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修德寺) (수덕사(修德寺) 관광정보 보기)
1. 사찰소개
2. 사찰의 역사
창건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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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광정보
간월도 간월암
충의사(忠義祠)
덕산온천
추사고택
안면도 황도리 붕기풍어제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해미읍성
4. 사찰 문화행사
만공스님 다례제
봉축법요식
일본 아스카사와의 자매결연
수덕사 아스카사(飛鳥寺) ..
수덕사 (修德寺)
1. 사찰소개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덕숭산 수덕사 등록자명: 임윤수
관음의 화신 덕숭낭자 버선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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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 좌측으로 고암 이응노 화백이 살았던 초가의 <수덕여관>이 있다. 여관 앞에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에서 화백은 구상을 잡고 캔버스를 펼쳐 그림을 그렸을 듯하다. |
관성법칙'이란 게 있다. 중학교 물상 시간에 배운 것으로 뉴튼의 제1법칙이다. 선생님은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추거나 정지하면 앞뒤로 쏠림이 생겨 서있던 사람들이 넘어지려 하는 현상을 가지고 관성법칙을 설명했다.
중학교 때 관성법칙은 단지 문제를 풀기 위해 외워야 하는 많은 공식 중 하나며 기껏해야 물리 현상에나 적용되는 자연 법칙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살다 보니 관성법칙은 단순한 공식도, 자연계에만 작용되는 그런 법칙이 아니다.
살다보면 가끔 '머리 따로, 가슴 따로'를 경험하게 된다. 사랑하던 연인과의 헤어짐에서 그 현상은 뚜렷하다. 이성적 지배를 받는 머리로는 분명 정리되어 더 이상 만나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러나 감성의 바다인 가슴에선 연인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이 점점 더 큰 풍랑을 만들어 낸다. 이게 바로 감성의 관성 탓이다.
어디 그 뿐이야. 권력의 속성을 맛 본 사람은 권력의 관성에 지배받고 돈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은 돈의 관성을 극복하지 못해 파경의 길을 가게 된다. 이런 저런 관성의 풍랑이 결국 번민과 갈등이 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장애물도 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불혹'이라 일컫는 40의 나이는 '모든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음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고 유혹되지 않을 게 없음을 나타낸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굴렁쇠처럼 서서히 구르던 오욕칠정이 관성의 탄력을 받아 멈추기 힘든 고비의 절정기가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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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사는 비구니절이 아니며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다섯 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
유아기 때는 엄마의 젖무덤과 달콤한 사탕만이 유혹이었다. 사춘기 땐 이성의 도톰한 입술과 감미로운 목소리가 유혹으로 다가오더니 청장년이 되니 진로와 이성을 소유하고 싶은 뜨거움이 유혹으로 밀려왔다. 사회로 진출하며 출세욕과 명예욕이 본성을 드러낸다.
40대의 나이가 되니 이런저런 유혹들이 얼키설키 흔들림으로 다가온다. 불혹의 나이라는 40대는 미혹을 떨굴 만큼 성숙한 나이가 아니라 흔들림과 갈등의 나이다. 잠자는 아가의 작은 숨결에도 흔들릴 만큼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사춘기 때라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하찮은 설렘에도 열병을 앓는 그런 나이가 40대 아닌가 모르겠다. 그런 흔들림과 갈등을 잠재우고 달래기 위해 오늘도 관성적으로 산사를 찾는다.
오래 전 송춘희라는 가수가 불렀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인지 수덕사를 비구니(여승) 절로 생각하는 사람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러나 수덕사에는 국내 최초의 비구니 선방인 견성암과 환희대가 산내 암자로 있을 뿐 비구니(여승) 절은 아니다. 현재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계시는 법장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피선되기 전까지는 바로 수덕사의 주지 스님이셨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5대 총림(叢林) 중 한 곳이다. 총림이란 범어 'vindhyavana(빈타파나)'의 번역으로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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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은 3번째 고건축물인 대웅전은 건물 자체가 국보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
현재 우리 나라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총림으로 지정된 곳은 수덕사의 덕숭총림, 해인사 가야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백양사 고불총림 5곳뿐이다.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과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 그리고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 및 염불 교육 기관인 염불원을 갖추어야 하며 총림의 어른이신 방장 스님이 계셔야 한다.
수덕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렇게 험한 산을 넘지도 않고 커다란 강을 건너지도 않는다.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과 덕산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가로지르는 지방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 곳에 덕숭산이 있고 덕숭산 품안에 수덕사가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행지 기분을 물씬 나게 하는 상가 골목을 지나 15분쯤 들어가면 일주문에 도달하게 된다. 일주문 옆에는 초가로 된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살았던 곳이다. 여관 앞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다. 화백은 이 바위에서 구상을 잡고 캔버스를 펼쳐 그림을 그렸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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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을 이루고 있는 기둥에선 세월이 깊이가 느껴진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기둥의 터진 자국에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 담겨져 있다. |
일주문을 들어서 이런 저런 문들과 전각을 지나게 되면 대웅전 마당에 서게 된다.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은 세번째 최고령 고건축물로 건물 자체가 국보 49호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세월이 느껴지는 기둥의 터진 자국에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 묻어나는 맞배지붕 주심포계 고건축물이다.
교구 본사의 커다란 사찰들 대부분이 그렇듯 수덕사도 몇몇의 산내 암자가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 바로 왼쪽으로 비구니승 도량인 환희대가 있고 원통보전이 있다. 경내를 지나 팻말을 따르면 견성암을 비롯한 암자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덕숭산 정상 쪽으로 산길을 오르면 정혜사가 있다. 정혜사는 평소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국내 몇몇 선원 중의 한 곳이다.
대개의 고찰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전설이나 설화 하나쯤 가지고 있듯 수덕사에도 가슴을 여리게 만드는 설화가 있다. 절뿐만 아니라 절이 들어선 덕숭산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애틋한 설화다. 설화의 귀착점이 되는 곳은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 있는 관음바위다.
옛날 이곳엔 수덕이라는 도령이 살고 있었으며 사냥을 즐겨했다고 한다. 비록 늙었지만 몰이를 잘하는 할아범과 몇몇 머슴들을 데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도령은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시중 들던 할아범이 노루를 발견하곤 도령에게 활시위를 당기라고 채근하니 귀를 쫑긋 세운 노루 한마리가 숲 저쪽에서 다가왔다. 도령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고 화살을 막 쏘려다 엷은 눈웃음을 흘리더니 말없이 활을 거두었다.
몰이를 하느라 진땀을 뺀 하인들은 활을 당기기만 하면 노루를 잡을 판이기에 못내 섭섭해 하기도 했지만 도련님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어찌된 일인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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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앞에는 마당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다. 위쪽 마당 가운데는 3층석탑이 있고 아래 마당 가운데는 코끼리 석등 있다. 코끼리 석등 동쪽에는 법고각, 서쪽에는 범종각이 있으며 마당 어디서고 탁 트인 전망이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다. |
그러자 도령이 노루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너희들 눈에는 노루만 보이느냐? 그 옆에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때서야 노루 옆에 서있는 처녀를 보게 된 하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루 옆에는 정말 아름다운 처자가 서있었다.
하인들 중 한명이 "도련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노루 대신 여인이라도… "하며 말끝을 흐렸다. 도령은 "에끼 이 녀석, 무슨 말버릇이 그리 방자하냐. 자 어서들 돌아가자"하고 야단을 치며 양반의 체통을 지키려 걸음을 재촉했지만 뛰는 가슴을 어쩔 수는 없었다.
노루 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여인! 어쩜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덕 도령의 가슴은 더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도령의 마음엔 온통 아가씨의 환상뿐이다.
눈길에서 멀어져 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 있는 수덕의 가슴은 진정되지 안았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뿐이었다. 여인 대한 그리움은 열병처럼 도령을 엄습해 버렸다. 그러기를 며칠, 하는 수 없이 수덕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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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는 관음상이 모셔져 있고 관음상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다. |
할아범이 알아 온 바에 의하면 그녀는 바로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였다. 아름답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문장이 출중하여 마을 젊은이들이 줄지어 혼담을 건네고 있으나 어인 일인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덕의 가슴엔 불이 붙었다. 자연 글 읽기에 소홀하게 된 수덕은 훈장의 눈을 피해 매일 낭자의 집 주위를 서성댔다. 그러나 먼 빛으로 스치는 모습만을 바라볼 뿐 낭자를 만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열병 같은 짝사랑에 가슴을 태우던 수덕 도령은 용기를 내어 낭자의 집을 찾았다.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며 도령은 덕숭 낭자에게 진지하게 청혼을 했다. 만약 청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음으로라도 그 뜻을 풀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지만 낭자는 아직 혼인할 나이도 아닐 뿐더러 고아와 같은 미천한 처지라며 완강하게 청혼을 거절했다.
수덕 도령의 마음은 점점 더 낭자에게 빠져들었고 조급해졌다. 앉으나 서나 온통 낭자의 환상에 잡히게 되어 정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되어 몰골이 된 모습으로 다시 낭자를 찾아 혼인해 줄 것을 애절하게 간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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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에 피어난 꽃이다. 이 꽃이 정확하게 버선꽃인지는 모르지만 순백의 꽃잎에서 낭자의 아리따움을 연상하게 된다 |
수덕의 간청을 듣고 있던 낭자는 두 볼을 붉히며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낭자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면 청혼을 받아 주겠다는 말이었다. 낭자의 소망은 다름 아닌, 일찍이 비명에 돌아가신 어버이의 고혼(孤魂)을 위로하도록 집 근처에 큰 절을 하나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도령은 낭자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겠다 약속하고 곧바로 불사에 착수한다. 마음이 바쁜 수덕 도령은 부모님의 반대와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상관치 않고 오직 불사에만 전념했다. 터를 가다듬고 기둥을 세웠다. 서까래를 올리고 벽을 쌓으며 기와를 구웠다. 불철주야로 불사에 혼신을 다하니 이윽고 한달만에 절이 완성됐다.
불사를 끝낸 수덕 도령은 한걸음에 낭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들뜬 마음에 낭자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막 단청이 끝낸 절을 구경하러 가자고 하니 낭자는 구경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 한다. 한번도 절 짓는 곳을 다녀간 적이 없는 낭자가 불사된 절을 본 듯 말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할아범이 헐레벌떡 뛰어와 혼신을 다해 세운 절이 불길에 휩싸여 폭삭 주저앉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동안의 공덕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절망감과 하루라도 빨리 낭자를 품에 안고 싶은 열망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순간이기에 수덕 도령은 좌절하며 부처님을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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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숭산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소림초당'이란 편액이 붙어있는 초가가 나온다. 산길을 오르다 커다란 바위에 틀어 앉은 초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업이 한 꺼풀은 벗겨진다. |
그러자 옆에 있던 낭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부처님을 염하면서 절을 다시 지으면 된다"고 위로했다. 수덕 도령은 결심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면서 기도를 했으나 이따금씩 덕숭 낭자의 얼굴이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어 수행하듯 절을 완성할 무렵 또다시 불이 나고 말았다. 수덕 도령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낭자에 대한 도령의 사랑과 애틋함은 불사의 손길을 멈추지 않게 하였다.
또 다시 한달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신비롭기 그지없는 웅장한 대웅전이 완성되었다. 그 동안의 우여곡절이 주마등처럼 기억에 지나가니 도령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관세음보살"을 연송했다.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뛰다시피 덕숭 낭자를 찾아 절이 완공되었음을 알린다. 이번에도 낭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듯 도령을 반갑게 맞이하며, 소녀의 소원을 풀어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며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 약속을 했다.
