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청풍(百世淸風)
[요약] (百: 일백 백. 世: 대 세. 淸: 맑을 청. 風: 바람 풍)
영원한 세월에 걸친 맑은 바람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일컬음.
[출전] 《주자(朱子)》
[내용] 경남신문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백세청풍(百世淸風) 글
함안 가야읍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가다가 군북읍을 조금 지나 원북(院北) 마을에 이르기 전의 남쪽 절벽에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개의 한자가 해서체(楷書體)로 크게 바위에 새겨져 있다.
사진출처;http://eyoone.blog.me/150114605304
이 글씨는 본래 주자(朱子)가 쓴 글씨인데, 중국 요동(遼東) 수양산(首陽山) 기슭의 백이(伯夷) 숙제(叔齊) 사당에 걸려 있던 것이다. 1589년 부친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중국에 사신 가는 길에 따라갔던 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이 모사해 온 뒤로 해주(海州)의 수양산(首陽山) 등 전국에 퍼진 것이다. 정윤목의 집안에 전하던 글씨 현액은 지금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돼 있다.
이곳에 ‘백세청풍’이란 이 글씨를 새긴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세조(世祖)가 조카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 더럽게 여겨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와 평생을 깨끗하게 살다 간 어계(漁溪) 조려(趙旅)선생의 절의(節義)를 기리기 위해서다.
조려(趙旅: 1420~1489)는 자가 주옹(主翁), 본관이 함안(咸安), 호가 어계, 시호가 정절(貞節)이다. 1453년(단종1)에 성균관 진사가 되어 사림의 명망이 높았으나,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성균관에 있다가 고향 함양(咸陽)으로 돌아와서 서산(西山) 아래에 은둔하며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다.
[服藥求長年, 孰如孤竹子. 一食西山薇, 萬古猶不死.]”
어계는 단종에게 꼭 절의를 지켜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조카를 죽이는 임금, 세종에게 단종을 잘 보필하겠다고 약속했다가 단종을 죽이라고 상소를 여러 번 하는 등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관료들과 함께 벼슬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어계는 이름 없는 시골 선비에 불과했다. 별다른 행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아 전하고 그의 절의정신은 후세에 충절(忠節)을 숭상하는 수많은 인물을 만들어 냈다.
그가 세조 아래서 고위관직을 지냈다면 후세 사람들의 영원한 스승이 되어 역사에 이렇게 이름이 남을 수 있고 후세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겠는가?
현세의 영달을 추구하면 육신의 수명이 끝나는 순간 그 이름도 사라지지만, 절의를 지키면 영원히 훌륭한 이름이 남을 수 있다. 백이 숙제와 어계선생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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