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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불피사(忠不避死)

淸潭 2016. 6. 13. 10:32

충불피사(忠不避死)
[요약] (:충성 충, :아니 불, :피할 피, :죽을 사)


충절은 죽음도 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선조 때의 충신 고종후의 삼부자가 왜적을 무찌르려다 모두 순절한 고사에서 유래. 충성의 위대함을 이름.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내용고종후(高從厚.1554~1593)는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사람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큰아들이다. 그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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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나이가 60이 넘어 노쇠한 고경명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비록 늙었으나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라의 녹을 많이 먹은 사람이니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때다. 그래서 의병을 모집하여 주상(主上)의 뒤를 따르고자 한다.”
  그의 말 속에는 분연한 기개가 넘쳤다. 고종후가 말했다.
  “, 아버지. 저도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둘째 아들 인후(因厚)도 따라나섰다.
  “형님, 저도 아버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고경명은 친구 유팽로(柳彭老)와 협동하여 천 명이 넘는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싸움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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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이 급히 외치기를, “방어사(관군)의 진이 무너졌다.”하니, 의병도 역시 따라서 무너져 형세가 마치 거센 물결에 밀리듯 하여 도저히 제지시킬 도리가 없었다.

(고인후)이 탄 말이 마침 가시덤불에 걸려 거꾸러지므로 공이 말고삐를 당기어 일으키려 하는데, 수종하던 종[]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이 뒤에서 말을 채찍질하여 빨리 몰며 말하기를,

영공(令公)께서는 여기를 떠나 벌써 멀리 가셨을 것입니다.”하므로, 드디어 급히 말을 달려 거의 삼십 리를 가서야 비로소 충렬공(고경명)이 학유(學諭= 동생인후)와 함께 진중에서 순절(殉節)한 사실을 알고서, 말에서 떨어져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정신이 들자 맨손으로 적진에 나아가 죽으려고 하니, 좌우에서 공을 껴안고 말리며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저 죽기만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더구나 선 영공(先令公)의 체백(體魄)이 바야흐로 쌓인 시체 속에 있는데, 지금 공마저 죽는다면 누가 수습하여 염습하겠습니까?”하였다.

공이 드디어 적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도보로 전장(戰場)에 들어가 충렬공의 유체(遺體) 찾아내어 몰래 금산(錦山) 산중에 묻었다가, 8월에 사람을 모아 다시 가서 충렬공과 학유(學諭)의 시체를 찾아 가지고 와서 비로소 관()을 마련하여 초빈을 하였다. 그리고서 밤낮으로 통곡하며 말하기를,

부자 형제가 위급함을 만나 서로 잃어버리고 나 홀로 살아 있으니, 이야말로 천지간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나선단 말인가?”하였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공은 곧 의병에 종사하려고 하니, 대부인(大夫人)이 울며 말리기를, “네 아버지와 네 아우가 모두 죽었는데, 너 마저 또 죽는다면 나는 죽지 못한 남은 목숨이 장차 누구와 더불어 살아가란 말이냐? 내가 먼저 자결하는 것이 옳지 또다시 네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였다.

공이 이때를 당하여 의병을 따르려고 하니 대부인의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렵고, 대부인의 명령에 복종하려 하니 또 비상에 대비하는 군사의 의리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마침내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낮이면 해를 보지 아니하고, 밤이면 등불을 켜지 않으며 미음(米飮)도 거의 입에 대지 아니하여 기식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 이때 대부인이 울며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의 의기를 중지시킨 것은 본시 네가 살아 있기를 바라서 그런 것인데, 지금 네가 병이 들어 장차 죽게 되었으니, 기왕 죽을 바에야 차라리 네 뜻을 따르겠다.”하므로, 공이 곧 일어나 죽을 먹고서 원수(元帥)에게 나아가 청하여 본도에 있는 사노(寺奴)들을 거느리기로 허락을 받아, 드디어 원근 각처에 격문을 띄워 군사와 군량을 모아서 정자(正字) 조수준(趙守準)을 계원장(繼援將)으로 삼았으며, 또 체부(體府)에 보고하여 본 고을의 중[] 해정(解政)을 유격장(遊擊將)으로 삼고, 김인혼(金獜渾)과 고경신(高敬身) 등을 군관(軍官)으로 삼은 다음, 군사를 일으킨 날에 복수 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스스로 호칭하여 오비(吳玭)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부장(部將) 오유(吳宥)를 부장(副將)을 삼았으며, 봉이와 귀인 등도 역시 종군하게 하였다.

고경형(高敬兄)이란 이는 충렬공의 서제(庶弟)인데, 역시 편비(偏裨)로 따라갈 것을 자원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나에게 병든 어머니와 어린 아우가 있는데 구호해 줄 사람이 없으니, ()은 따라가지 말기를 바랍니다.”하니, 고경형이 말하기를,

형제의 원수는 병()을 돌이키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하고,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따라오므로 공은 다시 말리지 아니하였다.

