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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천성(德器天成)

淸潭 2016. 6. 14. 10:51

덕기천성(德器天成)

[요약] (: 덕 덕. : 그릇 기. : 하늘 천. : 이룰 성)

어질고 너그러운 도량과 재능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대단한 인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

 

[내용] 경남일보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의 덕기천성(德器天成)을 재구성함.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이다. 학문만 대단한 것이 아니고 인품도 대단했다.

예안향교에서 공부했다. 선생은 운부군옥(韻府群玉)’이라는 귀한 책 한 질(: 여러 권으로 된 한 세트)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송나라 음시부(陰時夫)란 사람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전서였다. 모두 2010책으로 돼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초기부터 여러 번 간행해 낸 적이 있었다.

같이 공부하는 유생 가운데 다른 사람도 한 질을 갖고 있었는데, 한 권이 빠져 있었다. 여러 권으로 된 책인데, 한 권이 없으면 무척 아쉬운 법이다. 퇴계 선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책을 슬쩍 훔쳐 자기 책을 채워놓았다. 선생은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선생이 어느 날 종이를 마름해 공책을 만들고 있었다. 같은 방을 쓰던 유생이

공책을 만들어 무엇 하는 데 쓸 것이냐?”고 물었다. 선생은

내가 갖고 있는 운부군옥이 본래 전부 10권인데, 한 권이 없어 향교에 소장돼 있는 것을 빌려 베껴서 채우려고 만든 것이네라고 대답했다. 그 유생이

내가 늘 보아 왔는데, 자네 책은 한 권도 빠지지 않았는데?”라고 의아해했다. 선생이 웃으면서

내가 어찌 내 책을 모르겠나? 자네가 잘못 봐서 그렇지, 내 책은 원래 한 권이 빠져 있었다네.”라고 대답했다.

만약 퇴계가 책을 잃어버렸다고 향교 관리자에게 신고했다면 퇴계는 책은 찾았겠지만 그 유생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절도범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아마 퇴계의 이런 처신을 보고 그 사람도 감복(感服)해 다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이 말 없는 가운데 행동으로 보여준 교화(敎化)였다.

논어(論語)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실행되고, 그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其身正,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는 구절이 있다. 부모나 윗사람이 몸으로 바른 행동을 하면 자식이나 아랫사람이 보고 따르지만, 부모나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면서 명령하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법에 의해서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니고, 행동으로써 감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 교육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낮춰보는 의식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있다. 우리 민족은 우리 자체의 성인(聖人)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대 인물 가운데 퇴계선생 같은 분은 충분히 성인의 반열에 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 것을 높일 때 외국인도 우리 것을 높일 줄 아는 것이다.

퇴계가 병이 위독하니 문생들을 불러 영결하려고 하므로 자제들이 말리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생(死生)의 즈음에 보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명하여 상의를 몸 위에 입히게 하고 여러 문생에게 말하기를,

평일에 나의 하찮은 견해를 가지고 제군들과 강론한 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였다. 죽던 날 아침에 시자(侍者)를 시켜 분매(盆梅)에 물을 주게 하고, 저녁에 누웠던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하여 일으켜 앉히게 하고선 조용히 숨졌다. 융경(隆慶) 경오년 128일이었다.

[添]○ 퇴계가 본시 은퇴할 뜻이 있었으니, 비록 여러 대의 조정의 은혜를 입어서 벼슬이 높은 품계에 이르렀으나 그 본의가 아니었다. 일찍이 아들 준()에게 부탁하되, 무덤 앞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 하였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듣고 씩 웃으며 말하기를,

퇴계는 이 칭호에 마땅하지 못하다. 나 같은 이도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하였다.

 

퇴계가 스스로 지은 묘명(墓銘),

 

나서부터 매우 어리석고 / 生而大癡
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즐겼으며 / 中何嗜學
만년에는 어찌 관직을 외람되이 얻었는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막연하고 / 學求猶邈
벼슬은 사퇴할수록 더욱 걸려 들었네 / 爵辭猶嬰
나가다가 자빠지고 / 進行之路
물러나 감추기를 굳게 하였네 / 退藏之貞
임금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慚國恩
오로지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했네 / 亶畏聖言
산은 높디 높고 / 有山嶷嶷
물은 줄줄 흐르네 / 有水源源
벼슬 버리고 돌아와 소요하여 / 婆娑初服
여러 사람의 비방을 벗어 났네 / 脫略衆訕
나의 회포는 막혔는데 / 我懷伊阻
나의 패물을 누가 구경 하리 / 我佩誰玩
내 옛사람 생각하니 / 我思古人
참으로 내 마음의 편안함을 얻었네 / 實獲我心
어찌 알리 후세의 사람들이 / 寧知來世
오늘의 내 마음 모를 줄을 / 不獲今兮
근심하는 중에 즐거움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중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 구하리 / 復何求兮

 

고봉(高峯) 기명언(奇明彦 기대승의 자())이 퇴계의 묘지를 지었으니, 이러하다.

선생의 휘는 황()이요, 자는 경호(景浩). 예안(禮安)에 살았고 선대는 진보(眞寶)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70에 한가로이 은거하였다. ! 선생은 벼슬이 높았으나 스스로 구한 것 아니요, 학문에 힘썼으나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머리 숙여 부지런히 하여 거의 허물이 없었다. 옛적 선현과 비교하니 누구와 낫고 못한가. 산이 평지 되고, 돌이 썩는다 하더라도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함께 오래 갈 것을 나는 아노라. 선생의 옷과 신발이 이 언덕에 묻혀 있으니, 천추만세에 혹시라도 짓밟음이 없을지어다.”

동각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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