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취각설(尖嘴刻舌)
[요약] (尖: 뾰족할 첨. 嘴: 부리 취. 刻: 새길 각. 舌: 혀 설)
날카로운 주둥이에 각박한 혀라는 뜻으로, 날카롭고 야박한 말투를 말함. 다른 사람에게 야박한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
[문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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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 명종 때 상진(尙震; 1493~1564))이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보면,
“상진은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 또 아버지를 잃어서, 매부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 집에서 자랐다. 나이 열다섯이 지나도록 호탕하여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말달리고 활쏘기만 하였는데, 동배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곧 학업에 뜻을 두어 분발하니, 다 섣달 만에 글 뜻을 통하고 열 달 만에 문리에 막힘이 없었다. 몽정이 공의 뜻을 보고자 음사(蔭仕 과거에 의하지 않고 부조(父祖)의 공으로 얻는 벼슬)할 것을 권하니, ‘대장부는 마땅히 글을 읽어 공업을 세워야 할 뿐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좋은 집안에 이름난 조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처신으로 명정승의 반열에 올랐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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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양(金時讓;1581년 ~ 1643년)의 인물평론집이라 할 수 있는 부계기문(涪溪記聞)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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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공(成安公) 상진(尙震)은 검열(檢閱)에서 파직되어 돌아가는 길에 금천(衿川)의 언덕 위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어떤 노인이 두 마리 소를 먹이고 있으므로 공이 물었다.
“두 마리 중에 어떤 소가 더 좋은가?”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세 번 물어도 끝내 대답이 없으므로, 공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말에 올랐을 때에 노인이 수십 보를 뒤따라와서 비밀히 공에게 대답하기를,
“아까 묻는 것을 즉시 대답해 올리지 못한 것은 두 소가 노역(勞役)에 종사한 지가 여러 해가 되어 차마 하나를 지적하여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작은 소가 더 좋습니다(卽未奉對者。緣二牛服役歲久。不忍斥言故也。其實小者爲優).”
라고 하였다. 공은 말에서 내려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노인께서는 숨은 군자(君子)이십니다. 나에게 처세법(處世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翁是隱君子也。其敎我以處世法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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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처음 벼슬에 나간 때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남에게 거스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遂服膺而勿失。自筮仕至懸車。未嘗忤於人云). *상진의 시호가 성안이다.
**) --> 축심동인(畜心同人) 참조
상 정승은 모든 면에서 늘 관대하게 사람을 대했고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같이 벼슬하던 판서(判書) 오상(吳祥)이 어느 날,
“복희 임금 때의 즐거운 풍속은 지금 쓴 듯이 없어졌나니, 단지 봄바람 한 잔 술 사이에만 있네(羲皇樂俗今如掃, 只在春風杯酒間)”라고 시를 지었다. 그러자 상 정승이 보더니 “말이 어찌 그리 각박하시오?” 하고는
“복희 임금 때의 즐거운 풍속이 지금도 아직 남아 있나니, 봄바람 한 잔 술 사이를 보시오(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杯酒間)”라고 고쳐 주었다.
거의 같은 뜻이지만, 오 판서의 시는 부정적이고 각박한 데 비해서 상 정승의 시는 긍정적이면서 푸근한 데가 있다. 조금의 표현 차이가 이렇게 다른 것이다.
그 당시 사주(四柱)를 잘 보는 홍계관(洪繼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상 정승이 젊을 때 그에게서 사주를 보았는데, 사망 연월일까지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홍계관이 누구의 사주를 예언해 틀린 적이 없었다.
상 정승도 수의(壽衣)를 준비해 두고, 숨을 거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 일 없이 그날이 지나갔다. 그래서 홍계관을 찾아가
“올해 며 칠날 내가 죽을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이 지나가니 어찌 된 일이요?”라고 물었더니, 홍계관이
“음덕(陰德)을 쌓으면 수명이 연장되는 수가 있습니다.”고 답해 주었다.
상 정승이 “혹 그럴지 모르지. 옛날에 대궐에서 임금님 수라 준비하는 일을 하던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자기 집 혼사에 쓰려고 임금님이 쓰시던 금 그릇 몇 벌을 몰래 가져 나오다가 어디 놓고 간 적이 있었는데, 내가 지키고 기다리니 그 별감이 와서 다시 찾아간 적이 있지요. 죽을 목숨 살려 주었다고 백 번 절을 하고 갔지요”라고 이야기하자, 홍계관이
“공께서 사주보다 더 오래 사시는 것은 그 일 때문일 겁니다.”고 했다.
공은 그 후 15년 뒤에 죽었다.
임종에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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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야에서 몸을 일으켜 / 起自草萊
세 번 정승에 올랐네 / 三入相府
느지막이 거문고 배워 / 晩而學琴
항상 감군은 한 곡만 타네 / 常彈感君恩一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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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72세에 정침에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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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관(洪繼寬) : 조선 세종~성종 때의 맹인 점술인이다. 홍계관(洪啓寬)이라고도 하는데, 그의 이름을 딴 홍계관리라는 마을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범허정집》, 《부계기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점을 쳐서 홍윤성(洪允成), 상진 등의 운명을 맞힌 일화가 실려 있다.
*感君恩; 조선 초기의 악장 가운데 하나. 임금의 은덕을 사해(四海)와 태산(泰山)에 비유하여 칭송한 작품으로, 모두 4장으로 되어 있으며, ≪악장가사≫와 ≪고금가곡≫에 실려 전 한다. 작가와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 상진이 지었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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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교수신문에서 해마다 연말이 되면 전국 교수들에게 문의하여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라 하여 발표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말이다.
교수들이 하는 일이 문헌이나 사회현상을 보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 비판적인 안목이 다른 사람보다 발달한 경향이 없지 않지만, 15회에 걸쳐 긍정적인 말은 한두 번이고, 거의 전부 부정적이고 암울한 말을 선정했다.
정치가 워낙 비정상이라 냉정한 비판이 필요하겠지만, 국민을 위해서 좀 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로 국가사회를 인도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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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경남일보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의 글 첨취각설(尖嘴刻舌)을 자료를 보충하여 재구성 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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