학승들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열어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사를 건 고난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으로 유학한 한국불교 최초의 유학승 백제 발정이 그랬고, 인도로 가는 첫 번째 뱃길을 열었던 겸익이 그랬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어서면서 해외로 나가는 위험요소가 줄어들었고, 그만큼 유학승들의 수도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유학승들의 구법행이 통일신라 후대까지 이어지면서 한국불교에는 또 다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선종의 등장이다. 중국으로 유학했던 신라 스님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선종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이들은 지방 토호세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라벌 중심의 교학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서서히 정착했다.

황메이현 사조사에서 도신에 구법

선종을 이 땅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을 도의 스님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나, 그 이전에 중국 선종의 4조 도신(道信·583∼654)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호거산에서 법을 전한 법랑(法郞·632∼?) 스님이 있었다.
법랑이 법을 구했던 사조사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운수행각의 중국 선종 수행풍토를 한 곳에 머물며 법을 전하는 집단 수행 형식으로 전환시킨 대표적 도량이다. 집단수행 풍토의 정착은 중국 내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으나, 선농일치를 주창했던 4조 도신 스님의 뜻이기도 했다.

법랑은 사조사에서 도신 스님의 법을 전해 받았으며 그 흔적은 지금도 중국 황메이현 사조사에 남아 있다. 도신 스님의 상을 모신 비로탑 안에 도신의 4대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법랑 스님의 입상이 함께 모셔져 있는 것. 법랑의 선법은 신행(神行·704∼779)에게 전해졌고, 이후 준범, 혜은, 도헌으로 이어져 훗날 지증도헌 스님이 희양산에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을 열었다.

법랑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생몰연대나 입당 그리고 구법시기 등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도헌국사 지선의 비문」, 『대동선교고』「사조명」, 「신행비」등에서 법랑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조명」에서는 “먼 나라의 고사와 이역의 고인들이 험난한 길을 무릅쓰고 법랑 스님이 있는 곳에 모여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법랑 스님의 그릇이 작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법랑 스님이 신라에서 전법활동을 했음은 그의 제자 신행을 찬하는 「신행비」에 “법랑 선사가 호거산에서 지혜의 등불을 전하고 있음을 듣고 그 곳에 나아가 문득 깊은 뜻을 받았다”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법랑의 법을 이은 신행은 스승이 입적한 후에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와 선법을 펼쳤다. 이들의 선은 중국선 중에서도 북종선(北宗禪)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조계종 종조로 추앙 받고 있는 도의(道義) 역시 생몰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40여 년간 공부하고 신라 헌덕왕 13년(821)에 돌아와 처음으로 남종선(南宗禪)을 전한 선승이다.

도의는 강서성 홍주에서 마조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 문하에서 법을 구했고, 이때 서당이 도의에게 법을 전하면서 “진실로 법을 전할 만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라고 했을 정도로 크게 인정받았다. 또 백장선사 역시 “강서의 선맥이 몽땅 동국으로 가는구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수행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도의 역시 법랑처럼 귀국 후 선법을 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자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해 후학을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도의의 선맥은 신라불교를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근현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루며 조계종 종조로 추앙 받고 있다. 당시 도의에 앞서 신라의 본여 스님이 남악회양으로부터 법을 얻었다고 하나, 『전등록』에 이름만 올라 있을 뿐 자세한 기록은 없다. 도의 역시 『전등록』에 서당지장의 제자로 이름이 올라 있다.

반면 『조당집』에는 도의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당집』에서는 “설악 진전사 원적선사는 서당의 법을 이었고, 명주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도의이고 속성은 왕씨였다.…건중 5년 갑자년에 사신인 한찬호·김양공을 따라 바다를 건너 입당했다.…조계에 가서 조사당을 참배하려는데 문이 갑자기 저절로 열렸다.…강서의 홍주 개원사에 가서 서당지장에 참하여 스승으로 모셨다.…”며 비교적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오늘날 도의에 대한 기록 등은 여기에 근거한 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도의가 진전사에 은거해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830년 이후 중국에서 남종선을 공부한 스님들이 귀국하면서 선종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 그 10년 사이에 선종의 역량도 달라진 것이다. 대표적 인물이 홍척(洪陟)으로, 그는 지리산에 머물며 선을 전파하면서 일명 남한조사(南漢祖師) 또는 증각대사(證覺大師)로 불렸다. 헌덕왕 때 당나라에 유학해 서당지장의 심법을 배우고 826년 흥덕왕 1년에 귀국, 828년에 실상사를 창건해 서당지장의 선풍을 선양하며 최초의 구산선문인 실상산문을 열었다.

도의, 귀국 후 진전사서 후학 양성

이 무렵 도의·홍척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유학승들이 적지 않았다. 혜소(惠昭·774-850), 혜철(慧徹·785-861), 절중(折中·826-900), 체징(體澄·804-880) 스님 등이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체징은 도의의 제자인 염거(廉居) 스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도반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중국 유학에서 배우는 것들이 결국은 스승 염거에게 배운 내용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열어 선을 선양했다.

현재 한국선의 원류를 규정함에 있어서 학자들의 견해는 조금씩 다르다. 크게 한국에 선법이 전래된 최초의 시기, 최초로 선법을 실수하고 펼쳤던 인물,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법맥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으나 어찌됐든 최초의 유학과 전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법랑 스님이 주인공이다.

이들 외에도 유학승들의 활약은 여러 부분에서 그 역할이 다르게 나타난다. 명관(明觀) 스님은 565년 진나라에 유학한 후 그 나라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불교 경론 2700여권을 가져 왔고, 이는 곧 신라 불교학 발전의 중대한 토대가 되었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이 대목을 “처음에 신라에는 경전이나 불상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야 분명히 크게 갖추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신라 안홍법사(安弘法師)는 진흥왕 37년(576)에 구법하고 돌아오면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와 있던 인도승 비마라(毗摩羅)·농가타(農伽陀)·불타승가(佛陀僧伽) 등과 함께 귀국했다. 이들 인도승은 공식적으로 신라에 온 최초의 외국인 승려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대승경전인 『능가경』과 『승만경』을 갖고 왔다. 역사 기록물에 유학승들이 돌아오면서 가져온 경전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명랑이 처음으로 밀교 전파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재위기간(632∼647)에 스님들의 유학이 많았고, 이들이 귀국해 신라불교의 전성기를 형성했다. 명랑(明朗)과 자장(慈藏)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크게 활약한 시기도 이 무렵이다.

명랑은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635년에 귀국하면서 최초로 밀교를 들여왔다. 이어 삼국통일 후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는 기세가 엿보일 때 밀교의 비법인 ‘무두루비법’을 써서 당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고 훗날 신라 신인종의 종조가 되었다. 자장은 643년에 귀국하면서 바리와 가사, 사리, 불경 400상자, 번(幡), 당(幢), 화개(花蓋) 등 법당을 장엄하게 꾸미는 장엄물을 들여옴으로써 신라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전하기도 했다.
백제의 발정 스님을 시작으로 한 유학승들의 역할은 이처럼 교학, 수행, 의식 등 각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한국불교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61호 [2008-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