며칠이 지나 마침내 신방이 꾸며졌다. 오직 하나, 덕숭 낭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주위의 비난과 조롱쯤 아랑곳하지 않고 오랫동안 일념의 시간을 보내 온 도령에게 있어 신방은 꿈이었으며 뜨거운 피를 식힐 수 있는 유일한 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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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림초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만공탑이 나온다. 둥그런 지구의 형태인 탑에서 뭔가를 느껴질 듯하다. |
들뜸과 설렘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둘 만이 남게되었을 때 촛불 은은한 가운데 낭자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문을 열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만은 따로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말인가.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도령의 뜨거움을 식힐 수 있는 길인데 잠자리를 따로 하자니….
도령의 가슴은 너무도 뜨거웠고 그 뜨거움을 주체할 수 없었기에 낭자의 애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수덕은 낭자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런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풍이 일며 낭자의 모습은 섬광처럼 문밖으로 사라졌고 수덕 도령의 두 손엔 버선 한짝만이 남겨져 있었다.
은밀하게 차려졌던 신방도, 연지곤지를 찍고 아름답기만 했던 덕숭 낭자도 순식간에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정신을 차린 도령이 손에 든 버선을 들여다보는 순간 신방에 있던 큼직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에서 낭자가 신었던 버선과 흡사한 하얀 꽃이 피어 있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때서야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가 관음의 화신임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도령은 낭자와의 애틋한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수덕사'라 부르고 수덕사가 자리잡고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다고 한다.
자신은 비록 덕숭 낭자의 품에 안기지 못했으나 자신이 불심으로 일군 절이라도 덕숭 낭자의 품에 안기고 싶어 절을 품고 있을 산의 이름을 덕숭산이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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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사 경내에 있는 석탑이다. 선원에서 갇힌 듯 수행 생활을 하는 많은 선승들에 깨우침을 향한 염원과 기도의 애환이 깃들여 있을 듯 하다. |
흔들리는 마음과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절을 찾았건만 설화 속 덕숭 낭자와 수덕 도령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다시 마음을 흔들어 댄다. 역시 40대 나이는 어느 것에도 흔들리는, 미혹되지 않을 게 없는 부불혹(否不惑)의 나약하고 위험한 나이인가 보다. 이제야 알겠다. 세월의 관성만큼 분명한 관성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수덕사 찾아가는 길
서울→경부고속도로→천안I.C→국도21호선→온양→예산→ 삽교→덕산→수덕사 (☞지도보기)
서울→서해안고속도로→서해대교→해미I.C→수덕사 (☞지도보기)
수덕사 주변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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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에서 내려다본 수덕사 |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예산을 포함한 충청도 일대지역을 가장 살기좋은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야가 넓어 농산물이 풍족한곳이요, 아산만에서 태안반도의 바닷길 또한 발달해서 상거래도 활발한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란다.
덕숭산(德崇山)은 태백산맥으로부터 서해를 향해 뻗어나간 차령산맥의 줄기이다. 삽교천 상류의 수원이기도 한 덕숭산은 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과 서쪽의 오서산 동남쪽 용봉산(龍鳳山)으로 둘러싸여 있다.
495m 덕숭산 정상까지는 30분정도 소요되는데, 밤에는 소쩍새가 울고 낮에는 꾀꼬리 뻐꾸기 산비둘기의 노랫소리 청량함이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시지각을 즐겁게 해준다. 주변의 절경으로 원효봉(630m) 석문봉(670m) 해태바위 등이 있다. 덕숭산을 뒤덮고 있는 상수리나무 구렛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숲의 울창함을 맛보면서 산마루에 오르면 홍성일대와 예산 서산 당진지방까지도 내려다 보인다.
덕숭산(德崇山)과 수덕사(修德寺)라는 산이름과 절이름에서 절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덕숭산(德崇山)은 덕(德)을 숭상하는 산이라 하고, 수덕사(修德寺)는 덕(德)을 닦는 절이라 풀이할 수가 있는데, 덕산(德山)이라는 지역 명칭도 어쩌면 여기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김영태교수는 1997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백제고찰 수덕사의 사적고찰」에서 주장한다.
수덕사의 가람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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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
덕숭아씨와 수덕도령의 설화가 전해내려오는 수덕사에 들어서려면 먼저 일주문을 지나야 한다.
일주문에는 <동방제일선원> <덕숭산수덕사>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어 수덕사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가람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일심(一心)으로 십선[十善: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不兩舌)·불악구(惡口)·불기어(不綺語)·불탐욕(不貪慾)·불진에(不嗔에)·불사견(不邪見)]을 닦아야 부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되새기면서 진속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일주문안으로 성큼 들어가보자. 수행도량답게 금당으로 향하는 길이 정갈하게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공간의 위계성을 나타내기 위해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이고 금강문을 지나야 천왕문이 나온다. 참배객들은 금강문과 천왕문을 통과해야 한다. 통과의례처럼 무심하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곳이지만, 속세와 해탈성지를 구획하는 이 두 곳의 수문장 금강역사와 사천왕상이 금당으로 가는 이들을 안전하게 이끈다. 금강문과 천왕문은 외부의 잡신들이 경내로 침범치 못하게 하여 사찰을 청정케 하는 수문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금강문. 사천왕문 |
이들은 5백의 야차신(夜叉神:야차[夜叉]: yak a 8부중(部衆)의 하나. 약차(藥叉)·열차(閱叉)라 음역. 위덕(威德)·포악(暴惡)·용건(勇健)·귀인(貴人)·첩질귀(捷疾鬼)·사제귀(祠祭鬼)라 번역. 라찰과 함께 비사문천왕의 권속으로 북방을 수호. 이에 천야차(天夜叉)·지야차(地夜叉)·허공야차(虛空夜叉)의 3종이 있음. 천야차·허공야차는 날아다니지만 지야차는 날지 못함.) 을 거느리면서 현겁천불(賢劫千佛: 현재의 대겁인 현겁의 주겁(住劫)에 이 세계에 출현하는 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미륵불 등의 천불.현겁은 1천 부처님이 출현하여 세상 중생을 구제하는데 이렇게 많은 부처님이 출현하는 시기이므로 현겁이라 이름)의 법을 수호한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법(法)의 집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들인 금강역사와 사천왕들은 험악한 낯면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섬뜩하다가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축생(동물)과 아귀(목마름과 배고픔 등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사는 중생)를 한발아래 두고 있는 천왕들에게서, 호령하는 듯 입을 벌리고 곧 내려칠 듯 올라가 있는 역사상의 주먹 쥔 손에서 웃음이 저절로 번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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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상 |
수덕사의 가람조성은 산지형(山地型)이라 조금씩 올라가야 한다. 천왕문을 진입해서도 계단을 오른다. 대웅전과 마주하여 전면에 지어지는 누각이 있는데, 황하정루가 보인다. 강당누각을 가진 사찰에서 중심 불단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누하출입으로 루(樓) 밑을 통과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우각(隅角)출입으로 루(樓) 옆으로 돌아가서 진입하는 것이다. 수덕사는 누각강당을 설치하여 누하(樓下) 진입형식을 취했다. 가람의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에서는 대체로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문을 설치하는데 수덕사는 불이문은 두지 않았다. 황하정루 누각을 기준으로 속세와 성지를 가름하고 도입부와 전개부로 다시 나누고 있다. 수덕사에서는 여기를 진속의 참 경계선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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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과 탑 |
사찰의 금당인 대웅전은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심권역에 있다. 중심권역으로 나아가는데 각각의 단을 하단, 중단, 상단으로 나누고 상단 가장 높은 곳에 금당을 배치한다. 수덕사도 그렇다. 불법승 삼보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심권역으로 올라서면 하단 동·서측에 법고각과 범종각이 좌우대칭으로 마주하고 있다. 서측 범종각의 뒤편에는 승방 무이당이 동측 법고각의 뒤편에는 조인정사가 있다. 중단에는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좌청룡우백호 형상이라는 요사 청련당과 백련당이 있다. 좌체우용(左體右用)의 개념을 여기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좌는 승(僧)을 우는 법(法)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佛)은 상단 중앙에 있다. 국보49호 수덕사대웅전이다. 대웅전과 같은 상단 동쪽 끝부분에 명부전이 있다. 절의 창건설화가 전해내려오는 관음바위는 대웅전 아래 서측 청련당 옆으로 돌아서 가면 바로 나온다.
학자들은 사찰의 가람배치에 따른 분류를 하면서 탑의 유무와 수에 따라 단탑식 쌍탑식, 무탑식(無塔式)으로 나누기도 하고 가람이 들어선 대지의 형태에 따라 산지형이니, 평지형이니, 구릉형 등의 유형분류를 하기도 한다. 가람배치 분류기준 가운데에서도 사원건축의 시원을 탑파에서 찾고 있는 만큼 탑은 중요하다. 그래서 단탑식의 경우에는 가람의 중심에 놓이는 정중탑(庭中塔)과 가람배치와는 무관하게 장엄용으로 한구석에 놓이는 경우로 다시 구분 짓는다. 수덕사에는 세 개의 탑이 있다. 천왕문을 지나 황하정루 진입하기 전에 만공스님이 조성하였다는 칠층석탑이 있으며, 누하진입을 통해 하늘에 닿을것같이 공천(空天)만 보이는 계단을 오르면 남북통일과 민족화합을 상징하는 금강보탑이 있다. 한단 더 올라가면 가장 중심인 위치에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다. 수덕사가람배치는 정중탑배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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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석탑. 금강보탑. 칠층석탑 |
아주 이른 아침에 수덕사를 참배하는 사람들은 아침산사의 고요함 그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싸리빗자루를 들고 안행(雁行:기러기가 날아가듯 한줄로 걸어가는 모습을 뜻함)하듯 줄지어 마음 맑히듯 절마당 맑혀가며 비질하는 총림 학인스님(강원에서 공부하시는 스님)들의 울력(대중들이 함께 모여 하는 육체적 노동)절안에서 모습도 참관할 수 있다.
탁트인 도량에서의 소나무 바람향기에 푹 젖어들 수 있는 수덕사에는 덕숭산문의 선세계(禪世界)가 활짝 열려있고 처처에 펼쳐져 있다.
산내암자
정혜사(定慧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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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사 전경 |
정혜사(定慧寺)는 근대 선불교의 대표주자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주석, 정진하면서 한국불교의 선(禪) 중흥성지로 숭앙받는 곳이다. 덕숭총림 정혜사 능인선원은 선불교의 주초라는 사격(寺格)에 걸맞게 가람을 정비하고 있는 중이다.
선도량으로 거듭나기 위한 중창불사가 한참 진행중인 정혜사의 곳곳은 불사공구들로 참배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으나 관음전에는 근대조각가 김복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관음보살좌상이 내방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덕숭산 자락에 있는 정혜사는 수덕사와 함께 599년 지명법사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있으나 정확한 연원은 밝혀지지 않고 덕숭각시와 수덕도령대신 정혜낭자로 정혜라는 이름이 창건설화에서 등장한다.
이 곳은 많은 고승 대덕들이 용맹정진하였던 도량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근현대 불교계를 움직이는 선승들을 배출시킨 까닭이다. 1930년 당시 조실이었던 만공선사가 중수하여 가람을 재정비하고 선원으로서의 위상을 높인 것도 큰 몫으로 자리매김했다.
정혜사에 도착해서 정혜사의 현존하는 당우들을 둘러보기 위해 절의 곳곳을 관람한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있다. 스님들의 참선실수는 선방의 갇힌 공간만은 아닐 것이다. 정혜사 앞뜰 남매탑을 뒤로 두고 앞에 서면 드넓은 충남의 평원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곳에 한참서서 탁트인 홍성일대의 풍경을 바라보는 정취도 정취지만 산을 오르면서 가졌던 노곤함과 삶의 고단함이 바람에 풍경에 쓸려가버리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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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사내경 |
정혜사에는 1932년에 창건된 능인선원과 1935년에 중창한 관음전 산신각 그리고 바위틈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샘물이 들어가 있는 집 불유각과 요사 등이 있다. 정혜사 사액과 능인선원의 현판은 능인선원 전각에 걸려있다. 불유각(佛乳閣) 현판글씨는 월면스님의 제자(題字)이다.
