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직책 서거정(徐居正)
무릇 물(物)은 각기 직책이 있다.
소의 직책은 밭가는 것이요,
말의 직책은 사람 태우고 물건 싣는 것이며,
닭의 직책은 새벽을 알리는 것이요,
개의 직책은 밤에 도둑을 지키는 것이니,
능히 제 직책을 다하면 직책을 지킨다 이르는 것이요, 제 직책을 못하면서 다른 직책을 가름하면 직책을 넘어섰다 이르는 것이니, 직책을 넘어서면 이치를 위배하는 것이요, 이치를 위배하면 앙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한 가지 물건을 들어서 비유하건대, 닭이 새벽에 울지 아니하고 저녁에 운다면, 사람이 다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반드시 잡아 없애고 말 것이니, 직분을 넘어서는 데서 앙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나는 보건대, 양반의 집안에서 사내종은 농사를 직책으로 하고 계집종은 길쌈을 직책으로 하여, 사내종은 농사짓고 계집종은 길쌈하면 그 집일이 잘되거니와, 만약 사내종이 길쌈하고 계집종이 농사짓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며, 어찌 찢어 없애는 것과 같은 화가 있을런지 뉘 알리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공경(公卿)ㆍ재상은 공경ㆍ재상의 직책을 맡고,
근시(近侍)ㆍ대간(臺諫)은 근시ㆍ대간의 직책을 맡으며,
설어(褻御 시종꾼)ㆍ복종(僕從)은 설어ㆍ복종의 직책을 맡고,
부리(府吏)ㆍ서도(胥徒)는 부리ㆍ서도의 직책을 맡아서 각기 제 구실을 다하면,
정사의 질서가 바로 서는 동시에 나라는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다.
만약 설어ㆍ복종이 공경ㆍ재상의 직책을 가로 맡고, 부리ㆍ서도가 근시ㆍ대간의 직책을 가로 맡게 되면, 공경ㆍ재상과 근시ㆍ대간은 제 직책을 못하게 되니, 그 지위를 떠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직책을 넘어서는 행위도 이치에 위배되는 것이니,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클 수 없다. 남화노선(南華老仙 장자(莊子))의 말에, “푸주를 맡은 사람[庖人]이 비록 푸주의 일을 잘못한다 해도, 시축(尸祝 시동(尸童)과 축관(祝官))이 준조(樽俎 음식제조)를 넘어서 가로 맡을 수는 없다.” 하였으니 이것이 지론이다.
최근에 한 모갑(某甲)이 미천한 데서 출세하였는데도 요행을 틈타서 맹부(盟府)에 참예하여 관직이 1품에 오르니, 직책은 대간이 아닌데 대간의 직책을 행하여, 곧잘 소장(疏章)을 아뢰어 인신 공격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그는 소로써 상한 대신을 논하여 입이 마르도록 헐뜯고 곽광(藿光)ㆍ양기(梁冀)에게 비하여 글월을 세 번 네 번 올렸으되, 자못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며 또 상소로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내리 무너뜨려 조정에 온전한 사람이 없으며, 조정을 능멸하고 진신(搢紳)을 편달하는 것을 스스로 잘하는 노릇인양 여기고, 또 상소로 한 근시(近侍)를 논하여 그가 형편없는 소인이란 것을 극구 말함과 동시에, 이임보(李林甫)ㆍ노기(盧杞)ㆍ가사도(賈似道)ㆍ한탁주(韓侘冑)와 같다 하여, 대궐문에 엎드리어 임금을 항거하며 굳이 다투기를 대간보다 더하였다.
나 서거정은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모갑이 어질기도 하고 재주도 있고 글도 한다고 보겠다.
그러나 직책을 넘어서 일을 따지기를 좋아하니, 나는 아무래도 닭이 밤에 울다 제놈이 없어지는 화를 입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서 조정의 사대부가 붕당(朋黨)으로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 하여 죄를 주는데 당에 연좌되고, 권문에 아부하여 사람의 죄목을 구성하여 모함하는 상소를 했다 하여 훈적(勳籍)을 박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직책을 넘은 화이다.” 하였다.
이러므로 군자가 제 직책을 지키는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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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거정(徐居正)의 글로, 각자의 직책과 역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서거정은 소, 말, 닭, 개와 같은 동물들의 직책을 예로 들어 설명하며,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이를 어길 경우 앙화를 받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닭이 새벽에 울지 않고 저녁에 울면 사람들이 놀라서 닭을 없애는 것처럼, 사람도 자신의 직책을 넘어서면 화를 입게 된다고 비유합니다.
이는 사회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로,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질서가 바로 서고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서거정은 또한, 최근에 한 인물이 자신의 직책을 넘어서서 행동하다가 결국 화를 입게 된 사례를 들어, 직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이 글은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개인의 안녕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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