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도 지음|미래의 창|264쪽|1만1000원
미국 현대미술가 바바라 크루거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고 했다. 소비가 존재의 이유처럼 돼 버린 요즘 세상에서 ‘명품’을 좇는 사치 열풍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서울대에서 소비자학을 연구하는 김난도 교수는 가짜 명품시계에 열광하고, ‘명품 과외’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사치에 몰두하는 2007년 대한민국의 ‘럭셔리 신드롬’을 파고 든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 부유층은 서구 상류층처럼 고전음악, 발레, 오페라 등 고급 예술에 대한 안목이나 집안 전통같은 문화적 취향보다는 ‘명품’ 구매라는 소비행위를 통해 중·하류층과 구별지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부유층은 있으나 상류층은 없는 우리 역사의 단절 때문이다. 양반 계층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몰락했고 근대화 과정에서 재산만이 계급의 유일한 척도가 돼버렸다.
- ▲사회학자 짐멜은 중하위층이 신분상승의 열망을 실현하기위해 상류층의 소비를 모방하는 현상이 있다고 했다. 서울시내 백화점 앞 명품광고판.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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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품의 가격구조와 상징성, 사치를 열망하는 소비자들의 심리, 사치를 조장하는 기업과 대중매체, 정부의 책임 등을 따지는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치에 몰두하는 심리를 과시형과 질시형, 환상형과 동조형으로 설명해낸 대목이다. 과시형은 ‘남에게 자랑하거나 뽐내기 위해 실제보다 과장하는 것’으로 신흥부자들의 소비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에겐 ‘어중이떠중이’와 똑같은 취급을 받기 싫다는 공포가 존재한다. 질시형은 ‘자신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의 성취를 쉽게 승복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소비 유형이다. 자신이 선망하는 집단에서 소비하는 물건을 사면 자기도 그 집단에 소속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치품을 사들인다는 것이다. 이들에겐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따라다닌다. 부유층의 소비를 모두 따라 할 수 없기에 구두나 가방, 옷처럼 한 가지 품목이라도 명품을 쓰려고 한다. 이런 ‘일품 명품주의’는 다른 물품들이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기에 오히려 부유층으로부터 무시당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사치품 유통 담당자들이 전하는 과시형과 질시형의 구매행태는 흥미롭다. 과시형은 고급이되 널리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선호하지만, 질시형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브랜드를 찾으면서 모피코트나 스카프처럼 남들에게 잘 드러나는 품목을 고른다는 것이다. 질시형 소비자는 일단 구매를 결심하면 가격을 묻지도, 깎아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부자인 과시형 소비자들이 오히려 스스럼없이 할인해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과시형은 혼자 쇼핑하기를 즐기고, 질시형은 판매원이 옆에서 ‘사모님, 사장님’ 하며 대우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저자가 보기에 중산층의 질시형 소비는 더욱 위험하다. 부유층의 과시형 소비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사치의 강도를 높이고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따라 하기가 시작되면 다른 계층과의 구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유층의 도망가기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환상형 소비자는 ‘사치품을 통해 보다 나은 나로 보일 수 있다’는 변신의 욕망을 갖는 경우다. 사치품은 이들에게 ‘요술지팡이’다. 청소년과 젊은 여성들 사이에 많은 동조형은 유행에 따라가는 쪽이다. 이들은 명품계를 짜고, 인터넷 상에서 명품 동호회를 만든다. 저자는 이런 모임이 자금조달이나 정보교환을 위한 목적도 있지만 사치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기능도 한다고 짚어낸다. 그들이 함께 나누려는 것은 비용이나 정보가 아니라 “핸드백 하나에 한 달 월급을 다 써도 좋을까” 하는 불안감이라는 것이다. 능숙한 요리사가 횟감을 다루듯,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솜씨가 경지에 올라 있다.
또 저자는 TV와 신문, 잡지 등 대중매체와 국가가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또는 경기를 부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치를 부추긴다고 꼬집는다. 문제는 사치가 잠깐의 기쁨과 위안은 주지만, 행복을 지속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치품은 지갑을 얇게 만들지만, 욕망은 더 두꺼워지게 만든다.”(242쪽) 이런 사치의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개인이 합리적으로 소비해야 하고, 국가는 부의 분배가 공정하게 골고루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가진 계층의 과시욕과 가지지 못한 계층의 추종 욕망을 줄일 수 있다. 저자는 쇼핑 이외에 자연과 교감하고, 예술을 감상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한 삶이 바로 명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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