능인선원 앞에는 구릉처럼 낮게 솟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작은 석탑2기가 놓여있다. 나란히 서있어 쌍탑 또는 남매탑으로 불리운다. 선원 뒤쪽으로 좁고 비탈진 길을 오르면 관음전이 나오고 관음전을 지나 서측으로 조금 더 오르면 산신각이 보인다.
만공스님의 자취와 정신이 여기저기에 베인 정혜사, 정혜사에는 윤택한 푸르름과 우리 안에 깃들여져 있는 참된 것들이 고귀하게 드러나 있다.
정혜사에서
滿空 月面
德崇山頭定慧幽 덕숭산 머리 위에 그윽한 정혜사를
娑婆歲月萬年秋 사바의 세월 몇 만년이나 지났더냐
禪林情慣前身到 선방의 정과 습관 옛부터 지금까지
栢樹心空曠劫悠 잦나무 공한 마음 광겁으로 한가한데
富貴門前流水去 부귀하던 문전에는 냇물만 흘러가고
帝王都上白雲浮 임금들 살던 도성 흰구름만 떠 있구나
諸君莊蝶眞如事 옛 성현들 밟던 진여사를
我亦從今曳尾遊 나도 또한 그를 따라 꼬리에 끌려 가리
정혜사 관음전 (定慧寺 觀音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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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 |
정면3칸 측면2칸의 익공계 다포집이다.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정혜사의 관음전은 1935년에 중창되었다. 화강암의 기단위에 놓여진 주초는 정리된 원형이고 그 위로원통형기둥을 올려놓았다. 정면 창호는 어간이 사분합문이고 전면의 양측간 창호는 삼분합문이다. 법당 안으로의 출입은 전각측면의 외짝문을 이용할 수 있다. 건물 기단부 위의 각 창호앞에는 장방형의 디딤돌이 놓여져 있다.
관음전의 내부에는 1950년대 이후 작으로 추정되는 관세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좌상의 높이는 77cm인데 보살의 머리와 입술 등이 채색되어 있다. 재질을 살펴보았을 때 석재라고 하기에는 무게가 가볍고 석고라고 하기에는 무게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면 석고상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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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상,지장보살상 |
원형의 팔각 연화대좌위에 봉안된 관음보살상 보관에는 연화좌에 앉은 화불이 조형되어 있다. 통견의 천의를 입었고 군의는 가슴윗부분에서 띠를 둘렀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보살의 상호는 원만하다. 눈썹은 가늘고 길게 그어져 있으며 입술은 두툼하지만 크지는 않다. 연꽃문양의 보관과 목걸이 문양은 연계성을 보이고 있으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보살상의 영락장식과는 차별된다. 왼쪽무릎위에 살짝 보이는 발바닥과 발가락의 표현도 간결하면서도 단아하다. 지물로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데 활짝 피어있는 연꽃 한가운데에서 정병이 솟아나는 모양으로 표현해놓았다. 금방이라도 정병 안에서 감로수가 쏟아져나올듯하다.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한 인상을 받지만 세련된 느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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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탱화, 후불탱화 |
관음전 내부에는 주존으로 관음보살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 지장보살좌상도 봉안해두었는데, 근래작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화대좌위에 봉안된 지장보살상은 민머리를 하고 있으며 통견의 의습을 보이고 오른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법륜을 지물로 지니고 있다.
1916년에 제작된 신중탱과 1925년에 제작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신중탱의 화기에 의하면 증명비구(證明比丘)는 만공월면이고 금어비구(金魚比丘)는 호은 정연(湖隱 定淵)이다. 1906년(광무光武 10) 제작된 칠성탱은 원래 금선대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화기에 의하면 칠성탱의 금어비구는 금호약효(錦湖 若效), 증명비구는 선맹(禪孟)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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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후불탱 |
정혜사 능인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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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인선원 내.외부 |
능인선원은 1932년에 지어졌으며 주심포계로 정면7칸 측면4칸의 팔작지붕이다. 능인선원 앞에는 정혜사 사액과 쌍수루 그리고 능인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혜사 사액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고 쌍수루(雙修樓) 편액은 만공스님의 세수 69세인 1940년에 쓰여진 글씨라고 한다. 능인선원 현판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의 글씨이다.
선원내부는 인법당 형식으로 불단을 두고 우견편단 항마촉지인을 한 결가부좌의 석가모니불좌상과 통견의 중생중품인을 결한 아미타불좌상을 봉안했다. 금어로 호은 정연(湖隱 定淵)과 동성 정연(東星 定淵)에 의해 1925년에 제작된 후불탱화와 1916년에 제작된 신중탱화가 있다. 또 선원 안에는 경허스님이 쓴 진여문(眞如門)이 초서로 적혀져 있으며 염화실이라는 편액도 걸려있다.
정혜사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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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
일반적으로 산신각은 토속민간신앙이 불교와 습합해 사찰에 전각이 조성된 예다. 사찰의 영지신앙(靈地信仰)과 함께 가람을 수호한다. 사모지붕의 정혜사 산신각은 정면1칸 측면1칸으로 작은 법당이다. 창호는 이분합문이고 판벽에는 화조도를 그리고 채색했다.
귀주는 각기둥으로 세웠다. 산신각 내부 불단 좌측에는 1973년에 용해스님이 제작한 산신탱이 있고 우측에는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독성상을 목조감에 봉안했다.
신앙의 대상인 산신탱화에는 항상 호랑이와 산신이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인격체로서 산신을 화신으로 여기고 호랑이를 숭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금선대(金仙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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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대 |
1905년 만공스님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금선대는 만공 월면스님이 스승인 경허선사로부터 만공(滿空)이란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받은 뒤 이곳에 주석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정면과 측면의 너비가 같은 건물로 정면3칸 측면3칸이다. 편액은 진영각(眞影閣)으로 걸려있으며 건물 앞에는 수령이 몇백년은 된듯한 회양목 한 그루와 암석이 있다. 진영각 측면 담장 아래로 만공스님이 참선하였다는 좌선대가 있다. 정혜사 바로 아래에 있는 진영각은 경허 만공 혜월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있다. 수덕사는 만공 월면스님의 다례식을 매년 이곳에서 모신다.
만공스님이 받은 전법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 달 골짜기 산 곳곳이 같으니
산중 선자의 대가풍일세
은밀히 무문인(無門人)을 부촉(咐囑)하노니
한 가닥 권세 기틀이 안중에 살아 있네
환희대(歡喜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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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보전. 보광당. 원통보전창호화문 |
역시 환희대도 비구니 수행도량이다. 견성암에서 수행정진하던 일엽스님이 말년에는 이곳 환희대에서 주석하였다고 한다. 환희대는 1926년에 창건되었다. 월송스님이 1984년부터 2년여에 걸쳐 환희대의 주전각인 원통보전과 스님들의 요사채 보광당 난야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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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보전 내부 닫집 |
환희대의 원통보전은 정면5칸 측면3칸의 다포집이다. 지붕은 화려한 공포에 걸맞게 팔작지붕을 얹었다. 3단의 돌로 축대를 쌓고 기초를 다지고 탑의 기단처럼 면석과 탱주가 조성된 기단을 조성했다. 원형의 주초로 복련잎 주좌위에 원통형기둥을 올렸다. 어간에는 원담스님의 글씨로 쓰여진 원통보전 현판이 걸려있다. 환희대 신앙의 중심은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 두루하는 원융통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에 주법당의 명칭이 원통보전인 것이다.
환희대의 원통보전은 전각 내부벽면 세 곳이 모두 탱화로 둘러싸여있다. 내부장엄이 너무 화려해서 천상의 세계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일정도이다. 보궁형 닫집도 법당의 장엄을 더욱 정교하고 찬란하게 빛내고 있는데 닫집의 처마에 원통궁 자비궁 보광궁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환희대는 각 건물의 기둥마다 주련이 있어 하나의 특색을 이루고 법당 앞에는 키큰 느티나무가 있어서 나무아래 사념없어 한적함, 정(淨)함이 느껴진다.
선수암(善修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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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암 전경 |
가을 코스모스가 한창인 선수암은 1877년(고종14) 비구니 귀만스님이 창건한 암자다. 1948년 법선, 선덕, 성안스님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뒤를 이은 영복스님의 원력으로 1971년에는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게 된다. 1987년에는 요사 서별당을 신축하였다. 1997년 영복스님의 상좌 세창스님이 주전각인 대광전과 요사 동별당을 신축하여 가람의 면모를 일신시켜 위용을 드높였다.
견성암(見性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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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암 후불탱화 |
수덕사 서편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견성암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원래는 정혜사 동쪽에 초가로 지어져 있었으나 만공스님의 뜻에 따라 1930년 도흡스님이 창건한 이래 개축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1965년 벽초스님에 의해 법당을 인도식 2층 석조 건물로 조성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서선당 동선당 요사 등의 전각을 건립하여 오늘날에 이르는 가람을 자랑하고 있다.
비구니 수행정진 제일선원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 선방에서는 일백여명이 넘는 비구니스님들이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정진하고 있다. 2층 법당으로 들어가는 복도에는 만공스님의 친필인 칠근루(七斤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칠근루는 우리가 먹는 쌀 한 톨에는 일곱 근의 농부땀이 베여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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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암 내부 |
2층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간소하고 소박함이 물씬 베여나와 그야말로 청정도량임을 다시한번 각인시켜준다. 개화기의 여류시인 김일엽 스님이 수도정진한 곳으로도 유명세를 가하고 있다.
불단에는 본존으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했고 협시로 관음보살좌상과 입상을 조성했다. 관음보살좌상은 정혜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상과 조각형태에서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으나 조각가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후불탱화는 수덕사 산내암자 곳곳에서 보이는 금어 정연스님 작으로 보이며, 또 법당안에는 산신탱과 현왕탱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견성암의 사액은 2층의 인도식 전각 앞에 걸려있는데, 암자의 한자가 암자암(庵)자가 아닌 맑은 풀을 상징하는 풀암자암(菴)를 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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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석가모니불.백의관세음 |
향운각(香雲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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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운각.주변약수터 |
정혜사 오르기 전 우측으로 향운각이 있다. 향운각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공스님이 조성하신 관음보살입상을 먼저 친견해야 한다. 그 후에 대나무로 둘러싸인 약수터를 지나자마자 다듬어지지 않은 돌담이 보이는 향운각으로 진입할 수 있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으로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집이다. 묵언수행하시는 스님이 정진중인지라 조용조용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큰절 수덕사에서도 덕숭산 정상으로 시선을 돌리면 11시방향으로 산중턱 쯤 자리한 향운각이 보인다. 숲속 한가운데 위치한 암자다.
소림초당(小林草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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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초당 |
소림초당은 만공스님이 1920년대 중반 덕숭산 산중턱에 지은 암자다. 굽은 목재의 자연미 그대로 집을 지어 볏짚이엉을 얹었다. 그야말로 아담한 초당이다. 소림초당은 정면3칸 측면2칸 집이다. 하방과 중방 상인방등 자연목재를 사용했기에 초당의 창호는 그야말로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당의 창호에는 봉창이 있으나 개방되지 않는 곳이라 일반인들은 볼 수가 없다. 그래도 갱진교(更進橋)는 건너가 볼 수 있다.
