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로 왕자와 상아 공주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는 삼한시대가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그것이다. 삼국시대 초기에도 그랬지만 삼한 역시 부족 사회였다. 부족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는데, 마한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에 삼한 사이에는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됐다. 그래서 마한의 왕이 삼한을 대표하는 진왕(辰王)이 되어 느슨한 연합체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한전(韓傳)에는 ‘마한이 가장 강대하며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한다’고 나와 있다. 형식적으로는 진왕 아래 진한과 변한의 왕이 있는 것이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부족국가였기에 모든 활동은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철마다 진왕에게 보내는 공물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진왕은 중국과의 외교 등을 이유로 이러저러한 공물을 자주 요구하였다. 하지만 힘이 약한 진한과 변한에서는 마한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기원 전 1세기 중엽, 마한의 왕에게 다로라는 왕자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목지국 왕이 마한의 왕이었고, 마한의 왕이 삼한의 형식적인 대표인 진왕이 되었기에 다로도 머지않아 진왕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다로는 견문을 쌓기 위해 중국에도 다녀오고 삼한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목지국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충남 천안의 직산이었다. 그러니 다로 왕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지금의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를 여행하는 일이 많았다.
다로가 진한으로 여행을 할 때의 일이었다.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경계지역인 지금의 산청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멀리서 한 무리의 장정들이 외쳤다.
“아가씨! 아가씨! 어디 계세요?”
다로가 무심코 지나치다가 어떤 아가씨와 부딪혔다. 그러자 도리어 그 아가씨가 화를 버럭 냈다.
“아니, 앞을 제대로 보고 다녀야지요!”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다로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아가씨를 휘어잡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 아가씨가 어디서 행패야? 아가씨가 와서 부딪힌 거잖아?”
두 사람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멀리서 장정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다로를 위협하였다. 하지만 다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아가씨가 나서더니 장정들을 말렸다.
“물러서세요. 제가 잘못한 것이니까.”
그러자 장정들이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아가씨는 진한의 공주인 상아였다. 상아 공주 역시 심심했는지 삼한의 경계지역이자 가장 장시(場市)가 활발하게 열려 사람들로 북적대는 산청으로 나들이를 왔던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다로 왕자와 상아 공주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물론 다로 왕자는 자신이 목지국 왕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며칠 뒤 다로도 목지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상아 공주 역시 부왕이 있는 진한으로 돌아가야 했다. 상아 공주가 처음으로 다로 왕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 사세요?”
지금까지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려 하니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다로 왕자 역시 드물게 명랑한 상아 공주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후일을 기약하고 아쉬운 이별을 한 두 사람은 돌아가서도 내내 서로를 그리워하였다. 다로 왕자는 부왕에게 아뢰어 진한의 상아 공주와 혼인하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즈음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상아 공주 역시 부왕께 말씀드리고 마한의 다로 왕자와 혼인을 시켜달라고 조르고 싶었다.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목지국으로 다로 왕자를 찾아갈 각오까지 하였다. 그래서 단단히 결심을 사고는 부왕을 찾아갔다. 그런데 부왕의 집무실에는 이미 많은 신하들이 함께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심각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서지도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 시각, 진한 왕의 집무실에서는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마한에서 진한을 노리고 대규모 군대를 보낸다는 첩보가 들어왔던 것이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먹고 살기도 힘든데 마한에서 계속 공물을 올려 달라고 하여 거부하였더니 마한에서 쳐들어온다는 첩보를 흘린 것이다.
진한 조정에서는 맞서 싸우자는 강경파와 항복을 하자는 온건파가 대립을 하였다. 죽더라도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신하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싸우다가 다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필요하다는 신하들도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신하 가운데 가장 원로가 제안하였다.
“왕이시여. 당장 맞서 싸우는 것도, 그렇다고 항복을 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지리산으로 일단 피신을 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요?”
원로의 이야기를 들은 왕 또한 그 방법이 좋다고 생각하여 진한 조정에서는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아 공주가 부왕에게 이야기하려고 다시 부왕을 찾았는데,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부왕은 상아 공주에게 짐을 꾸리라고 이야기하였다.
“아바마마, 무슨 일이에요? 피신이라니요.”
“마한에서 쳐들어온다는구나. 빨리 피신을 해야 하니 더 이상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상아 공주는 앞이 캄캄해졌다. 다로 왕자와 혼인을 시켜달라고 부탁을 드리려 했는데, 다른 곳도 아닌 마한에서 쳐들어온다니...
“아바마마. 제가 한번 나서보면 안 될까요? 전쟁을 피할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시간이 없다. 어서 서둘러라!”
그리하여 상아 공주는 말 한 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부왕을 따라 지리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지리산 깊은 곳으로 피신한 진한의 조정에서는 서둘러 임시 궁궐을 지었다. 궁궐의 이름은 달궁이라 지었다. 비록 피신을 하여 허름하게 지은 임시 궁궐이기는 하지만 달처럼 예쁘다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달궁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진한 왕은 방어막을 치기로 하였다. 비록 지리산 심원에 있는 달궁이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적을 방어하기에 천혜의 요새였지만 상대가 막강한 마한 군대인지라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 10리 밖에 있는 고개(嶺)에 정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배치하였고, 동쪽 20리 밖에는 황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배치하였다. 또한 남쪽 20리 밖의 고개마루에는 성이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였고, 북쪽 30리 밖의 높은 고개에는 8명의 젊은 장군을 배치해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지리산에 있는 각각의 고개를 정령재, 황령재, 성삼재, 팔랑재 등으로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달궁은 이름만 전해 내려올 뿐 옛 궁궐터는 찾아볼 수 없다.
