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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딸에 대한 제문 경오년(1930) 〔祭亡女文 庚午〕 -조긍섭

淸潭 2024. 12. 21. 20:01

죽은 딸에 대한 제문 경오년(1930) 〔祭亡女文 庚午〕 -조긍섭

죽은 딸에게 고하는 제문 경오년(1930) 〔祭亡女文 庚午
 모년 모월 모일에 아버지 심옹(深翁)이 둘째 딸 이실(李室)의 소상이 가까워, 고기 포 하나와 과일 두 가지에 생선 말린 것 세 가지를 제수로 갖추어 우편으로 그 영전에 부치고, 글로 다음과 같이 알리노라.아, 내 딸이여. 아, 내 딸이여. 내가 죄가 너무 많아서 전후로 자녀 일곱을 두었지만 차례로 죽고 말았다. 오직 너와 네 언니만 다행히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었고, 시집도 또 모두 마땅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노쇠하고 가난해서 세상에서 이른바 재미라고 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거의 너와 네 언니가 자못 의지할 만해서 눈을 감기 전에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그런데 네가 지금 또 갑자기 이렇게 되어 버리니, 하늘이 끝내 나를 궁하게 만들고 만 것인가?네가 시집가고 나서 6년 동안 나는 4번 너를 보러 갔고, 너는 한 차례 친정에 왔다. 늘 나를 보게 되면 문득 눈에 눈물을 글썽이니, 나는 특히 부모를 멀리 떠나 있다가 만나자 기쁨이 극에 이르러 슬픔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네 엄마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늘 신상에 남모르는 근심이 있어도 그 말을 다할 수 없는 것처럼 하였다. 지난해 봄에 네 엄마가 한 차례가 찾아가서 대개 네 모녀의 쌓였던 회포를 풀었을 것이지만, 네 엄마가 돌아오고서도 또한 그 실정을 다 알지 못한 것이 있는 듯하였다. 나는 늘 네가 성격이 치우치고 심지가 약해서 정을 참고 일을 감내할 수 없을까 근심하였다. 아, 이 때문에 병을 불러들여 생명을 재촉한 것인가?그러나 너는 나이 열일곱에 시집을 가서 몇 개월이 되지 않아 네 시아버지가 편지를 보내,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리가 있음을 자주 칭찬해서 몹시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너는 친정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는 대구(大邱) 변이정(卞彜庭)의 우소(寓所)에 묵곤 하였다. 지난가을에 변공(卞公)이 서울에서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하고 또 죽은 공의 아내가 그 아름다운 덕행에 대해 늘 말하더라고 하던데, 변공도 그때 부인을 잃었다. 너는 왜소하고 약한 자질로 잠깐 사이에 이와 같이 대인장자(大人長者)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으니, 비록 나라고 하더라도 또한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너는 나이가 겨우 스물 둘이고 또 자식도 하나 없으니, 그 삶은 거의 물거품이나 허깨비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식자들로 하여금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탄식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또 한 세상에서 삶을 그릇되게 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칠팔십을 살면서 잘못은 많고 기록할 만한 선행은 없는 자들과 비교해보면, 누가 더 나은가? 가령 네가 죽어도 혼령이 있다면, 그 단명한 것을 슬퍼하지 말고 네 남편과 너를 이어 아내가 된 사람을 보살펴서 후사가 계속 이어지도록 한다면, 네가 그 내려준 것을 누릴 것이니, 너 자신이 소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네 장지를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고 하니, 안장할 날을 기다려 나는 마땅히 글을 하나 지어서 너를 길이길이 전할 것이다. 옛날 김농암(金農巖)의 딸은 일찍 죽었지만, 아버지의 묘지명(墓誌銘)을 얻어서 영광스럽게 되었다. 내 글이 비록 농암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너의 마음이 또 농암의 딸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니, 이 말을 들으면 지하에서 거의 우울해하지 않으리라. 아, 슬프구나. 아, 애통하구나.

年月日。父深翁。以二娘李婦朞祥在邇。具一脯二果三鱐之奠。郵致于其靈前。而文以諭之曰。嗚乎吾女。嗚乎吾女。余命途釁甚。前後擧七男女。而次第爲異物。惟汝與汝姊。幸得成立有室家。其歸又皆得所。余衰且貧。無世俗所云况味者。獨汝與汝姊頗可倚賴。庶幾爲未瞑前慰悅之資矣。汝今又奄忽至此。天乎其竟窮我已耶。自汝歸後六年之間。吾四往視汝矣。汝一來寧父母矣。每見余則輒眼淚汪然。余特以爲遠其父母。喜極成悲。不之恠也。然汝每有書於汝母。常若有隱憂在身而不能盡其言者。去春汝母一行。盖所以宣暢汝母子積鬱之懷。而汝母之歸。亦似有未盡得其情者。余常憂汝性偏而膓弱。不能忍情耐事。嗚乎。此其所以致病而促生者歟。然汝年十七而嫁。未數月而汝尊舅書來。亟稱其承上接下之有道。爲可奇幸。及汝之來寧而歸也。宿于達府卞彜庭寓所。去年秋卞公自京聞汝死。書與余慰之。且云先妻每道其德行之懿。盖卞公時亦喪其夫人也。夫以汝短小柔弱之姿。而俄頃之際。能得大人長者之譽如此。則雖余亦不識其何以能致然也。汝得年纔廿二。又無一育。其生也殆同於泡幻。然猶使識者興秀而不實之歎。亦可謂不枉生於一世。視世之耄耋多累而無善可紀者孰多也。使汝死而有靈。不以其短造爲戚。而保佑汝婿及繼汝之人。俾後嗣繩繩則汝之享其錫。與身自有之何異焉。聞汝葬埋尙未得地。俟其安厝之日。吾當爲一文以圖不朽汝。昔金農巖之女以早死而得父銘爲榮幸。余文雖不及農巖。而汝之情或不遠於金氏女也。則聞此而庶無邑邑於泉下也。嗚乎哀哉嗚乎痛哉。

[주-D001] 변이정(卞彜庭) : 변정상(卞鼎相, 1861~1935)을 말한다. 자는 여중(汝重), 호는 이정(彜庭),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89년(고종26)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894년 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고,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으나 1910년의 경술국치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독립협회ㆍ기호흥학회ㆍ인천박문학교 등에 기부금을 내는 등 자강운동에도 큰 관심을 나타냈다. 세 아들은 한국의 삼소(三蘇), 변씨삼절(卞氏三絶)로 불리는 변영만(卞榮晩)ㆍ변영태(卞榮泰)ㆍ변영로(卞榮魯)이다.

[주-D002] 꽃을 …… 탄식 : 재능은 뛰어나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싹을 틔우고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라고 하였다.

[주-D003] 김농암(金農巖) :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을 말한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ㆍ삼주(三洲),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기사환국 때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사사되자 사직하고 은거하였고,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 김수항이 신원되면서 대제학과 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직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농암집》과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D004] 아버지의 묘지명(墓誌銘) : 《농암집》 권27의 〈망녀 오씨부 묘지명(亡女吳氏婦墓誌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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