2.사찰의 역사
창건 배경및 역사
수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서 현재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서 사찰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대(554-598)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백제의 대표적인 승려인 혜현이 머물렀던 절이기도 하다. 백제 멸망기에는 북부수덕사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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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옛모습 |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가 1937년 대웅전 수리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여 수덕사 대웅전이 고려 후기 1308년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한국의 목조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현재 국보 제49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곳에 단편적인 기록이 보이지만 수덕사가 지금의 사격을 유지하는데는 근대 선승의 대표자인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우리나라 5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총림: 스님들의 참선수행 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 율원(律院) 등 3대 조건을 갖춘 사찰을 뜻함)으로 그 위격이 한층 높아졌으며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가는 스님을 다수 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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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연꽃무늬 와당 |
백제 침류왕 즉위원년 384년 불교가 들어온 이래 크고 작은 절들이 나라 곳곳에 세워졌다. 중국 기록에도 ‘스님들과 절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현재 백제 사찰로 확실히 남아있는 대표적인 곳은 웅진(공주)의 대통사지, 부여의 정림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그리고 예산의 수덕사 등이다. 수덕사를 제외한 세 절들이 모두 사지로 남아있는데 반해 수덕사는 조계종의 제7교구 본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절 기록에 의하면 수덕사는 백제 법왕 즉위원년(599) 지명(智命)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지명(智命)은 여기 기록 외에는 보이지 않지만 익산 미륵사 창건을 도운 지명(知命)이란 이름으로 「삼국유사」에 보이며 중국 진(陳)나라에 유학하고 온 신라승려 지명(智明)이란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나오고 있다.
이들 3명의 지명은 독음은 같지만 한자를 달리 쓰는 모두 다른 인물이다. 수덕사의 지명법사는 아마도 백제의 지명(知命)이나 신라의 지명(智明)에서 차용한 인물일 듯하며 백제의 지명(知命)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따라서 수덕사의 창건 연대는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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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수덕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다. 이 책의 피은편 혜현구정조에는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한 승려로 혜현이 언급되어있다. 혜현은 수덕사를 거쳐 강남의 달나산(월출산)에도 법화경을 강한 법화행자였다. 그가 죽은 후에도 법화경을 강한 혀만은 마치 살아있는 듯 붉었다고 한다.
그런데 혜현이 입멸한 때의 나이를 58세라 하고 그 때를 당나라 정관연간(627-649)의 초년이라 했으니 그가 태어난 해는 569년쯤 즉 위덕왕대(554-598)에서 멀지 않은 해가 된다. 따라서 혜현이 주로 활동한 연대는 위덕왕, 법왕, 혜왕, 무왕의 4대에 걸친 기간이며 이 기간 어간에 북부 수덕사가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혜현이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했다 했으므로 이미 수덕사는 창건되어 있어야 하므로 수덕사의 창건 시기는 위덕왕대나 위덕왕의 아버지인 성왕대가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위덕왕대가 가장 타당성 있는 추측이라 생각된다. 수덕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증거는 위 문헌기록 뿐만 아니라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와당의 존재로도 유추할 수 있다.
수덕사는 백제 멸망기에는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로도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도침과 복신의 부흥운동에 서북부 지역이 이에 호응했다고 하는데 북부 수덕사도 여기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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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삼층탑 |
한편 수덕사에 원효가 주석하고 중창하였다는 말이나, 숭제법사가 법화경을 강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원효의 경우는 수덕사 뿐만 아니라 사찰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보통 결부시키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엄연히 혜현이란 수덕사의 고승이 있는데 원효를 갖다 붙일 필요가 있을까. 숭제법사의 경우도 통일신라시대 백제인으로도 알려지기도 했던 진표율사가 있었던 그의 스승인 숭제법사(또는 순제법사)와 결부시킨 것 같다.
수덕사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렇다할 기록이 없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에서 통일신라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고려 후기에 가서야 수덕사에 관한 글을 접할 수 있다. 1937년 대웅전 수리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 건축시 묵으로 해당 정보등을 기록해 놓은글)에 의해 지금의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충렬왕 34)에 지어졌음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덕숭산에 수덕사가 있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
수덕사가 옛날의 명성을 되찾게 된 것은 근대 한국선종의 새로운 선풍을 진작시킨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영향이 지대하다. 경허스님은 조선시대 말 침체에 빠진 불교계를 되살리기 위하여 여러 제자들을 길러내는데 전심전력하였으며 만공스님이 그 대표적인 제자이다. 만공스님은 침울한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맞서고 선학원을 건립하는 등 한국불교의 선맥을 지키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연대 |
내용 |
384년 |
백제불교수용 |
6세기 |
위덕왕대(554-598) 창건. |
6-7세기 |
혜현이 법화경을 강함. |
6-7세기 |
담징이 벽화를 그리다(전거미상, 동방미디어)/(1) 지명(智命); 전거미상. |
647년 |
숭제법사 법화경을 강함. |
660년 |
도침의 백제부흥운동에 참여. |
1308년 |
대웅전 축조. 고려말 공민왕 때 나옹이 중수. |
1528년 |
대웅전 색채보수 |
1530년 |
수덕사는 덕숭산에 있음. 절에는 취적루와 불운루가 있음. 「신증동국여지승람」 |
1528년 |
대웅전 색채 보수. 대웅전개채기 |
1592년 |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사찰이 피해를 입었으나 대웅전은 옛 모습을 유지. |
1673년 |
수덕사 괘불. |
1700연대 |
수덕사 동종. |
1751년 |
대웅전 보수. |
1770년 |
대웅전 보수. |
1803년 |
대웅전 후면 부연 보수와 풍판의 개수. |
1898년 |
만공스님의 중창불사 |
1911년 |
사찰령 반포. 30본산제. 마곡사의 말사. |
1912년 |
경허성우 입멸(1849-1912) |
1924년 |
미륵보살입상. 만공이 조성 |
1925년 |
만공스님이 소림초당건립 |
1937년 |
대웅전 수리시 묵서명 발견. 명찰순례 |
1937년 3월 11일 |
전국 31본산 주지가 모여 조선불교진행책을 논의. 만공의 총독 힐난. |
1941년 3월 10일 |
만공스님 서울 선학원 건립 |
1946년 |
만공월면 입멸(1871-1946) |
1947년 |
만공탑 건립. 제자 박중은이 설계. |
1962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42개의 말사를 관할. 초대스님에 벽초스님. |
1976년 |
일엽 입멸(1896-1976) |
1984년 |
총림으로 승격. 덕숭총림. 초대 방장에 혜암스님. |
1985년 |
혜암현문 입멸(1884-1985) |
1986년 |
벽초경선 입멸(1899-1986) |
1986년 |
일본 아스카사(飛鳥寺)와 자매결연. |
1996년 |
수덕사와 일본 비조사 결연 10주년 기념으로 정림사5층석탑 실모형을 아스카사에 기증. 아스카사는 수덕사 성보전시관의 건축을 지원. 1996년 11월30일 덕숭총림 수덕사 승가대학 현판식을 원담스님 숭산스님(화계사 조실) 설정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인정사에서 거행. |
1998년 |
탑림공원 조성사업 |
2000년 4월 |
근역성보관 개관. 개관식에는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스님, 중앙종회의장 법등스님, 일본 아스카사(飛鳥寺) 야마모토(山本寶純) 주지, 심대평 충남도지사, 문화재청 김주태 전문위원 등 사부대중 6백여명이 참석. |
관련인물
혜현(惠現)
백제의 승려. 생몰년 미상. 당나라 정관연간(627-649) 초에 58세로 죽었다 했으므로 혜현이 태어난 때는 위덕왕(554-598)대이며 무왕(600-641)대 주로 활약했다. 법화경 독송을 주로 하였고,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벗어나 예산이나 영암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죽어서도 신이한 행적을 남겼으며, 중국에 유학가지 않았으면서도 중국 [고승전]에 실리었다.
혜현이 태어난 위덕왕대의 백제는 성왕의 전사에 따른 혼란을 극복하고 사회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위덕왕은 부여 능산리에 능사(陵寺)를 건립하여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면서 불교를 통하여 국민적 일체감을 형성해 나갔다. 최근 능산리에서 ‘위덕왕 13년 위덕왕의 누이인 형공주(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사리감이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혜현은 15세를 전후한 위덕왕 후반기에 출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웅진에서는 법화행자인 현광이 활약하고 있었으며 백제 불교가 수도를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 혜현이 접했던 불교는 발정·현광의 법화불교와 겸익의 율종(율장(律藏:승단(Sangha)을 위한 계율 규정)을 근본 종지(宗旨)로 하고 있는 종파)과 아비달마불교(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란 ‘법의 연구’라는 의미)였다. 혜현은 법화불교의 맥을 이어 법화경 독송을 주업(主業)으로 삼았지만, 새롭게 대승불교의 2대 조류 가운데 하나인 공사상(空思想)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을 아우른 삼론(三論)을 전공하여 오묘한 맛을 알기도 하였다.
사비에서 공부를 마친 혜현은 선배인 현광의 예에 따라 지방으로 불교를 보급시키고자 하였다. 혜현은 30대 이후 무왕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는데, 당시의 백제는 신라와의 소강상태를 벗어나서 신라에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왕은 각 지방에 고승을 파견함으로써, 그 지방의 민심을 아우르고 정신무장을 강화시켜 나갔다.
혜현이 맨 처음 불교의 홍포지로 삼은 곳은 예산의 수덕사(修德寺)다. 수덕사가 위치한 예산은 서해안에서 사비로 들어오는 길목일 뿐 아니라, 고구려의 침입을 북쪽에서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혜현은 수덕사에 머무르면서 대중들에게 법화경을 강하고, 혼자 있을 때는 독송에 힘썼다.
당시 수덕사에서는 여러 가지 법회가 열렸지만 호국법회인 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도 열린 것으로 추측된다. 공덕천(길상천녀(吉祥天女) 또는 공덕천(功德天)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도 신화에서는 라크슈미라고도 하여 비슈누신(神)의 아내이고, 애욕(愛慾)신 카마의 어머니이며, 행복을 주관하는 여신)은 사천왕중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의 권속으로 불국토를 지키는 신장이며, 용을 부려 가뭄이나 홍수를 조절하기도 하였다. 혜현은 법화경의 강경(講經:경을 강의함)과 독송 그리고 공덕천도량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대승의 교리와 나라의 안위를 주지시켜 나갔다. 그래서 각지의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몰려들어 절 안이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귀족들이 얼마만큼 법화경에 관심을 가졌는가는 대좌평 사택지적의 지적이란 이름이 법화경의 지적보살에서 따온 데서 충분히 짐작된다.
혜현은 예산 수덕사에서의 불법전파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자 다른 지방으로의 확산을 모색하게 되었다. 무왕대 전반 백제 불교는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써 전라북도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었지만 혜현은 더 나아가 전라남도 영암의 달나산(=월출산)을 구도(求道)의 목적지로 정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혜현이 수덕사를 떠난 이유가 사람들이 번잡하게 몰려들어 수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산이 높고 바위가 험하여 접근하기 힘든 영암의 월출산으로 갔다고 한다. 또한 정치적으로 혜현이 중앙의 불교세력에 밀려 지방으로 좌천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혜현의 명성을 알고 있는 대중들은 혜현이 자기 고장에서 수도하고 있는 것만으로 불교에 친근감을 느끼고 불교의 성군인 전륜성왕이 다스리고 있는 백제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영암의 달나산에 오르면 북쪽으로 나주 고분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지역은 마한의 최후 정착지로 알려질 만큼 토착세력의 기반이 강하였다. 이들의 묘제는 대형옹관묘로 백제의 대표적인 묘제인 횡혈식석실분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백제 입장에서 볼 때 이질적인 문화요소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영암의 달나산으로 수도처로 옮긴 것은 의미가 깊다. 불법을 통해서 이질적인 문화요소를 융합시키고, 결국 백제는 부처가 보살피는 한 나라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혜현은 620년대 후반 이곳 달나산에서 58세로 여생을 마치고 입적(入寂:열반,즉 죽음)하였다. 법화경 독송에 힘쓴 혜현은 죽어서도 신이한 행적을 남겼다. 제자들과 대중들이 죽은 그의 시체를 다비(茶毘)하기 위하여 임시로 동굴 가운데 놓아두었다. 그런데 동굴을 지나치던 호랑이가 그 시체를 먹어버렸다. 사람들은 무서워 접근하지 못하고 떨고 있었고, 호랑이가 가고 나서 확인해 보았다. 온 몸이 호랑이에게 먹혔지만 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혀처럼 말랑말랑하고 붉었다. 나중에는 그대로 변하여 단단한 돌처럼 변했다. 승려들과 대중들이 이를 공경하여 석탑에 안치하고 항상 혜현의 덕을 기렸다.
