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라고는 꽃 가꾸는 일 뿐… 무더운 여름에
온몸이 땀에 젖도록 꽃에 물을 줬습니다.
입력 : 2008.03.09 23:22 / 수정 : 2008.03.10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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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은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 선생의 70주기를 맞는 날이다. 도산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具益均·100)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 이사장은 도산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7일 만난 구이사장은 "도산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온건 성향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적극적인 무장투쟁론자였다"고 말했다.
―'도산 선생은 혁명사상가였다'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1 운동 때 다른 사람들은 만세만 부르면 독립이 되는 줄 알았지만, 도산 선생은 10년이고 100년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전 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설계와 계획을 빠짐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걸 실천에 옮겼습니다.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을 창립할 때 이미 '독립혁명방략도'를 구상했는데, 그 마지막 단계에서 전체 민중을 총무장시켜 독립전쟁을 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것은 특수 계급이 아니라 반드시 전체 민족이 함께 혁명 사업을 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충의용감(忠義勇敢)의 원칙으로 인격을 함양하자는 교육론은 그 전 단계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장기 로드맵을 그려놓고 몸소 실천한 정치가는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 구익균씨가 서울 종로구 낙원동 집무실의 도산 안창호 선생 영정 앞에서 선생과의 추억을 회고하고 있다. 올해 만 100세인 그는 보청기를 했을 뿐 정정했고, 80년 전 사건들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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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좌우 통합을 추진한 정치가라고 하셨는데….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도산의 대공주의(大公主義) 사상입니다. 민족 전체의 범국민적인 평등사회를 실천하자는 것이고, 사회주의 사상 일부까지 포용해 초(超)계급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하면서 자기 희생정신으로 민족과 인류에게 멸사봉공하는 사상이지요. 정치·경제·교육에서 평등한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는 '3평등 원칙'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의 삼민주의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도산은 우리 민족의 우월성만 주장하다 보면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자기 민족이 세계 최고라는 우월감에 빠지게 된다고 우려했습니다. 도산의 민족주의는 어디까지나 민족을 해방하자는 것이지 다른 민족을 짓누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당시에 어떻게 실천에 옮겼습니까?
"나는 1929년부터 도산의 지시로 '대독립당(大獨立黨)'이라는 비밀 정당을 추진했어요. 이념과 지역적 분파를 초월하고 순수한 애국정신에 투철한 독립운동가들만 엄선했습니다. 그런데 1932년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뒤 도산이 그만 일경에게 체포돼 귀국하는 바람에 중단됐지요."
―공산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모두 포용했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상하이의 공산주의자들이 도산을 비판하다가도 하숙비가 떨어지면 도산을 찾아왔습니다. 또 오면 시계라도 풀어 줬습니다. 구연흠(具然欽)씨 같은 좌익 운동가는 자기 딸의 취직을 도산에게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도산이 광복 뒤에도 살아 계셨더라면 남북 분단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국내고 미주고 모든 교포들이 애국금을 보낼 때 도산에게만 보냈어요. 인촌 김성수(金性洙)씨는 상하이에 오면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도산하고만 만나서 군자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만큼 독립운동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던 것이죠. 도산은 조선일보 사장이던 계초 방응모(方應謨)씨와도 절친했는데, 계초는 도산을 조선일보의 고위직으로 모시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10만원권 지폐 도안에 백범 김구(金九) 선생을 넣기로 했습니다. 도산 선생도 후보로 올라갔지만 탈락했는데요.
"그것은 한 마디로 주객전도(主客顚倒)지요.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도산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백범은 닷새에 한 번씩 꼭 도산을 찾아와서 앉은 자리에서 냉면을 두 그릇 비우고 돌아갔습니다. 두 분 다 냉면을 아주 좋아했어요. 도산은 그 자리에서 백범에게 군자금을 제공했지요. 도산이 백범보다 두 살 아래였는데도 백범은 도산에게 반드시 '선생님'이라 불렀고 도산은 '백범'이라 불렀어요. 1932년까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사람은 도산이었습니다. 도산은 윤봉길 의거도 미리 다 알고 있었어요."
―요즘 많은 초등학생들이 안창호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위인전에 등장하는 옛날 분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옆에서 지켜 본 도산 선생께서는 실제로 어떤 분이셨습니까?
"참 온화하고, 화도 잘 안 내시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이셨죠. 이북 출신인데도 사투리는 하나도 안 쓰고 서울말만 썼지요. 밤 10시에 취침하고 아침 여섯 시면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태극권이나 검술 운동을 했어요. 그것 말고 취미라고는 꽃 가꾸는 일 뿐이었는데, 무더운 여름에 온몸이 땀에 젖도록 꽃에 물을 줬습니다. 술은 1~2잔 마시고 나면 얼굴이 빨갛게 돼서 많이 하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항상 담배를 물고 있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내가 '선생님은 왜 다른 건 다 실천하시면서 담배 끊는 것만은 못 하십니까'라고 항상 말해도 끝내 못 끊다가 나중에 감옥에 가서야 끊었지요. 석방된 뒤에는 여러 사람들이 잔칫상을 열어 줘서 과식을 한 탓에 위장병에 걸려 트림을 많이 했습니다."
―도산 선생은 가족들을 모두 미국에 두고 상하이에선 혼자 지내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도산은 늘 양복과 넥타이, 중절모를 깨끗하게 차려 입는 멋쟁이였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도산을 사모했는데, 어느 날엔 최모라는 신여성이 침실로 몰래 들어와서 도산이 자고 있던 침대에 누웠어요. 그러자 도산은 조용히 '불을 켜라'고 말한 뒤에 '이렇게 나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그것을 독립운동으로 돌려라'고 하고는 돌려보냈어요."
―새로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존경하는 인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을 꼽았습니다. 대통령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습니까?
"국민의 경제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산 선생처럼 장기적이고 영속적인 국가의 미래를 치밀하게 설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보적인 요소를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모두 다 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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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1878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 활동을 벌였고, 1907년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을 조직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 등을 지냈다.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기 위한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고, 1932년 윤봉길 의거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본국으로 송환됐다. 1935년 가출옥했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됐다. 병보석된 지 4개월 만인 1938년 3월 10일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구익균씨는
1908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신의주고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됐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지냈다. 영어·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해 도산 선생에게 새로운 사상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3년 중국 광둥 중산대학의 교수로서 혁명 운동가 양성에 힘썼다. 1935년부터 1944년까지 세 차례 일경에 체포당하기도 했다. 광복 뒤에는 진보당·통일사회당 등 정치 활동과 무역업을 했다. 1983년 도미했다가 2005년 귀국, 2006년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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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70주기를 맞는 날이다. 도산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 이사장은 도산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7일 만난 구이사장은 "도산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온건 성향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적극적인 무장투쟁론자였다"고 말했다. /최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