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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밭 언덕에 평상을 옮겨 놓고 누워서

淸潭 2016. 8. 17. 10:39

조선 성종 때의 문신. 학자(1439~1504). 성현(成俔) ()

용재총화(慵齋叢話) 3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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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성(鐵城 철성 부원군은 최영을 작봉한 것임) 최영(崔瑩)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보기를 흙같이 하라(見金如土).”라고 가르쳤으므로,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띠[]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녀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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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國政)을 잡아 위신이 중외에 떨쳤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고 겨우 먹고 사는 데 족할 따름이었다.

당시의 재상들은 시로 초대하여 바둑으로 날을 보내면서 다투어 성찬(盛饌)을 차려 호사함에 힘썼으나, 공만은 손님을 초대하여 한낮이 지나도록 찬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기장과 쌀을 섞어서 지은 밥에다 잡동사니 나물을 차렸지만, 손님들은 배고픈 참이라 채반(菜飯)이라도 남김없이 먹고는,

철성 집 밥이 맛이 좋다.” 하니, 공은 웃으며,

이것도 용병(用兵)하는 술모(術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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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시중(侍中)이 되었을 때에 점련(占聯)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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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척 칼머리에 사직이 편하고나 / 三尺劍頭安社稷

하니, 당시의 문사들은 아무도 대구를 짓지 못했는데, 공이 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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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닥 채찍 끝으로 천지가 안정된다 / 一條鞭末定乾坤

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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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항상 임렴(林廉=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의 소행을 분하게 여겨 그의 종족을 모두 죽였는데, 공이 형()을 받으면서,

평생 동안 나쁜 짓 한 일이 없는데, 다만 임렴을 죽인 것이 지나쳤다.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무덤은 고양군(高揚郡)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한줌의 잔디도 없는 벌거벗은 무덤이라, 흔히들 홍분(紅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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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圃隱)은 학문이 정수(精粹)하고 문장도 호한(浩瀚=넓고 커서 질펀함)하였다. 고려 말에 시중(侍中)이 되어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돕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혁명에 즈음하여 천명(天命)과 인심이 모두 추대하는 곳이 있었건만 공만 홀로 의연(毅然)히 범하지 못할 기색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서로 잘 아는 중이 있었는데, 공에게 말하기를,

시사(時事)를 알만한데, 공은 어찌 고집만 하고 고생하는가.” 하니, 공은

사직을 맡은 사람이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처신할 바가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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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매헌(梅軒 =권우.權遇의 호)이 뵈러 갔는데 마침 공이 나왔다. 공을 따라 동리를 나오는데, 화살 통을 짊어진 무사 수명이 말 앞을 가로질러 가니, 아졸(呵卒)이 벽제(辟除) 소리를 질렀으나 무사는 피하지 않았다.

이때 공이 매헌을 보고,

그대는 속히 가라. 나를 따르지 말라.” 하였으나,

매헌이 그대로 따라가니 공이 갑자기 노하여,

어찌 내 말을 듣지 않는가.” 하므로, 매헌이 부득이 작별하고 돌아왔는데 조금 있다가 누가 와서, “정 시중이 살해당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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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吉再) 선생은 고려가 멸망함을 통탄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의 벼슬을 던지고 선산(善山) 금오산(金鰲山) 밑에 살면서 본조에서는 벼슬하지 않기로 맹서하였는데, 본조에서는 예로써 대하였으나 역시 그 뜻을 빼앗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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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군()의 여러 생도를 모아 두 재()로 나누었는데, 양반의 후손들을 상재(上齋)로 삼고, 마을의 천한 가문의 아이들을 하재(下齋)로 삼아, ()()를 가르치고 근()()를 시험하는데 하루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백 수십 명이었다. 공이 일찍이 한거시(閑居詩)를 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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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맑은 샘물에 낮을 씻고 / 盥手淸泉冷

무성한 나무에 몸을 비긴다 / 臨身茂樹高

관자동자가 찾아와 글자를 물으니 / 冠童來問字

이럭저럭 더불어 소요함도 좋구나 / 聊可與逍遙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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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 초가에 혼자서 한가로이 / 臨溪茅屋獨閑居

달 밝고 바람 맑아 흥겹고나 / 月白風淸興有餘

바깥 손님 안 오니 산새와 벗하고 / 外客不來山鳥語

대밭 언덕에 평상을 옮겨 놓고 누워서 책을 본다 / 移床竹塢臥看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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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梅軒= 권우.權遇의 호)이 공의 화상찬(畫像贊)을 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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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도가 있으나 / 人固有道

뛰어난 사람은 드물다 / 挺生者稀

오직 우리 길공만은 / 惟我吉公

그와 거의 가깝다 / 其殆庶幾

높은 문관의 벼슬과 / 珪組之榮

장수의 위세를 / 斧鉞之威

뜬구름같이 보고 / 視如浮雲

은거하니 / 高蹈而歸

뽕나무와 재나무(고향땅) 열 이랑에 / 桑梓十畝

초가집과 사릿문이라 / 茅屋柴扉

책 쌓인 방 한 칸에 / 圖書一室

높은 갓과 넓은 옷이로다 / 嵬冠褒衣

, 주 나라 덕이 하늘과 같아 / 噫周德之如天兮

서산(西山= 수양산)의 채미(採薇= 고사리등)를 묻지 않았었고 / 不問西山之採薇

한조가 중흥(中興 후한 광무제의 즉위를 말함)함에도 / 曁漢祖之中興兮

역시 양구(羊裘= 벼슬을 사양함)를 낚싯터에 놓아 두었도다 / 亦放羊裘於釣磯

천여 년을 지난 오늘까지도 / 迄今千餘載兮

이 마음이 이치에는 어긋남이 없도다 / 信此心此理之無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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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忠宣王)은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어서 정든 사람이 있었더니, 귀국하게 되자 정인(情人)이 쫓아오므로 임금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이별의 정표로 하였다.

밤낮으로 임금이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를 시켜 다시 가서 보게 하였다. 이익재가 가보니 여자는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 한 수를 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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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 贈送蓮花片

처음엔 분명하게도 붉더니 / 初來的的紅

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 / 辭枝今幾日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 憔悴與人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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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가 돌아와서,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데 찾아도 없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이 크게 뉘우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해의 경수절(慶壽節 왕의 생일)에 이익재가 술잔을 올리고는 뜰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연유를 물으므로 이익재는 그 시를 올리고 그때 일을 말했다.

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만약 그날 이 시를 보았더라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돌아갔을 것인데,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