원효와 의상이 중국에 불법을 구하러, 도중에 원효가 해골의 물을 먹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의 길을 포기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고도 일가를 이루었다. 혜현 이전의 고승들은 모두 중국이나 인도에 유학을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 하지만 혜현은 유학의 길을 떠나지 않고도 삼론학이나 법화독송에 뛰어났다. 유학승려 보다 더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백제에 있으면서도 멀리 중국에 까지 혜현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중국 「고승전」에까지 실리게 된 것이다.
경허 성우(鏡虛 性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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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선사 |
경허 성우(鏡虛 性牛, 1849~1912)는 한말에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로 경허는 법호, 법명은 성우, 속명은 동욱이다. 1849년 전주에서 아버지 송두옥씨와 어머니 박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아홉살 때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계허스님의 지도를 받았으며, 14세 때 동학사의 만화 관준(萬化 寬俊) 강백으로부터 불교경론을 배웠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동학사 강사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문자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영운(靈雲)선사의 “나귀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라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 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말인가?”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서산 천장암으로 거처를 옮긴 후 56세에 만공(滿空)에게 전법게를 전한 후 1912년 함경도에서 입적하니 세수 64세, 법랍 56세였다.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선수행의 풍토를 조성하여 선풍을 진작시켰으니 그의 문하에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 한암(漢巖)등 뛰어난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유교집으로 1942년 중앙선학원에서 「경허집」을 간행하였다.
만공 월면(滿空月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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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선사 |
만공 월면(滿空月面, 1871~1946)은 근대 한국선의 자리매김을 한 대선사로 법명은 월면, 법호는 만공이다. 경허성우의 제자이다. 1871년 전북 태인군에서 출생하였고, 13세 때 김제 금산사에서 들어가 14세 때 계룡산 동학사 진암노사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그해 동학사의 경허스님의 인도에 따라 천장사에서 경허의 속가 형님이었던 태허스님을 은사, 경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천장암에서 서너 살 아랫사람에게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혀 봉곡사로 자리를 옮겨 이를 화두로 정진하였다. 어느 날 서쪽 벽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일체의 현상이 사라지더니 허공 중에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순간 2년이 넘도록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온갖 의심의 덩어리가 사라졌다.
다시 통도사에서 무자 화두를 참구하던 만공은 어느 날 새벽 통도사에서 예불 시간을 알리는 범종 소리를 듣고 순간 홀연 아무것도 막힘없고 걸림 없는 큰 깨달음의 희열을 맛보았다.
천장암으로 돌아온 만공은 경허로부터 “구름 달 골짜기 산 곳곳이 같으니, 산중 선자의 대가풍일세, 은밀히 무문인을 부촉하노니, 한 가닥 군세 기틀이 안중에 살아있네”라는 전법게(법을 전하는 게송)를 받았다.
만공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년간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수행하는 스님)들을 지도하는 한편, 수덕사?정혜사?견성암 등을 중창하고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을 설립하고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총독 미나미(南次朗)에 일본의 한국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다음은 당시의 그에 관한 일화이다.
미나미 “조선의 불교란 것이 과거에는 아무리 고유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와서는 부패한 종교가 되었으므로 본관(미나미 지로, 南次朗)의 전임인 데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懿) 총독이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를 통합하려고 했던 정책은 백번 지당한 것이있다. 이제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는 더 이상 둘이 아니므로 마땅히 하나로 합쳐야 할 것이다”
만공 “청정본연 하거늘 어찌 문득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지난번 데라우찌 총독은 우리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숱하게 많은 승려에게 일본불교를 본받아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만들어 부처님의 계율을 파계토록 하여 불교계에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땅히 지금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우리 조선불교는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방편이 법에 어긋남이 없건만 일본불교와 합쳐 잘될 이유가 없으므로 총독부에서는 종교에 간섭하지 말라. 오는 말하는 불교진흥책이란 것도 총독부가 간섭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책이니라”
스님은 격식과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 일화가 있다.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와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란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스님의 이런 기이한 무애행(無碍行: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호방하게 하는 행동)은 범상한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겠으나 제대로 갖춘 눈으로 보면 세상을 깨우치는 풍우요 암시였던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전월사(轉月寺)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1946년 입적하니 세수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을 세우고 진영을 경허?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하였다. 저서로 문도들이 편찬한 「만공어록」이 있다.
창건 설화
수덕도령과 덕숭아씨의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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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아씨와 수덕이야기의 삽화 |
수덕사는 충남 서해안에선 으뜸으로 꼽는 절인데 여기에도 전설이 하나 있다. 홍주 목사 고을에 수덕이란 도령이 하나 있었다. 그는 양반집 아들로 의젓하게 살고 있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그는 사냥을 좋아해서 어느 해 가을엔 몸종들을 데리고 사냥을 갔었다. 몸종들과 산을 둘러싸고 몸종들이 짐승을 몰아 짐승들이 나타나면 수덕이가 화살을 날리어 잡는 그런 사냥이었다.
몸종들이 나뭇가지를 탁탁 털면서 “우------”하고 몰아오더니 “노루야 노루야”하고 소리쳤다. 수덕은 화살엔 자신이 있었으므로 언덕 아래에 숨어서 활을 조이며 쳐다보고 있는데 정말 송아지만한 노루가 자기 앞으로 껑충껑충 뛰어오고 있었다.
수덕은 바삐 활시위를 잡아당겼다가 딱 멈췄다. 수덕이 어쩐 일인지 화살을 날리지 않고 멈추자 “도련님 노루예요. 어서 화살을 날리세요” 몸종들이 화살을 날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우성이 커질수록 활시위에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끝내 노루를 놓치고만 몸종들은 섭섭해 했지만 그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노루가 뛰어올 때부터 화살이 잡은 노루의 방향에 어여쁜 낭자가 똑같이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노루가 사라지자 뛰어가던 낭자가 자기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선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책을 펼쳐도 글씨는 보이지 않고 낭자의 얼굴만 떠올랐다. 그는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자기를 아끼는 할아범 몸종에게 낭자를 찾아보라 했다. 할아범은 여러 마을에 수소문한 결과 바로 건너 마을에 사는 덕숭이란 낭자라 했다. 덕숭낭자는 혼자 살고 있는 낭자로써 그 아름다움이나 마음씨가 고와서 온 마을에서도 뛰어난 낭자란 평이었다. 할아범으로부터 이런 이야기까지 들은 수덕은 더욱 고민하다가 밤에 덕숭낭자의 집을 찾아갔고 낭자 앞에서 자기는 꼭 낭자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우격다짐을 했다. 그랬더니 낭자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머리를 떨군다.
허나 수덕도령은 꼭 결혼하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새벽닭이 울때까지 덕숭낭자를 졸라댔다. 낭자는 닭 울음소리 따라 머리를 들듯 얼굴을 세우고 수덕을 바라본다. “저와 결혼을 꼭 하시고 싶으시면 먼저 소녀의 청을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우리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세워 주세요.” 덕숭낭자가 절을 세워달라고 원하자 수덕도령은 쾌히 승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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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꽃 |
그날부터 절간을 짓기 시작했다. 많은 인부들이 작업을 해서 그런지 절간은 바삐 지어졌다. 수덕도령은 낭자 집으로 낭자를 찾아가서 절이 지어졌노라고 전했다. 그랬더니 낭자는 하는 말이 “어째서 절을 지으면서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자의 몸을 탐내십니까. 그런 절은 바로 없어집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밖에서 “우루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 지은 절간이 부서졌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다.
허나 수덕도령은 다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불이 나 타버렸다. 수덕도령이 날마다 목욕을 하고 몸가짐은 정돈이 되었으나 마음에 부처님보다 덕숭낭자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 했다. 그는 잿더미 위에 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엔 참으로 절이 잘 지어졌다. 절이 완성되자 덕숭낭자는 결혼을 승낙했다. 그래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자기 몸에 손을 못 대게 했다. 허나, 어느 날 수덕도령은 참을 수가 없어서 와락 덕숭낭자를 껴안았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문짝이 달가닥하고 떨어지며 이불이 공중에 뜨더니 자기를 밀어 제치고 이불이 둥둥 떠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낭자는 온데 간데 없고 버선 한 쪽만 쥐어져 있었다. 이번엔 천둥의 소리가 났다. 그러자 그들이 살던 집은 불더미가 되고 수덕도령이 앉아있던 자리에 바위가 생겼다. 그리고 그 바위에 버선모양의 꽃이 피었다. 낭자는 관음보살이 화현하여 속세에 와서 살았다 해서 ‘덕숭산’이라 했고 절간은 수덕도령이 지었다 해서 ‘수덕사’라 불리우게 됐다.
그리고 바위에 피는 꽃은 버선모양이라 해서 ‘버선꽃’이라 불리우게 됐다고 한다.
수덕각시와 관음바위의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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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바위와 관세음보살상 |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상궁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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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바위 |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근대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加被)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수덕사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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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국여지승람 |
① 「속고승전」, 「삼국유사」, 「삼국사기」, 「법화전기」, 「홍찬법화전」
백제 때의 창건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로 북부수덕사(北部修德寺)로 나온다.
수덕사는 혜현에 관한 전기 자료에 처음 나온다. 혜현에 관한 전기 자료로 가장 오래된 것은 당나라 도선의 「속고승전」(혹은 「당고승전」)이다. 이 기록이 당나라 승상의 「법화전기」에, 당나라 혜상의 「홍찬법화전」에, 고려 일연의 「삼국유사」 혜현조에 이를 거의 그대로 실려있다. 차이는 표기상의 차이인데, 「속고승전」의 伯濟를 「법화전기」에서는 百濟로, 「속고승전」의 伯濟, 慧顯, 南方達拏山을 「삼국유사」에서는 百濟, 惠現, 江南達拏山으로 표기하였다. 「홍찬법화전」은 「속고승전」의 표기를 따르고 있다.한편 「삼국사기」에서는 백제부흥운동의 주동자인 도침의 관계기록에 북부가 나오는데 이 북부가 북부수덕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속고승전」伯濟國達拏山寺釋慧顯傳六(대정장 -687)
釋慧顯 伯濟國人也 少出家 苦心精專 以誦法華爲業 祈福請願 所遂者多 聞講三論 便從聽受法一染神彌增其緖 初住本國北部修德寺 有衆則講 無便淸誦 四遠聞風造山?接 便往南方達拏山 山極深險 重?巖固 縱有往展登陟艱危顯靜坐其中 專業如故 遂終于彼 同學輿屍置石窟中 虎?身骨 ?盡惟餘?舌存焉 經于三周 其舌彌紅赤柔軟勝常過後方變紫[革*更]如石道俗怪而敬焉俱緘閉于石塔 時年五十有八 卽貞觀之初年也
「삼국유사」 惠現求靜
釋惠現 百濟人 少出家苦心專志 誦蓮經爲業 祈禳請福 靈應良稠 兼攻三論 染指通神 初住北部修德寺 有衆則講 無則持誦 四遠欽風 戶外之履滿矣 稍厭煩擁 遂往江南達拏山居焉 山極?險 來往艱稀 現靜坐求忘 終于山中 同學轝尸置石室中 虎啖盡遺骸 唯?舌存焉 三周寒暑 舌猶紅軟 過後方變 紫硬如石 道俗敬之 藏于石塔 俗齡五十八 卽貞觀之初 現不西學 靜退以終 而乃名流諸夏 立傳在唐聲著矣夫 又高麗釋波若 入中國天台山 受智者敎觀 以神異聞山中而滅唐僧傳亦有章 頗多靈範 讚曰 ?尾傳經倦一場 去年淸誦倚雲藏 風前靑史名流遠 火後紅蓮舌帶芳
「삼국사기」
武王從子福信嘗將兵, 乃與浮屠道琛據周留城叛, 迎古王子扶餘?,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 西北部皆應, 引兵圍仁願於都城.
