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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건청궁` 98년 만에 제 모습

淸潭 2007. 10. 19. 08:47
`비운의 건청궁` 98년 만에 제 모습 
 
처음 전깃불 켜 … 250칸 규모로 복원
건청궁 내 왕비가 거처하던 곤녕합 옥호루가 18일 공개됐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 폭도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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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3월 고종은 경복궁의 궁중궁인 건청궁(乾淸宮) 일대에 가로등을 세워 전깃불을 밝혔다. 조선 최초의 전깃불로 에디슨이 전기를 사용한 지 8년 만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궁성 설비보다 2년을 앞질렀다.

고종식 근대화의 현장, 건청궁이 3년여에 걸친 복원공사를 마치고 18일 모습을 드러냈다. 1909년 일제가 철거한 지 98년 만이다. 문화재청은 이날 복원된 건청궁을 공개하며 20일 일반 관람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鹿山)과 향원정 사이에 자리 잡은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사대부 저택과 비슷한 양식을 갖췄다. 규모는 양반가옥의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사대부가에서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듯 왕의 거처인 장안당,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청궁은 1873년, 재위 10년 만에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난 고종이 세웠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고종은 이 궁중궁에 '하늘은 맑고(乾淸), 땅은 평안하며(坤寧), 오래도록 평온하게 지낸다(長安)'는 기원을 담았다.

장안당을 중심으로 오른쪽 곤녕합 쪽은 한식으로 짓고, 왼쪽에는 중국식 벽돌 건물인 집옥재를 지었다. 장안당 뒤에는 옥호루라는 반3층 서양식 건물을 지었는데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집옥재 옆에는 서양 시계탑이 들어섰다. 전통 사회에서 시각을 정하는 것은 군주의 고유한 권한, 고종은 전통 시계인 자격루(물시계) 대신 서양 시계를 들였다.

서울대 이태진(국사학) 교수는 "혼합된 건물 양식, 전깃불, 시계탑 개설 등은 군주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건청궁은 지금껏 조선 왕조가 몰락한 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됐기 때문이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보고서에 따르면, 황후는 장안당 뒤뜰에서 살해된 뒤 옥호루에 잠시 안치됐다가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고종은 이듬해 10여 년간 기거한 건청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때부터 건청궁은 그 기능을 상실하며 1909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려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들어섰고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됐다.

이 교수는 "건청궁 복원을 계기로 고종의 근대 국가 만들기가 재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건청궁 일반 관람은 경복궁 홈페이지(http://www.royalpalace.go.kr)의 인터넷 예약 접수를 통해 1일 6회 실시한다.

권근영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양반집 같은 편안함 살리려 단청 안 해`

 

복원 지휘 신응수 대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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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건청궁은 신응수(65.사진) 대목장의 손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지정된 뒤 18년간 경복궁 복원사업을 대부분 진두지휘해 왔다. 건청궁 복원이 끝이 아니다. 앞으로 2년간 진행될 광화문 복원도 맡고 있다. 충남 병천중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가 궁궐 재현의 대역사를 이끌고 있다.

18일 건청궁에서 만난 그는 "강원 영동지방서 구해 지은 소나무 색이 하도 좋아 건청궁에는 단청칠을 하지 않았다"며 "궁의 단청이 위압감을 줄 수도 있을 텐데 건청궁에서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청궁 개방의 감회는.

"산지를 다니며 소나무 찾아 건조시켜 집 짓는 데 한 3년이 걸렸다. 좋은 나무를 찾아 한옥의 멋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

-경복궁 여러 건물 중 건청궁만의 특징은.

"건청궁은 사대부가의 형태다. 궁의 고급스러운 양식과는 다른 편안한 살림집 분위기가 난다. 특히 옛 자료와 달리 이번엔 단청을 하지 않았다. 관람객들은 이곳서 처마와 처마가 맞닿은 곳에서 낙숫물 떨어지는 장면 등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웠던 점은.

"자료의 부족이었다. 새로운 자료가 나올 때마다 설계를 바꿨다. 이 때문에 미리 구해 다듬어둔 자재가 못쓰게 되기도 했다."(※경복궁의 도면자료로는 북궐도형과 궁궐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확한 복원을 위해서는 건물을 입체적으로 찍은 사진이 필요했다. 문화재청은 당시 조선을 기행했던 서양인들이 찍은 사진 자료 등을 구해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쳤다.)

권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