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原 華城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1794년 1월에 착공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八達門과 옹성(甕城) (보물 제420호)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문으로 규모와 형태면에서 중국의 장안문과 거의 같다
長安門
이 문은 화성 4대문의 북쪽 문으로서 정조 18년(1794년) 건축되었으며
중국의 역사에서 장안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이를 정조가 북문의 이름으로 정해 태평성대를 구가한
중국 漢,唐의 서울이었던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
이름을 장안문이라 하였다.
長安門
華西門 (보물 제 403호)
華西門
蒼龍門
西將臺
西弩臺
西北空心墩
東二砲樓
東南角樓
烽墩 (봉화대)
화홍문 (華虹門)
訪花隨柳亭
訪花隨柳亭
華城行宮
北漢山城 (사적 제162호)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성(築城)되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이곳에서 몽골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긴 일도 있는데 이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고,
1387년 우왕 때는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하여,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지금은 성곽의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무너졌으나,
대서문이 남아 있으며, 성체(城體)는 복원되어 완전히 보존되었다.
南 漢 山 城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신라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하였다.
그러나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남문 -지화문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
연주봉옹성
낙서장
남한산성행궁지
산성에서내려다본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