「법화전기」 百濟國達拏山寺釋慧顯二十一(대정장 , 64~65)
釋慧顯 百濟國人也 少出家 苦心精專 以誦法華爲業 祈福請願 所遂者多 聞講三論 便從聽受法一染神彌增其緖 初住本國北部修德寺 有衆則講 無便淸誦 四遠聞風造山?接 便往南方達拏山 山極深險 重?巖固 縱有往展登陟艱危顯靜坐其中 專業如故 遂終于彼 同學輿屍置石窟中 虎?身骨?盡惟餘?舌存焉 經于三周 其舌彌紅赤柔軟勝常過後方變紫鞭如石道俗怪而敬焉 俱緘閉于石塔 時年五十有八 卽貞觀之初年也
「홍찬법화전」 唐伯濟國釋慧顯(대정장 51-36)
釋慧顯 伯濟國人也 少出家 苦心精專 以誦法華爲業 祈福請願 所遂者多 聞講三論 便從聽受法一染神 彌增其緖 初住本國北部修德寺 有衆卽講 無便淸誦 四遠聞風 造山?接 便往南方達拏山 山極深? 重巖崇固 縱有往展 登陟艱危 顯靜坐其中 專業如故 遂終于彼 同學與 屍置石窟中 虎?身骨?盡 唯餘?舌存焉 經于三周 其舌彌紅赤 柔軟勝常 過後方變紫鞭如石 道俗怪而敬焉 緘于石塔 時年五十有八 卽貞觀之初年也
② 대웅전 묵서명(단청개칠기)
묵서명은 수덕사 대웅전의 창건연대를 알려주는 자료로 1937년 수리할 때 화반 하단과 첨차 하단에서 발견되었다. 지대원년은 1308년이다.
大棟梁曉假和尙 同願天白 大指偸中 ? 至大元年戊申四月十七日立柱(첨차 하단의 묵서명문)*
至大元年戊申四月卄四日修德寺改造成衆目抄記大棟梁朴仁璉 同願天白 同願英淑(화반 하단의 묵서명문)*
③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편찬. 조선시대 최초의 기록
修德寺 在德崇山 寺有翠積拂雲二樓
④ 「조선사찰사전」
백제의 북부 수덕사와 현재의 수덕사가 다를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각각 항목을 뽑았다.
⑤ 운허 「불교사전」 수덕사조
수덕사 연혁에 오해를 불러 일으킴. 지명?숭제?담징 등의 승려나, 수덕사나 대웅전의 창건연대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미상이다.
⑥ 수덕사 대웅전 앞의 안내판 중 일부
백제 법왕 원년(599) 지명(智命)법사에 의하여 창건되고, 대웅전은 그 이듬해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연혁은 알 수 없다.
성보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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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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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광정보
선(禪)의 중흥도량 수덕사 (修德寺)
덕숭산(德崇山)과 수덕사(修德寺)라는 산이름과 절이름에서 절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는데 덕숭산은 덕(德)을 숭상하는 산이라 하고, 수덕사는 덕(德)을 닦는 절이라 풀이할 수가 있다. 덕산(德山)이라는 지역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아주 이른 아침에 수덕사를 참배하는 사람들은 아침산사의 고요함 그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싸리빗자루를 들고 안행(雁行:기러기가 날아가듯 한줄로 걸어가는 모습을 뜻함)하듯 줄지어 마음 맑히듯 절마당 맑혀가며 비질하는 총림 학인스님(강원에서 공부하시는 스님)들의 울력(대중들이 함께 모여 하는 육체적 노동)을 절안에서 참관할 수 있다.
수덕사에 들르면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대웅전 측면을 보면 가구(건물의 짜임새)가 그대로 드러나보이는데, 특히나 단청이 다 퇴색하고 자연스러운 나무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다른 곳에 비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직선재와 곡선재의 적절한 배치, 장식적인 포대공과 절묘한 곡선을 이루는 우미량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나라의 목조가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고암 이응로(李應魯) 화가와 수덕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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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
사군자와 문인화 산수화 계통의 전통 회화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서양적 조형기법인 입체감각을 도입해 동양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화가로 유명한 고암 이응로 선생은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이국땅 파리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르트르 드라크로와 등 예술가들과 같이 페르라세즈묘지에 묻혀있다.
선생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문하에서 서예와 그림 공부를 배우기 시작한 후 일본의 가와바다(川端) 그림학교(畵學校)를 수료하였다. 일본 유학 후인 39년 조선총독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대표작가로 부상했다.
광복 후,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했고,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등 강단에서 후학을 지도 하였다. 선생나이 54세되던 해 1958년에는 세계화단의 중심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동양미술연구소를 개설하여 동양화를 지도하고 또한 화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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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의 용조각 |
물감사용에 넉넉하지 못했던 초기파리시절 헌 잡지를 캔버스에 찢어 붙이며 시작한 콜라주작업이 선생의 예술세계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다.콜라주 작업으로 인해 고암은 추상미술에 새롭게 눈을 뜨고 1962년 당시 파리화단의 중심지인 파케티화랑에 초대되어 특색있는 동양작가로 평가받기 시작한다.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유럽화단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확보해 나간다. 1967년 북에 두고 온 아들을 보기 위해 북한을 다녀온 것이 화근이 되어 동베를린 간첩(東伯林) 사건에 연루, 옥고를 치르게 된다.
선생은 1969년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정착한 뒤 회화적 기법과 재료에 대한 갖가지 목각, 타피스트리 등 다양한 실험을 하게 되면서 글씨, 특히 한자를 해체하거나 변형하여 추상적 효과를 낸 문자추상화로 동양적 정서를 표현해나간다. 또한 먹을 이용해서 인체의 움직임을 표현했으며, 한글의 자획을 해체한 추상 작업을 진행하였다.
선생은 평면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각, 판화,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다양한 장르를 섭렵,자신의 예술혼을 유감없이 발휘한 열정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동양의 서예정신을 바탕에 두고 한자와 한글의 조형원리를 응용한 문자추상은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뛰어 넘어 국제적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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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암각화 |
이응로 선생의 호는 고암(顧菴) 또는 죽사(竹史)라고 하였는데 , 고암 이응로의 고암(顧菴)은 근대의 문장가인 정병조선생이 중국 동진의 화가 고개지처럼 되라는 의미로 고암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충남 문화재 기념물 제103호인 수덕여관은 고암선생이 1944년 구입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처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초가지붕과 소나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이 수덕여관이다. 이응로 선생은 박귀희여사와 이곳에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1969년에 동백림 사건으로 일시귀국하게 되자 수덕여관 앞 정원에 있는 자연석 큰바위에 자연과 동화된 예술세계를 표현하기도 했는데,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적 추상으로 암각한 것이다.
한국고건축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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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건축 박물관 전경및 내부 |
한국고건축박물관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에 위치하며 한국 건축미학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2001년 개관한 고건축박물관의 정문은 강릉 객사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재현해 놓았으며 제1전시관, 제2전시관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축조했다. 제1전시관은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대표적인 사찰 탑 불상 등 17가지의 축소모형 100여점을 제2,3전시관에는 국보급 문화재 축소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교통편
장항선철도 (서울 → 예산역 06:30~19:50, 13회/일, 2시간소요)
경부고속도로 (서울 → 천안IC → 예산)
서해안고속도로 (서울 → 포승IC → 당진·합덕 → 덕산)
현지교통(시내버스)
예산버스터미널 → 덕산 → 한국 고건축박물관(덕산면 대동리)
간월도 간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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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
떨어지는 낙조와 어리굴젓의 명산지로도 유명한 간월도는 원래 섬이었다. 하루 두 차례 썰물로 바닷길이 열리면 걸어갈 수 있는 이곳이 바로 간월도 섬이다. 이곳에 가면 조선왕조의 도읍을 정한 무학대사가 고려 말에 창건했다는 무학사(간월암)가 있다.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의 남쪽끝에 자리한 간월암은 산신각과 법당만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절이다. 퇴락하여 폐사된 절터에 1914년 당시 수덕사 주지였던 만공스님이 중건하여, 무학사란 불리우던 절이름을 간월암이라 개칭하였다한다.
이곳은 이태조의 왕사 무학스님이 창건한 암자로서 당시에 무학스님이 이곳에서 달을 보고 홀연히 깨치셨다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 (看月庵)이라 하고 따라서 섬이름도 간월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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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의 만공선사.무학대사 영정 |
무학스님은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가 고향이요, 스님이 아직 어머니 태중에 계실때 부친이 보시던 동사가 잘못되어 국채가 생긴지라 빚을 갚을길 없어 피신한다. 사령이 부인을 대신 서산 현감으로 호송하던 중 갑자기 산기를 느껴 쉴 곳을 찾게 되었으나 때는 엄동설한이라 산천이 모두 적설이라 찾는데 오직 한 곳이 기이하게 눈(雪)이 없는 맨땅인지라 마침내 이곳에 몸을 풀고 아기를 옷가지로 덮어두고 현감에 이르니 원이 부인이 몹시 피로해 함을 이상히 여겨 그 연유를 물어 알고 인간의 도리 어찌 이럴수 있으랴하며 곧 사령을 아기 있는 곳에 보내니 큰 학이 두 날개로 깔고 덮어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지라 돌아와 이 사실을 이야기하니 원이 크게 상서한 일이라하며 부인을 보고 아기 이름을 춤추는 학이라는 뜻으로 무학(舞鶴)이라고 지어준다. 후에 무학스님이 출태한 곳을 학돌재라 하였다.
무학이 이십세에 나옹스님으로 인하여 출가한다. 이때가 고려 공민왕 3년 (1353년)이다. 스님은 이 곳 간월암에 토굴을 지어 열심히 수행하던 중 달을 보고 도를 깨치시니 나옹스님이 더 배울 것이 없다 하시며 법호를 무학(無學)으로 지어주셨다. 고려의 국운도 저물어 갈 무렵 스님께서는 함경도 고원 백연암에서 이성계에게 500일 기도를 올리게 하였으니 기도 마치는 날 이성계가 얻은 석가래 세개를 짊머질 이상한 꿈을 해몽하시고 이미 이태조가 될 것을 짐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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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관세음보살상 |
이태조가 등극한 후 무학스님께서는 한양터를 짚으시고 창여문 첫자를 蒼字로 하시고 경복궁을 28간반으로 하시니 이미 28대의 왕운을 짐작한 것이었다. 당시에 간월도 황도 등을 사폐지로 정하여 스님께 드렸으며 많은 수도인들이 이곳 간월암에서 득력을 하였던 것이다.
그후 이조 말엽에 이 암자가 완전퇴폐된 것을 1941년(辛巳) 송만공 선사께서 선승의 안목을 기리시며 복구할 뜻을 비추시매 마벽초선사께서 그 뜻을 받들어 크게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대저 도인 난곳이 명승대지 아닌 곳이 있으리요마는 이곳처럼 지리와 명기가 빛나는 곳도 드물 것이다.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섬들이 이곳을 에워싸고 그 속에 한 송이 연화가 피었으니 멀리 찾는 마음의 고향이 바로예요. 적멸보궁이 또한 이 자리가 아니겠는가?
