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故事成語

임전무퇴(臨戰無退)

淸潭 2016. 6. 1. 09:44

임전무퇴(臨戰無退)
[요약] (: 임할 임. : 싸움 전. : 없을 무. 退: 물러날 퇴)


전쟁에 나서면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말로, 신라 화랑오계[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중의 하나로 신라 청소년들의 무사도 정신이었음.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제7 관창(官昌)



 

[내용관창(官昌= 또는 관장(官狀)이라고 함)은 신라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거동과 외양이 모두 우아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화랑(花郞)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나이 16세 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능숙하였다(儀表都雅, 少而爲花郎,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 대감(大監= 장군 아래의 무관직)인 어떤 사람이 태종대왕(太宗大王)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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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 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했을 때 왕이 관창(官昌)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백제의 계백(階伯. ?~660) 장군은 휘하 5천 결사대와 함께 국운을 걸고 항전했다.
계백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춘추전국시대 때 월나라의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부차의 70만 대군을 격파했다.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을 본받을 때다. 모든 장병들은 각자가 분발하여 싸움에 이김으로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토록 하라.”
그리하여 황산벌에서 5천 명의 결사대로 신라 군사 5만과 상대하여 네 차례나 분쇄했다.

이렇게 되자 신라군의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은 아들 관창에게  이르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다. 어찌 용기가 없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연민이 가득 찬 아버지의 당부를 듣고 관창이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관창은 곧 말을 타고 적진으로 쳐들어가서 적 몇 명을 죽였으나 이내 백제군에게 사로잡혀 백제의 원수(元帥) 계백(階伯)의 앞에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게 하니, 그가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이에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다. 소년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겠는가!”하고는, 살려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고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 마신 후에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웠다. 그러나 다시 백제군에게 사로잡혔다.

이에 계백은 할 수없이 관창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의 투지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시체를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아버지인 품일 장군이 그 머리를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고 말하였다.

전군이 이를 보고 슬퍼하고 한탄하며 뜻을 세웠다. 북을 요란하게 치며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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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군은 5천의 군사로 네 번이나 진퇴를 거듭한 끝에 백제를 위하여 장렬하게 목숨을 바쳤다.

[태종]대왕이 급찬(級湌= 신라시대 제9관등)의 위계를 추증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주었으며, 그 집에는 당나라 비단 3십 필, 20승포 3십 필과 곡식 1백 섬을 내려 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 자료를 보충해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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