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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설화> / 박규리 詩,

淸潭 2019. 4. 5. 18:50

<치자꽃 설화> / 박규리 ,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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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올랐다가 근처 절집을 찾았습니다.

한껏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자목련이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말없이 이를 쓸고 있는 젊은 승려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산중 깊은 암자일수록 속세와의 연이 더욱 질기게 이어져 있습니다.

세간에서 받은 상처가 깊을수록 더 깊은 산중으로 찾아들지만,

암자로 이어진 아주 작은 오솔길은 제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눈물의 길이지요.


절집의 부엌(공양간)에서 스님들의 공양, 즉 먹을 음식을 만드는 보살을 공양주라고 합니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전북 고창의 한 사찰에서 일했던 공양주입니다.

그저 지켜 본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기록하였는데, 그만 감동을 주는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哀而不悲(애이불비),

슬프기는 하지만 겉으로 슬픔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몸은 절집에 있되 마음은 세상 현실의 상처와 어둠 속을 떠돌고 있는 마음 속 정서가 느껴지면서,

시를 소리 내어 읽노라니 그 아픔에 내 자신도 한없이 가슴 속이 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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