충의사(忠義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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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
예산시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충의사(사적 제227호)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사당이다.
충의사는 크게 사당이 있는 충의사지역과 길건너편 윤봉길 의사의 생가가 있는 사적지권역으로 구분지어 관람할 수 있다. 충의사에는 충의문을 지나면 사당이 나오고 사당 안에는 윤봉길 의사의 영정이 있다. 매년 4월28일부터 이틀간 매헌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며 추모하는 매헌문화제를 충의사(忠義祠)에서 개최하고 있다. 맞은편에 있는 사적지 권역에는 윤 의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 성장해서는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던 생가 저한당과 매헌기념관, 윤 의사의 동상과 기념탑이 있다. 매헌기념관 안에는 윤봉길의사의 유품30종 58점(보물 제569호)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일본 천황의 생일인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제국의 상해사변전승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해 전승축하기념식장을 폭파하고 상해 사령관 시라가와 등을 저격시킨 애국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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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기념관. 생가 저한당 |
충의사는 입장료가 없고 주차료만 소형 500원, 대형 800원이다. 사적지 저한당과 매헌기념관의 입장료는 어른 500원, 청소년 250원, 어린이 200원이다. 개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동절기는 오후 5시)이다.
자가운전
충의사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천안나들목으로 나가야 한다. 천안나들목을 나서 만나는 국도에서 좌회전한 뒤 곧 이어 만나는 사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공주 방향으로 달리다가, 21번 국도가 갈라지는 청삼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21번 국도를 타고 아산 방향으로 달린다. 아산, 예산을 지나 서산 방향으로 계속 달리다가 덕산과 덕산온천을 지나면 바로 길 오른쪽으로 충의사가 나온다. 주차시설이 넓게 잘 되어 있다. 길 건너편 사적지에는 별도의 주차시설이 없으니 차를 이곳에 주차시키고 사적지까지 돌아보는 것이 좋다. 서울 경부고속도로 궁정동 톨게이트에서 약 2시간 30분~3시간 거리이다.
대중교통
대중교통을 이용해 충의사로 가려면 먼저 예산으로 가야 한다. 서울 서초동의 남부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해 예산까지 간 다음, 거기서 충의사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 수덕사까지는 약 3시간~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덕산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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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온천 |
덕산에서 남서쪽으로 2km지점에 있는 온천이다. 조선 순조 때부터 알려지기 시작해서 1918년경에 개발되었으며 1927년 수질분석을 통해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수질로 밝혀진 곳이다. 온천은 1981년에 다시 확장 개발되었다.
덕산온천은 조선시대 이율곡이 그의 저서『충보』에서 이 마을이 온천골이라 불리던 연유와 이곳 물의 효능을 인정, 탁월한 약수라고 밝히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이곳에 온천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율곡 선생의 저서에 상세히 적혀있는 온천골 유래는 다음과 같다. 날개와 다리를 다친 학이 있었는데, 이 곳으로 날아오더니 어느 날부터 솟아나는 물을 다리의 상처에 바르며 치료한 후 떠나갔는데, 학이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니 따뜻하고 매끄러운 물이 솟아나고 있었더란다.
지하 210m까지 파고 들어가 끌어올린 온천수는 섭씨 40도 52도 사이 수온을 유지하는 순알칼리성 라듐천이다. 나트륨 칼슘 염소 불소 규산 등이 함유된 천연중탄산나트륨 온천수로 소화기계통의 질병뿐만 아니라 신경계통 질환과 위장병 만성피부병 피부미용 등에도 좋고 류마티스 동맥경화 등에도 효험이 뛰어나다고 한다.
온천수로서는 유일하게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중교통
예산~수덕사행 시내버스 수시운행, 덕산온천 하차, 30분 소요
승용차
① 서울→천안I.C.→아산(18.5km)→도고(11.5km)→덕산온천
② 예산→45번 국도→갈림길(45번, 21번 국도)에서 우측 45번 국도로 6.5km →삽교역→6.4km→덕산면→2.2km→덕산온천입구(한남대교 남단에서 약 144km)
추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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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고택 |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실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의 생가다.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추사의 묘소가 있다. 전체 면적은 80.5 평이며 "ㅁ"자형 가옥으로 솟을 대문의 문간채와 "ㄱ"자형의 사랑채 그리고 안방, 건넌방 등이 있는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추사 고택에서 북서쪽 산길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화순옹주 홍문앞에 자리한 희귀한 백송을 볼 수 있다.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예산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 백송의 수령은 약 200여년이며 높이는 약 10m이다.
추사고택 입구에 있는 추사기념관에 들어가보면 금석학 실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묵향 그윽한 체취를 흠뻑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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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
추사문화제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의 생가가 있는 예산에서는 매년 10월10일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포함하여 3일간 추사문화제가 열린다. 한해의 농사를 마치고 치러지는 향토문화축제이고 전국 서예 휘호대회로도 유명하다.
입장료 어린이 100원 어른 300원 단체는 어른200원 어린이 100원이다.
안면도 황도리 붕기풍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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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리 풍기풍어제 |
전통민속행사의 하나인 안면도 황도리 붕기풍어제는 매년 정월 초이틀에서 초사흘까지 이틀동안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 당집에서 열린다.
붕기풍어제의 유래는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밤에 출어중이던 황도리 어선이 항로를 잃고 표류하던 중 지금의 황도 당산에서 밝은 불빛이 귀로를 밝혀 주어서 어선은 무사히 귀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당집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풍어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어촌마을의 전통풍습이고 붕기는 만선을 한 배에 다는 깃발을 이른다.
안면도 황도리의 붕기풍어제는 충남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고 1977년 제18회 전국민속예술인경연대회에서는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산마애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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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 |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은 사적 316호인 보원사지 입구 좌측 가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내어 태안마애삼존불과 함께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고 있다.
삼존불의 가운데 석가여래입상응 중심으로 왼쪽에는 보살상, 오른쪽에 반가사유상이 배치된 특이한 삼존형식으로, 이는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존불의 높이는 본존상인 여래입상이 높이 2.8m, 보살상 1.7m, 반가사유보살상 1.6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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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 고란각 |
전체적으로 묵직하면서도 세련된 기법으로 신체의 굴곡을 부드럽게 처리한 솜씨도 일품이다. 부처의 옷이 무겁게 보이지만 활달하면서 유려한 주름이 새겨진 것도 독특하다. 반가사유보살상과 보살입상에도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이 잘 나타나 있다. 오른손을 턱에 대고 오른다리를 왼다리 무릎위에 걸친 반가보살상은 청순한 웃음을 띄고 있어 인상적이다. 보살입상은 상반신을 벌거벗은채 목걸이만 걸치고 있는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 말기(6세기말~7세기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삼존불의 가장 큰 특징은 특유의 미소에서 찾을 수 있는데, 특히 입술을 드러내면서 눈을 크게 뜨고 뺨을 한껏 부풀린 모습의 여래입상은 백제인의 전형적인 미소를 보여준다. 그것은 신라의 속깊은 미소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그 미소속에는 침묵이 있고 침묵속에 사랑과 자비가 깃들어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또한 이 불상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미소짓는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불자들 사이에선 자신과 똑같은 심정으로 얘기해주는 불상으로 통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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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삼존불이 위치한 산 중턱에 있는 |
삼존불이 자리한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강댕이골은 백제시대에 태안반도를 통해서 유입된 중국의 불교 문화가 그 당시의 수도인 부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길목이었다. 중국의 선진 문화를 다른 곳보다 앞서 접했던 이곳 사람들은 서산마애삼존불이라는 찬란한 불교 미술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백화산의 돌출한 바위에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이 삼존불은 중국 문화와의 해상교류의 흔적 내지 중국 석굴의 영향을 보이는 최초의 예로서 주목되며 돌에 새긴 불상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또한 팽이모양의 육계, 강건한 얼굴, 당당한 신체와 묵중한 법의 등이 백제불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걸작품이며 중앙에 보살입상이 있고 좌우로 장대한 불상이 서있는 특이한 삼존형식은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예로 불상의 진가를 더 높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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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지 전경 |
서산마애삼존불로 올라가는 용현 정류장에서 약1㎞쯤 계곡으로 더 들어가면, 고려 초 태조부터 광종까지 4대 임금을 섬기면서 고려불교를 크게 발전시킨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역임한 탄문 대사의 사리탑과 비석이 남아있는 보원사지가 있다.
보원사지내에 보물 제102호 적조, 보울 103호 당간지주, 보물 104호 5층석탑, 보물 105호 법인국사보승탑 보물 106호 법인국사보승탑비 등 6점으 의 적조 유물들은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현존하는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상당히 성세했던 사찰로 추정되고 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관광지로 훌륭한 곳이며 현존하는 유물로는 보물 5점이 있다. 또한 주변 용현계곡에는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림욕장이 있어 여름철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고 있다.
찾아오는 길
대중교통
(1) 서산공용버스터미널에서 운산행 시내/시외버스를 이용해 운산면 승강장에서 하차 후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서산 → 32번 국도 → 운산 → 서산 마애삼존불
(2) 당진 → 32번 국도 → 운산사거리 → 647번 지방도로 → 가야주유소 → 12번 군도로 → 마애삼존불
자가용
(1)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 → 32번국도 → 운산 → 고풍리 → 서산마애삼존불상
(2) 경부고속도로 천안I.C. → 아산 → 예산 → 45번국도 → 덕산 → 운산(원평리) → 618번지방도 → 고풍리 → 서산마애삼존불상
태안마애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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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마애삼존불 |
1966년 2월 28일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 8월 31일 국보 307호로 지정되었다. 태안읍 백화산(白華山, 284m) 기슭의 태을암에서 동쪽으로 30m 정도 떨어진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서산마애삼존불과 함께 백제의 대표적 불상으로 꼽힌다. 좌우 여래입상(如來立像)과 중앙에 보살입상(菩薩立像)을 배치한 특이한 삼존상으로서 우리나라의 불교 조각사상 희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중국 산동반도에서 유행한 석굴사원의 영향을 직접 받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양식(始源樣式)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불상의 높이는 왼쪽 불상 2.96m, 오른쪽 불상 3.06m, 중앙보살 2.23m로 2여래·1보살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큰 바위에 사각형의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남북으로 여래상을 새겼으며 중앙에 낮은 보살입상을 끼웠다. 보살상은 양손으로 보주(寶珠)를 받들고 머리에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썼으며 다리에 X자형으로 교차된 옷자락을 표현하였다. 양쪽 불상의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었으며 어깨는 넓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으며 직사각형의 얼굴에 귀가 길어 어깨에 닿았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肉)가 표현되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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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마애삼존불 |
이 불상은 중국의 석굴 바깥벽에 새겨진 불상들과 유사하여 중국 문화와의 해상교류 및 중국 석굴의 영향이 보이는 최초의 예이다. 중앙에 본존불(本尊佛)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불 배치와 달리 가운데에 보살상,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불상 배치를 나타낸다. 강건한 얼굴, 당당한 신체와 묵중한 법의(法衣) 등 6세기 후반의 백제 불상 양식을 나타낸다.
