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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삼재상(沙蔘宰相)

淸潭 2016. 6. 6. 10:59

사삼재상(沙蔘宰相)
[요약] (: 사람 인, : 인삼 삼, : 재상 재, : 서로 상)


사삼(더덕)을 바치고 재상이 되었다는 말로, 선조 때의 상궁 김개시에게서 유래함. 부패한 관리를 비유하여 씀.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광해군 일기(光海君 日記)

[내용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의 상궁(尙宮) 김개시(金介屎: 속명 개똥이 ?~1623)는 세자 광해군(光海君)이 선조(宣祖)의 미움을 받는 것을 기화로 광해군에게 아부하여 그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래서 일개 상궁임에도 불구하고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

  개시와 이이첨은 서로 다투어 가며 매관매직을 일삼아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 보다 못한 윤선도(尹善道), 이회(李洄) 등이 이를 바로잡고자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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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혼탁한 틈을 이용하여 한효순(韓孝純)이란 자가 그녀에게 인삼을 뇌물로 바쳐 재상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효순을 인삼재상(沙蔘=人蔘宰相)이라고 불렀다. 또 이충(李沖)은 희귀한 채소를 상납하여 호조판서가 되니, 그에게는 잡채판서(雜菜判書)라는 별호를 붙여주며 비웃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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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21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병신년(1596 선조 29) 12월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장계에 의하여, 효순이 명을 받아 해군의 일을 전적으로 관할하고 삼도 수군(三道水軍)의 격군(格軍 뱃사공의 일 도와주는 사람)과 군량을 주야로 조발(調發)해서 보내는 동시에 병선과 기계를 급히 수선하게 하여 이순신이 적을 방어하는 일을 도왔다.
무신년(1608) 이후로 이첨이 집권하자 효순은 이이첨에 붙어서 이조를 독차지 하였으며, 병신년에 정승이 된 것은 산삼(山蔘)을 임금에게 바쳐서 된 것이다. 이에 그때 어떤 사람이 시를 지었는데,

산삼 정승을 사람들이 다투어 사모하고 / 山蔘閣老人爭慕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이가 없도다 / 雜采尙書勢莫當

하였는데, 상서는 이충흠(李忠欽= 李沖의 오기)을 가르킨 것으로서 잡채를 드려서 호조 판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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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미상(未詳)일사기문(逸史記聞)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광해군 역시 관직을 제수할 때에 바치는 은이 많고 적음을 봐서 그 품계를 높이고 낮추었다. 또 인경궁(仁慶宮)경덕궁(景德宮)을 짓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여 담장을 넓히었고, 산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거대한 뗏목이 강에 잇따랐다. 세금을 한정이 없이 징수하여 민력이 고갈되었고, 장정을 자주 징발하는 바람에 중들이 성 안에 가득했다. 이때에 터를 바치거나 돌을 바치거나 은을 바치거나 목재를 바치거나 혹 냇물을 막아 물을 가두거나 혹 숯을 태워 쇠를 불리거나 한 자들은 다 이마에 옥관자(玉貫子)를 붙이는 반열에 서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오행당상(五行堂上)’이라 불렀다. 이충(李沖)은 여러 가지 채소를 헌납하여 호조 판서에 오르고, 한효순(韓孝純)은 산삼을 바치고 갑자기 정승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산삼 각로를 사람들은 다투어 흠모하고 / 山蔘閣老人爭慕
잡채 상서는 세력을 당할 수 없네 / 雜菜尙書勢莫當

光海亦除拜官職視銀多少以爲陞降品秩焉又營仁慶宮景德宮毀撤人家以廣墻垣兀盡山木巨筏連江徵斂無藝民力已竭調發民丁緇髡滿城時納基納石納銀納木或防川儲水或熾炭煅鐵者皆列頂玉之班人謂之五行堂上李冲以雜菜私獻陞戶判韓孝純以山蔘進御奄登台鉉有人題詩曰山蔘閣老人爭慕雜菜尙書勢莫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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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1년 기미(1619) 35 기사

이충의 졸기 기사

이충(李沖)이 죽었다. 이충은 이양(李樑)의 손자로 사론(士論)에 버림받은 자인데, 외척과 혼인을 맺어 궁궐과 결탁하였으며 흉악한 무리에게 붙어서 현직에 통망(通望)되어 높은 품계로 뛰어올랐다. 위인이 흉험하고 탐욕스러운데다 포학하여 사람의 목숨을 한 포기 풀이나 다름없이 여겼는데,

일찍이 배에서 갓난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그 아기를 강에다 던져버리기도 했었다.

