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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불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 현재 해체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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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8년 5월 인도 아유타국. 꿈속에서 ‘공주를 가락국에 보내 수로왕의 배필이 되도록 하라’는 하늘 상제의 명을 받은 국왕과 왕후는 딸 허황옥을 동쪽의 가락국으로 보냈으나, 바다 신의 노여움을 사 가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국왕은 고심 끝에 배에 탑을 싣고 가도록 했다. 허황옥은 배에 탑을 싣고 2개월 여에 걸친 항해 끝에 7월 27일 마침내 가락국에 도착해 이미 그녀가 올 것을 알고 기다리던 수로왕을 만나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호계사를 지어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세웠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관성의 파사석탑’조와 ‘가락국기’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탑이 들어온 것은 후한 건무 24년 무신, 즉 서기 48년이다. 따라서 불교가 전래된 것 또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 아니라 한참이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이 탑이 실존했던 불탑이라는 기록이나 이를 증명할 만한 추가 자료가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학자들 사이에서 이 기록만으로 불교가 전래되고 불탑이 전래됐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를 놓고 논란이 지속되면서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불탑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고구려 요동성의 육왕탑(育王塔)이 첫 불탑이다. 시대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불교가 전래된 이후 초기의 탑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 탑은 삼중토탑(三重土塔)으로 위에는 솥을 엎어놓은 것 같았고, 이를 발견할 당시 국왕이 신심을 내어 7층 목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리고 1938년 평양 시외의 청암리 절터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목탑지와 1940년 대동군 임원면 상오리 절터에서 발굴된 목탑지가 고구려 탑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고구려 탑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탑으로는 백제 무왕시대에 축조한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600년 경 제작 추정)이 꼽힌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200여 년 동안 목탑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목탑의 성격상 오랜 세월을 지탱하기가 힘들었고 그 때문에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석탑이다. 탑 조성 능력이 탁월했던 백제의 장인들이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탑을 만들어야겠다’는 평범한 착상을 비범하게 실행한 결과물이 바로 석탑.
가야국 호계사 파사석탑은 논란 중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 인정받는 미륵사지 석탑의 조성 배경 또한 남다르다. 신라 선화공주와의 낭만적 사랑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 백제 무왕(서동)이 어느날 왕비(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갑자기 미륵삼존이 출현했다. 이를 본 왕비가 이곳에 큰 사찰을 세워달라고 요청하자, 무왕이 지명법사에게 이를 명하고 법사는 법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후 크고 작은 돌을 다듬어 낮은 기단 위에 마치 목재처럼 잘게 나누어 짠 듯한 석재를 수없이 이어 맞춰 기둥을 세우고 내부 공간도 내었으며 지붕까지 짜 맞추면서 거대한 탑신을 구축하여 차곡차곡 20m를 쌓아 만든 것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특히 이 석탑은 마치 나무 목판을 잘라서 못을 쳐 붙인 듯한 백제인들의 신기에 가까운 돌 다루는 예술적 솜씨가 빛을 발하고 불심이 더해져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최고의 불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탑에는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무왕의 삼국통일과 불국토 구현 염원이 담겨있어 상징성 또한 남다르다.
미륵사지 석탑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9호)이다. 미륵사지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아지고 세부 변형도 있으나 미륵사지 석탑과 같은 계통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唐) 장수 소정방이 이 탑에 자신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기공문을 새겨 넣어 쓰라린 치욕의 단면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백제 석탑이 전 시대의 목탑을 모방해 축조한 것과 달리 신라 석탑은 전탑의 양식을 띠고 있다. 그 첫 번째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다(국보 30호). 선덕여왕 3년(634)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분황사 석탑은 재료로 안산암을 사용했다. 안산암을 작은 직사각형 벽돌 모양으로 절단해 쌓아 올림으로써 모전석탑의 전형을 이루면서 백제 탑과는 다른 신라 탑의 특징을 간직하게 됐다.
모전석탑이나 모전석탑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전탑 등은 크게 유행하지는 못했다. 전탑은 탑을 세우기에 앞서 벽돌을 생산해야 하는 수공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모전석탑도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모전석을 만들어내기까지의 어려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수도 경주는 불교의 융성과 함께 석탑문화가 발전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옛 석탑 1300여기 가운데 100여기가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서 ‘경주는 한때 절이 별처럼 퍼져있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할 정도로 탑이 많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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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신라 최고의 불탑인 분황사 모전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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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과 분황사 모전석탑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현존 최고의 불탑으로 손꼽히고 있으나, 양국의 예술적 감각과 지형의 차이로 인해 같고 다른 점이 분명했다. 양국의 초기 석탑이 기본 평면을 정사각형으로 하여 여러 층을 이룬 것과 돌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나, 백제가 화강암을 이용해 목탑계 양식을 따른 반면 신라는 안산암을 주 재료로 삼아 전탑계 양식을 따랐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두 양식을 종합해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경주 감은사지 동서3층석탑이다(682·국보 112호). 이 탑은 기단부는 목탑의 수법을 따랐고, 옥개 받침이 층단을 이룬 데서는 전탑의 양식을 따랐다. 이후 이 양식은 한국석탑의 전형으로 정립돼 후세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꼭 이런 전형적인 탑만 세워진 것은 아니다. 8세기 중엽부터는 기존의 탑 양식과 다른 형태의 탑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불국사 다보탑과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등이다.
이후 고려석탑은 이때까지 이어졌던 왕도 중심 건립에서 벗어나 지방 토착세력이 탑 건립에 관여하면서 일률적인 규범보다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게 되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불탑의 양식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부분이 단절됐고, 이에 따라 조형미술도 점차 소멸되었다. 다만, 고려말의 느낌이 남아 있는 조선 초기 석탑 중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정사각형 중층 모양의 일반형 석탑으로 양양 낙산사 7층 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함양 벽송사 3층 석탑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옛 왕들은 국태민안 불탑 건립
불탑은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후 시대에 따라 변형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과거 위정자들은 건국 후 반드시 탑을 세워 백성과 더불어 국태민안을 염원함으로써 민의를 받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이웃나라의 재난을 막기 위해 국가적 염원을 담아 황룡사 목탑을 세웠고, 이때 뛰어난 재능을 갖춘 백제의 장인들을 초청해 탑 건립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고려 왕건은 개경에 7층탑을 조성했고,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를 연 태조 이성계 역시 연복사탑을 세우는 등 과거의 위정자들은 불탑을 조성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 국가의 안녕을 염원하며 태평성대를 누렸다.
한편 탑은 스투파(stupa)에서 온 말로 본래는 부처의 유골, 유품, 머리카락을 안치하고 공양하기 위해 절에 세웠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들자 다비를 해 연고가 있는 나라와 부족들이 사리를 나누어 각각 탑을 세웠고, 이 탑들이 불탑의 시원이 되는 팔분사리탑이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54호 [2008-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