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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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문명대) |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가장 잘 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성이다. 태종 18년(1418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성종22년에 완공했다. 총 길이1,800m 성벽높이 5m로 정문인 진남문과 망루는 보존되어 있으나 동문과 서문은 붕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며, 선조 12년(1578) 충무공 이순신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5만9천 평의 넓은 벌판에 이 고장에서 나는 화강암으로 성 외곽을 쌓고 안쪽을 흙으로 쌓아 올려 높이 5m, 둘레 1천8백m의 성곽을 만든 뒤 성 벽밖에 깊이 2m의 연못을 파놓은 외침을 막던 전형적인 성이다. 성벽 외곽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울타리처럼 둘러쳐 " 탱자성 " 으로 불리기도 했다
예산의 먹거리와 숙박
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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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죽 |
예산의 먹거리로는 어죽, 한우갈비구이, 붕어찜 그리고 산채더덕정식과 곱창구이를 들 수 있다.
맑고 푸른 예당호에서 갓 잡아낸 잉어 붕어 메기 모래무지 등 싱싱한 민물고기로 끓여내는 어죽은 이 고장 향토음식의 백미라고 한다.
한우갈비구이의 한우는 내륙지방의 완만한 구릉에서 자라기 때문에 그 육질이 부드럽고 감칠맛이 뛰어나다는 평이다.
붕어에 시래기, 콩 등을 넣어 양념장을 1시간이상 끼얹어 쪄내오는 붕어찜은 맛이 깊고 풍부하다.
산채더덕정식에서는 덕숭산 기슭의 기름진 토양과 청정자연환경에서 생산된 예산의 특산품 삽다리더덕을 맛볼수 있다. 더덕은 제2의 인삼으로 불리는 자연건강식이다.
예산의 곱창구이는 재료가 신선하고 대를 잇는 특별한 비법으로 맛을 내 미식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으며 저지방 저칼로리 영양 건강식품으로 일반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먹거리 가운데 하나다.
숙박시설
수덕사일주문 밖의 숙박시설을 이용하거나 덕산온천지구로 이동하면 된다.
덕산온천지구에는
덕산온천관광호텔(041-338-5000)
세심천온천호텔(041-338-9000)
뉴가야관광호텔(041-337-0101) 등이 있다.
이곳은 모두 한실과 양실의 객실을 모두보유하고 있으며 부대시설로는 한식당과 온천탕이 있다.
사찰과 문학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 제막식
수덕사와 불자가수회로 구성된 노래비건립위원회가 불자가수 송춘희씨가 불러 크게 유행했던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가 수덕사 입구 주차장에 세워졌다. 노래비의 전면에는 수덕사의 여승 가사 12절을 후면에는 영어와 일본어로 가사를 새겨두었다. 수덕사의 여승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수덕사의 여승
송춘희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사찰찾아가기
선(禪)의 중흥도량 수덕사 (修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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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 |
운수납자(雲水衲子:구름과 물처럼 수행처를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스님) 들의 수행정진터,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5대총림(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의 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수덕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알려져 있다.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엽에 숭제(崇濟) 스님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설을 뒷받침할 만한 또다른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일설에는 599년 지명법사가 창건, 원효가 중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 <혜현구정(惠現求靜)> 조의 기록을 통해 수덕사가 백제시대에 이미 창건된 사찰임 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백제 말에 창건된 수덕사는 근·현대에 들어서서 경허 성우(鏡虛 惺牛) 스님을 비롯해 만공 월면(滿空 月面)· 수월· 금오 태전(金烏 太田) · 벽초 경선(碧超 鏡禪)· 대의(大義)· 청담 순호(靑潭 淳浩)· 묘리 법희(妙理 法喜)· 일엽 하엽(一葉 荷葉) 스님 등의 고승이 주석, 선(禪)의 중흥지로 뿌리내려져 있다.
1984년에 덕숭총림(德崇叢林)을 개설한 수덕사는 종합수도도량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혜암 현문(惠庵 玄門)· 벽초 있다. 수덕사의 산내암자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을 비롯하여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선풍을 휘날리던 정혜사와 금선대 등이 있다. 수선도량으로서 수덕사는 선(禪)의 생활화와 선풍진작의 계승을 위해 선실천(禪實踐)수련대회를 갖는 등 일반인들에게 우뚝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경선(碧超 鏡禪)· 원담 진성(圓潭 眞性)스님 등이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수선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이어오고 있다. 또한 1996년에는 승가대학을 개설해 총림의 위상 제고에 힘쓰고 있으며 일주문 밖의 상가 등을 정비하여 수행환경 정화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관람포인트
1. 대웅전 측면을 보면 가구(건물의 짜임새)가 그대로 드러나보인다. 특히나 단청이 다 퇴색하고 자연스러운 나무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다른 곳에 비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2. 직선재와 곡선재의 적절한 배치, 장식적인 포대공과 절묘한 곡선을 이루는 우미량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나라의 목조가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수덕사 위치와 찾아오는길
위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번지
찾아오는 길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천안나들목으로 나가야 한다. 나가서 만나는 국도에서 좌회전 한 뒤 다음 사거리에서 다시 좌회전을 한번 더하고 공주방향으로 직진한다. 청삼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21번국도를 타고 아산방향으로 직진. 아산, 예산을 지나 서산을 향해 달리다가 이정표를 보면 덕산온천과 덕산(德山)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진행방향으로 조금 더 직진하면 충의사가 나오는데, 충의사를 지나 622번 지방도로로 좌회전하여 10분정도 가면 수덕사로의 진입을 알려주는 안내 표지판이 나온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진입 서해대교 송악나들목에서 국도 32번을타고 예산방향으로 진입하거나, 당진나들목에서 국도 32번을 이용해서 합덕을 지나 지방도로 622번과 609번을 타고 덕산 방향으로 진행해가면 된다.
대전에서 유성을 지나 국도 32번을 타고 예산으로 오는 방법과 국도 32번에서 공주를 지나 예산으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해미나들목에서 45번 국도를 타고 덕산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덕산온천 방향의 이정표가 나온다. 덕산온천방향으로 가다가 우회전을 해야한다. 진행방향으로 조금 더 직진하면 충의사가 나오는데, 충의사를 지나 622번 지방도로로 좌회전하여 10분정도 가면 바로 수덕사 앞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수덕사로 가려면 예산이나 홍성행 버스를 타야한다. 서울 남부버스터미널에서 운행되는 시외버스 예산행은 20분 간격으로, 홍성행은 40분 간격이다. 오전7시부터 오후7시30분 사이에 이용할 수 있으며 소요시간은 2시간30분이다.
홍성이나 예산에 도착하면 수덕사행 버스가 오전 7시45분부터 오후 8시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다. 40분정도 걸린다. 서울에서 수덕사까지 직행하는 버스가 오전7시20분에서 12시40분 사이에 하루에 3편 있다. 차편이 몇편 배정되어 있지않아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고 수덕사까지는 3시간 소요된다.
서울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이용해 삽교역에서 하차하여 수덕사행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과 예산역이나 신례원역에 내려서 수덕사행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수덕사 주변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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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에서 내려다본 수덕사 |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예산을 포함한 충청도 일대지역을 가장 살기좋은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야가 넓어 농산물이 풍족한곳이요, 아산만에서 태안반도의 바닷길 또한 발달해서 상거래도 활발한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란다.
덕숭산(德崇山)은 태백산맥으로부터 서해를 향해 뻗어나간 차령산맥의 줄기이다. 삽교천 상류의 수원이기도 한 덕숭산은 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과 서쪽의 오서산 동남쪽 용봉산(龍鳳山)으로 둘러싸여 있다.
495m 덕숭산 정상까지는 30분정도 소요되는데, 밤에는 소쩍새가 울고 낮에는 꾀꼬리 뻐꾸기 산비둘기의 노랫소리 청량함이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시지각을 즐겁게 해준다. 주변의 절경으로 원효봉(630m) 석문봉(670m) 해태바위 등이 있다. 덕숭산을 뒤덮고 있는 상수리나무 구렛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숲의 울창함을 맛보면서 산마루에 오르면 홍성일대와 예산 서산 당진지방까지도 내려다 보인다.
덕숭산(德崇山)과 수덕사(修德寺)라는 산이름과 절이름에서 절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덕숭산(德崇山)은 덕(德)을 숭상하는 산이라 하고, 수덕사(修德寺)는 덕(德)을 닦는 절이라 풀이할 수가 있는데, 덕산(德山)이라는 지역 명칭도 어쩌면 여기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김영태교수는 1997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백제고찰 수덕사의 사적고찰」에서 주장한다.
4. 사찰문화행사
연중행사
만공스님 다례제와 수덕사 보살계 산림 수계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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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스님 다례제 |
무량의 복과 지혜를 닦아 생사해탈의 길에 오르기 위해 법연을 맺는 보살계 수계산림법회가 지역마다 열린다. 수덕사도 예외는 없다. 보살계 수계산림법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보살의 삶으로, 계율을 보다 곧고 굳게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을 불·법·승(佛·法·僧) 삼보앞에서 다지는 법회다. 이날은 우리도 부처님처럼 청정하게 보살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서원세우는 날인 것이다.
만공스님 다례제는 음력 3월7일에 행해진다. 보살계수계산림법회도 같은날 거행된다.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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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부처님 관욕식 |
수덕사는 매년 음력4월8일 대웅전에서 한없는 자비와 복덕과 지혜로 이땅에 오신 부처님을 봉축하는 법회를 개최한다.
부처님 육신의 유한한 삶은 이미 가버린 뒤지만 깨달음의 법신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구불변의 존재로 온 우주법계에 우리들 곁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탐진치 삼독에 물든 중생을 제도하는데 온힘을 기울인 부처님의 동체대비 크신 자비를 본받아 대자비행을 실천하고 고통받고 억압받는 이웃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대비원력을 세우는 날이다.
법요식의 순서는 범종의 타종을 시작으로 삼귀의로 예를 갖추고 반야심경을 봉독한다. 그다음 참석자들은 찬불가 헌화 헌등 헌다 등 육법공양을 불단에 올리고 주지스님의 봉축사와 합창단의 덕높으신 스승의 감로법을 청하는 청법가가 끝난뒤 그 자리에 모인 사부대중들은 마음과 자세를 단정하게 한 뒤 방장스님의 법어를 듣는다. 발원문을 신도대표가 낭독하고 다같이 부처님오신날을 찬탄해마지 않는 찬불가를 부른다. 헌향 후 사홍서원으로 마무리한다.
이날은 이땅에 살아가는 중생들이 부처님 이땅에 오신 참뜻을 새기는 날인 것이다.
특별행사
수덕사 우담바라 합창단 창단 기념발표회
수덕사 우담바라합창단(단장 박숙자)은 1995년 4월 29일 예산군 문예회관에서 1천여 청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단 1주년기념발표회를 가졌다. 첫 발표회에는 도신 스님과 송춘희법사 룸비니합창단 가릉빈가합창단이 찬조 출연하기도 했다.
우담바라합창단은 1994년 3월 14일 창단, 맹활약 중이다.
일본 아스카사와의 자매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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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사찰복원도. 아스카대불 |
백제는 6세기 후반 일본 아스카지역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불법을 접할수 있는 경전과 사원건축을 담당할 노반박사, 기와박사, 화공 등의 인력도 파견하였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선진불교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아스카지역은 불교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형성해나가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래깊은 불교교류를 기념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간의 불교발전을 위하여 수덕사와 아스카사는 1986년 자매결연을 맺고 오늘날까지도 해마다 방문단의 왕래를 통해 불교문화교류를 활발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수덕사 아스카사(飛鳥寺) 결연 10주년 5층불탑 낙성식
백제불교의 최초 전래지인 일본 비조사(飛鳥寺, 주지 야마모토 호준)와 수덕사와의 자매결연 10주년을 기념하여 1996년 11월 13일 일본 비조사에서 양국대표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층불탑 낙성식을 가졌다.
한·일 양국불교의 우호와 친선을 강조하며 가진 이날 행사에는 10주년 기념불사 추진의 하나로 수덕사가 백제 정림사지 5층석탑 양식의 불탑을 일본 비조사에 기증, 이에 따른 낙성식을 가진 것이다.
사찰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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