그는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곤 했는데,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王每於食時, 必待家供具, 始乃下箸

당시에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사삼 각로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 세력은 당할 자 없구나
當時, 有人作詩以嘲曰:"沙參閣老權初重, 雜菜尙書勢莫當

하였는데, 각로는 한효순(韓孝純), 상서는 이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효순의 집에서는 사삼(沙蔘)으로 밀병을 만들었고, 이충은 채소에다 다른 맛을 가미하였는데, 그 맛이 희한하였다.孝純, 以沙參作蜜餠, 沖以菜雜他味, 其味異常)

또 영건 도감의 제조로 있던 때에는 역사의 감독을 매우 혹독하게 하고, 환관들을 곡진하게 섬기며 온갖 방법으로 아첨해서 토목공사를 극도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그런데도 왕은 그가 임금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여 날로 더 총애하였으며, 발탁하여 찬성에 제수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자 이틀 동안 조시(朝市)를 중지하고, 관곽(棺槨)을 지급하고 별도로 부의를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우의정에게 제수하였는데 죽고 난 후에 추증하지 않고 곧장 재상직에 임명하는 것은 이충으로 부터 시작된 일이다. 왕은 매우 슬퍼하고 애석해 하면서 국가를 위해 자신이 원망을 받으면서도 맡은 일에 마음을 다했다.’고 전교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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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더덕은 뇌물이었다? 광해군과 더덕정승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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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아무래도 식탐이 있었던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얼마나 밝혔는지 당시 도성인 한양에 임금을 조롱하는 노래가 널리 퍼졌다. 노래 가사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실려 있다.

처음에는 사삼 각로(沙蔘 閣老)의 권세가 위세를 떨치더니

지금은 잡채 상서(雜菜 尙書)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

사삼은 모래땅에서 자라는 인삼이라는 뜻으로 더덕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금은 주로 반찬으로 먹지만 모래밭의 인삼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인삼 못지않게 몸에 좋다고 여겼다.

임금의 입맛 사로잡은 더덕 요리

각로는 벼슬이다.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 재상이 각로에 해당한다. 잡채는 글자 그대로 먹는 음식인 잡채이고 상서는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조선 시대의 판서를 말한다. 정리하자면 사삼 각로는 광해군에게 더덕을 맛있게 요리해 바쳐 임금의 신임을 얻었던 좌의정 한효순(韓孝純), 잡채 상서는 진기한 맛의 잡채를 만들어 호조판서 벼슬에까지 올랐던 이충(李沖)을 비꼬아 부른 것이다.

이충의 잡채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광해군일기에는 임금이 식사 때마다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었다는 기록과 함께 한효순의 집에서는 더덕으로 밀병을 만들었고 이충은 잡채에 다른 맛을 가미했는데 그 맛이 독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충 집안의 잡채에 앞서 광해군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한효순 집안의 더덕 요리는 과연 어떤 음식이었을까?
광해군일기를 비롯해 조선 시대 여러 문헌에는 밀병이라고 적혀 있다. 한자로는 꿀 밀()에 떡 병()자를 썼으니 더덕으로 만든 꿀떡이라는 뜻인데 짐작해 보건대 아마 더덕 강정과 비슷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찹쌀로 양념 옷을 입혀 매콤하고 달콤하게 튀겨낸 더덕 강정은 지금도 맛있는데 임금도 반한 것을 보면 맛이 더 특별하지 않았을까 싶다.

좌의정 한효순 집안은 음식 솜씨가 특별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더덕 요리로 광해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별미로 널리 알려진 서산 어리굴젓 역시 한효순 집안의 솜씨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어리굴젓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한효순의 손자며느리가 창안해 퍼트렸다는 것이다. 한효순의 처가가 서산이었고 또 한효순 자신도 서산에 살았기에 나온 말일 수도 있는데 그저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집안 대대로 요리 솜씨가 좋았기에 이런 이야기가 생겼을 것이다.

호남·영남 직접 찾아다니며 병참 문제 해결
그런데 한효순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음식으로 인해 이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일까? 광해군에게 더덕 요리를 만들어 바쳐 출세한 것으로 후세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사실 한효순은 용맹한 장군이었다.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병참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기록했다. 대규모의 명나라 지원군이 도착하자 이들이 먹을 식량이 문제가 됐는데 군량이 부족하다는 소식에 호남과 영남을 직접 찾아다니며 군량을 모아 병참 문제를 해결했다.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인 선조 29(1598)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추천으로 수군의 군량을 조달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그의 활약 덕에 병참이 원활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여를 한 장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함경 감사로 여진족의 동향을 파악하고 방어책을 마련하는 등 전략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장군으로서 위엄도 대단했다.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병사들을 매복시켜 물리쳤는데 그 작전이 담대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컨대 경상좌도 감사 시절에는 눈에 띄는 자주색 도포를 입고 나팔을 불며 적정 시찰을 나갔는데 왜적들이 높은 곳에 올라 한효순을 가리키며 바라보아도 일체 겁내는 기색 없이 의연한 자세로 시찰을 끝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한효순을 가리켜 조선 관리의 위용을 다시 보았다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잘못된 처신으로 세상의 손가락질 받아

이런 용장이었던 한효순이 광해군 때는 잘못된 처신을 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됐다. 음식으로 임금에게 아부해 출세하면서 더덕 재상이라는 비웃음을 사더니 급기야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인조반정 이후 대신들이 들고일어나 한효순을 탄핵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한효순이 관리들을 동원해 대궐 뜰에 엎드려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장한 주모자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한효순은 이미 사망했음에도 벼슬을 박탈하는 삭탈관직을 당했고 죽은 사람에게 육체적 형벌을 내릴 수는 없었기에 아들 세 명이 대신 처벌을 받고 귀양을 갔다.

출세를 향한 욕심이 지나쳤던 것일까? 한 나라의 재상 집안에서 음식을 만들어 궁궐을 들락거릴 정도의 참을 수 없는 처신의 가벼움이 가져온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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