마한 목지국에서는 수십 명의 신하들이 모여 분주하게 이것저것 토의를 하고 있었다. 진한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다가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진한 궁궐에서 지리산으로 피해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는 말도 들려 어쩔 수 없이 진한을 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국가의 기틀이 잡힌 삼국시대 때만 해도 정규군이 있었지만 부족 연합체인 삼한시대에는 각 씨족과 부족에 연락하여 군사를 모으는 것도 일이었다.
마한에만 목지국을 비롯하여 54개의 소국이 있었으니 연락을 취하는 데도 한 달 가까이 걸렸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려면 군량미도 풍부해야 하기 때문에 각 씨족과 부족에 군량미를 할당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은 더욱 큰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쟁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다로 왕자가 부왕에게 고하였다.
“아바마마, 꼭 진한을 공격해야겠습니까? 제가 사신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하면 안 될까요?”
다로 왕자 역시 부왕에게 상아 공주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 일보 직전이 되자 다급하여 자신이 사신으로 간다고 말한 것이다.
세력으로는 훨씬 강하지만 공격을 하려면 상대보다 세 배의 전력이 있어야 하는데다 잦은 흉년으로 다들 먹고 살기도 힘들기 때문에 사실 전쟁을 치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진한에서 뭐라 반응이 오면 적당히 들어주려 하였는데 아예 반응이 없으니 마한에서도 어쩔 수 없이 공격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내심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네가 무슨 수로 문제를 해결한단 말이냐.”
“제가 삼한 땅을 여러 차례 여행을 했기에 진한에도 나름대로 인맥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잘 설득하면 서로 좋은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린 왕자가 못 미더우면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왕은 못이기는 척하고 왕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수소문을 한 끝에 다로 왕자는 진한 조정이 피신해 있다는 달궁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다로 왕자는 달궁 근처도 못가서 젊은 장군 여덟 명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목지국의 왕자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진왕이 자신의 아들을 사신으로 보낼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이 목을 벱시다! 첩자가 분명하다니까요?”
성질 급한 장군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치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젊은 장군 가운데 한 명이 다로 왕자를 찬찬히 보더니 다가와서 물었다.
“혹시 그대는 얼마 전 산청 장시에서 만난 도령이 아니오?”
다로 왕자가 그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장시에서 상아 공주를 만날 때 본 적이 있는 장수였다.
그리하여 다로 왕자는 달궁으로 가서 진한 왕을 만나게 되었다. 다로 왕자가 사신으로 왔다는 말에 상아 공주가 먼발치서 지켜보았다.
“그래, 사신으로 왔다면 마한의 제안은 무엇인가?”
“저희들의 제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야? 그럼 뭐 하러 이곳까지 왔느냐?”
진한 왕이 노여워하자 다로 왕자가 서둘러 이야기하였다.
“왕이시여. 단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아니, 정체도 모르는 사람과 왕이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전에도 우리 진한 땅에 몰래 잠입한 적이 있다 하는데, 필시 첩자가 분명합니다. 당장 목을 베어야 합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상아 공주가 나섰다. “아바마마, 제가 만난 적이 있는데 목지국의 왕자가 분명합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아 공주의 말에 따라 진한 왕과 다로 왕자를 남겨두고 신하들은 물론 상아 공주도 물러났다. 잠시 뜸을 들이던 다로 왕자가 말했다.
“사실 전쟁을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희 부왕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명분이 없다보니 불필요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한단 말이오.”
“중국에 보낼 공물이 많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장 공물을 올리는 것이 힘들다면 몇 년 정도 유예를 한 후에 올려준다고 하고 나중 일은 나중에 해결하시면 어떨까요?”
“그 말을 그대 부왕이 믿겠소?”
“부왕께서는 제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편입니다. 다만 신하들이 문제이지요. 그러니 더욱 확실한 약속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이오.”
“상아 공주를 저에게 주십시오. 제가 상아 공주와 혼인을 한다면 다들 믿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한 왕이 들어보니 그럴싸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공주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혼사를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잠시 공주와 의논을 해볼 테니 그대는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하시오.”
그리고는 진한 왕이 상아 공주에게 가서 물었다. 하지만 공주는 부왕이 묻자마자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곧바로 부왕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하여 전쟁 직전까지 갔던 마한과 진한 사이에는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다로 왕자는 훗날 진왕이 되었고 상아공주는 진왕의 왕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짓자마자 쓸모가 없게 된 달궁은 폐허가 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이름만 전해 내려올 뿐 옛 궁궐터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정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서쪽 고개를 정령재, 황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동쪽 고개를 황령재, 세 명의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남쪽 고개를 성삼재, 여덟 명의 젊은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북쪽 고개를 팔랑재라 부른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서산대사의 기록 등을 토대로 달궁이 마한 왕의 별궁으로, 진한과 변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궁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세력이 훨씬 컸던 마한에서 진한과 변한의 공격에 대비하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이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출처] 다로 왕자와 상아 공주|작성자 월간 설화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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