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법문--불교란 무엇인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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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무엇인가?(3)▒
4. 불교의 근본과 특징
이제까지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해서 이야기 해왔읍니다.
이야기가 조금 벗어나지만 종교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란 어떤 종교상의 특징과 무엇을 근본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를 잠깐 살펴봅시다.
물론 불교나 예수교나 회교나 이미 다 알다시피 세계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각기 그 교조의 입장이 다르고 그 내용이 상이(相異)하므로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사뭇 다를 수 밖에는 없겠읍니다.
그러나 각 종교의 입장과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구경목표(究竟目標)는 다 같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서울로 갈 때 북쪽에서 가든지 남쪽에서 가든지
서쪽에서 가든지 동쪽에서 가든지 어디서 가든지 간에
서울이 목표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목표는 공통적 입니다.
그러면 그 공통적인 종교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生滅)의 세계이며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解脫)의 세계이나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근본목표인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것은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않읍니다.
인간의 근본 욕구는 영원한 행복에 있는데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하니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읍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불교의 구경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이 다른 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기신론(起信論)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읍니다.
「일체고(一切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을 얻는다」
(離一切苦하고 得究竟樂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樂)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이니 그것은 곧 상대·
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유한의 세계를 버리고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로 갈려면 서울 가는 이유를 알아야지 무조건하고 서울만 간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니 그 이유를 좀 설명하겠읍니다.
천지만물이 많아서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무생물도 있읍니다.
동물 가운데 사람이 딴 동물과는 모든 면에서 수승(殊勝)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읍니다.
사람이란 살아 있는 물건인데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을 목표로 하고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가나 어느 학자 어느 사람이든지 간에
사람이란 살아 있는 동시에 분명한 살아가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행복에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그 산다는데 있어서 고생되는
조건이 많이 따라 있읍니다. 여러 학자들이 사람의 고생의
내용을 각 방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해 보면 사람이란 실제로
고(苦)의 존재이지 낙(樂)이란 극히 일부분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읍니다.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고해로다」
(三界가 火宅이요 四生이 苦海로다)
삼계, 좁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것이니,
그렇게 고생이 많다는 말이며, 사생(四生),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고(苦)의 바다라는 것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나서 살아있는 동안에 고생만,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이니 그 동안 살다가 혹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어서 인생 전체로 볼 때는 고(苦)는 많고 낙(樂)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데 자살(自殺)할 수도 없고
그냥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살지 않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좀 고생을 덜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느냐 하는 생각은 고생하는 사람이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수 천 년 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만 이 고생하는 중생 가운데서
좀 더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느냐 하여 그 방법을 모색해 왔읍니다.
행복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에 모순으로서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종말이,끝이 있고 맙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은 어떻게 하면 좀 오래 살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느냐는 것을 공상(空想)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
이것이 영원한 행복의 추구라고 볼 수 있읍니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을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으니
절대·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따라서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뜻이라고 말해 왔읍니다.
이 현실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것이 실현될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를
모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교의 천당설(天堂說)입니다.
이 현실 세계란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내에 있어서 영원하고 무한하지 못합니다.
이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뛰고 굴리고 재주를 넘어 보았자 중생이 참으로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읍니다.
그러니만치 이 현실 세계에서는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세계를 찾아
그 곳만이 절대·무한하며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예수교의 천당설입니다.
저 하늘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천당이 있으니 그곳에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니,
그 하늘 나라 천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생명을 누리고 영생하여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여 왔읍니다.
사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는 곳이 있다면 현실 이것을 다 버리고
그 곳으로 가자고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겠읍니까?
아방궁이다 뭐다 해봐야 다 헛 것이니 다 버리고 그곳으로 가자
이것이 각 종교의 시발점(始發點) 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이후부터 인류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지배하였는데 불교는 삼천년, 예수교는 이천년,
바라문교는 사천여년의 세월이 흘러왔읍니다.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천당설을 아무 주저 없이 믿고 따랐는데
차차로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그런 가르침이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큰 신학자들이 나서서 “합리(合理)·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예수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고 했읍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저 유명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불합리(不合理)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고 했읍니다.
그러므로 예수교에 대한 근본이 어디 서있느냐 하면 절대적인 믿음,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절대적인 신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우주 과학시대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맹목적으로
그대로 믿으라 하는 것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 여러 신학사상들이
주장되어 예수교 사상 자체도 전환하고 있지만 근본 교리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읍니다.
그러므로 천당에 계시는 절대 신인 하나님을 내놓고는 예수교를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그 하나님의 힘, 타력(他力)으로써
절대·무한의 세계인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다른 여타의 종교들도 대개 그런 경향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그와는 다릅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무한의 세계를 어느 곳에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이 현실밖에 따로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딴 종교하고 틀리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혹 어떤 때는 타력적인 방편을 쓰는 것도 결국은 자력으로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를 믿으려면 자기에게 그러한 절대·무한의 세계가 갖추어 있다는 것,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 조건입니다.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이나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의 발달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음이 차츰차츰 실증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는 처음과 끝이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인간이 상대적 존재냐 절대적 존재냐 하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개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어서 앞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은 기여를 할 날이 있을 줄 나는 믿습니다.
이 소식을 게송(偈頌)으로 한번 읊으면 이러합니다.
기이하다 내 집의 큰 보배창고여
무한한 신기로운 공이 측량키 어렵네
의지(意地)를 몰록 벗어나 마음 근원을 사무치면
신령한 빛이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는 몸을 비추도다.
奇哉自家大寶藏이여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頓超意地徹心源하면
靈光이 長照不壞身이로다.
이렇게 내 마음 속의 보배 창고를 확실히 믿고 개발하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되는 것 입니다.
※ 주
사생(四生):
1은
태생(胎生)으로서 사람과 같이 모태(母胎)에서
신체를 형성한 후에 출생함을 말하며
2는
난생(卵生)으로서 새와 같이 알의 껍질 속에서
신체를 형성한 후에 출생함을 말하며
3은
습생(濕生)으로서 벌레와 같이 습함에 의해서
신체를 받는 것을 말하며
4는
화생(化生)으로서 의탁하는 곳 없이 오직 업력에 의해서
홀연히 일어나는 것을 말함이니 하늘과 지옥 및 태초의 중생들이 모두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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