출병하던 날에 대부인에게 두 번 절하며 눈물로 하직을 고하였다. 그리고 문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말에서 내려서 막내아우의 손목을 잡고 말하기를,

오늘 어머님과 영결(永訣)하느라 너에게 일과로 배울 책을 주는 것을 잊었다.”하고, 조용히 내주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사람이 될 수 없으니, 너는 부디 힘써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니, 듣는 자가 탄식하며 모두 눈물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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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후는 스스로 나서서 의병을 진두지휘하면서 길을 바꾸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부대가 하동에 이르렀을 때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진주성(晋州城)으로 갔다.
  그들이 진주성에 들어간 날은 성이 왜군에게 포위된 지 9일째 되는 날이었다. 피로에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진주성으로 들어가 최선을 대해 싸웠으나 장수 황진(黃進), 김준민(金俊民), 정상윤 등이 속속 죽어 가자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진주목사마저 도망쳐 버려 왜병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고종후는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으나 워낙 중과부적이어서 사로잡힐 위기에 몰리자.

북향해 재배한 뒤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했는데, 이들 세 사람을 삼장사(三壯士)’라고 불렀다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국조인물고] 공이 순절(殉節)할 적에 무사(武士) 한 사람이 곁에 있다가 공이 강물에 뛰어들려는 것을 보고 울며 간청하기를, “제가 수영에 익숙하니 공을 업고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금산에서 죽지 못한 것이 한인데, 지금 살길을 찾겠느냐? 네가 만일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면 우리 집에 가서 오늘 일을 말해 달라.”하였다. 무사는 바로 공의 이웃 사람이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매양 이 일을 말할 적이면 목이 메어 말을 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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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훗날, 나라를 구하려다가 목숨을 바친 공로가 인정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 첨삭하여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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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최영훈의 법과 사람]

임란 때 순절한 의병장 고경명 3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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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하루 전인 5, 한나절에 세 번 눈시울을 붉혔다. 임란 때 전라도 의병대장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15331592) 선생의 대종가(大宗家)를 방문했을 때다.

제봉은 임란 때 치열했던 금산전투에서 순절(殉節)했다. 빼어난 시문으로 명나라에까지 이름이 났던 문인이다. 1558(명종 13)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요즘 말로 고시 수석합격이다. 울산 영암 한산 서산 순창군수를 거쳐 임란 한 해 전 동래부사를 끝으로 낙향했다.

노년의 제봉은 왜적의 침략으로 선조가 의주로 파천(播遷)했다는 소식에 분연히 일어섰다. 59세로 건강이 온전치 않았지만 격문을 돌려 의병 6000명을 모았다. 유팽로 안영 양대박을 종사관으로 삼고 출사표를 조정에 보냈다. 도성을 떠나는 선조에게 돌팔매가 날아왔지만 제봉은 근왕(勤王)을 다짐했다

그는 아들 인후에게 무주, 진안에 복병 수백 명을 배치해 왜적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그 후 진을 옮겨 장남 종후, 차남 인후와 합류한 뒤 호서, 경기, 해서 지역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보냈다. 이 무렵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호남 총공세를 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봉은 호서 의병장 조헌에게 왜적 토벌을 제의했다. 그러나 조헌은 청주 공략에 바빠 참전을 못한다. 제봉은 전라도 방어 관군과 함께 왜적이 주둔한 금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1만 명 넘는 왜적의 저항과 관군의 무능함으로 일진일퇴만 거듭했다. 왜적은 취약한 관군부터 무너뜨린 뒤 의병부대를 기습했다.  

그때 제봉과 차남 인후 등 수많은 의병이 목숨을 잃는다. 비록 패했지만 의병들의 피어린 분투로 왜적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곡창 전라도를 왜적이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충무공의 수군(水軍)이 해전에서 연승할 수 있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말이 생각난다

치열한 금산전투에서 장남 종후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40여 일 뒤 간신히 수습하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복수(復讐) 의병장으로 칭한다. 진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김천일 등과 함께 왜적을 상대로 9일간 사투를 벌이다 전세가 기울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3부자가 한 전쟁에서 순국(殉國)한 사례는 세계 전사(戰史)에 없다. 3부자는 과거에 급제한 문인들이다. 15세 막내도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터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제봉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거라라며 자신의 시문집을 잘 보관할 것을 당부한 뒤 막내를 돌려보냈다. 출가한 장녀는 몇 년 뒤 정유재란 때 남편이 왜적의 칼에 전사하자 장검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막내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뒤 선생이 남긴 유고 문집을 편찬했다. 여기엔 달리는 말 위에서 초를 잡은 마상격문(馬上檄文)’도 있다. 각 도의 수령과 백성, 군인에게 보낸 격문은 많은 의병들이 선생의 휘하에 모이게 만든 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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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대종가 고택 벽에는 세독충정(世篤忠貞)’이라는 휘호가 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선생의 좌우명이다. 고결한 성품의 선생이 당대의 문장가라는 사실, 명색이 글쓰기로 30년 밥벌이를 한 내가 까맣게 몰랐다. 참으로 낯이 뜨거웠다.

호국의 달인 6, 고경명 선생과 같은 호국선열을 기리는 현창(顯彰) 사업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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