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신숙주와 한명회

淸潭 2016. 5. 5. 11:25

신숙주와 한명회

 

세조를 당태종이나 한고조에 비유한다면, 신숙주와 한명회는 위징과 장량일 것이다. 세조가 잠저시절(왕위에 올라가지 않는 신분)부터 그들은 항상 오른팔, 왼팔로써 활동했다. 그들 둘 간의 관계도 특별하여, 한명회의 딸이 신숙주의 며느리로 들어가서 사돈관계였다. 그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정승자리를 차지했고, 마침내 천수를 누린 후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작은 사뭇 달랐다. 신숙주는 판서집안의 자제였고, 세종조의 최고 엘리트 기관인 집현전 학사를 거쳐, 일약 문사로 활동한 반면, 한명회는 칠삭둥이 출신으로, 집안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로, 천하를 주유하며, 30살이 넘어서야 겨우 개성에 있는 궁지기 노릇을 했다.

 

그러던 것이 단종이 즉위할 무렵, 권람의 소개로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었던 반면, 신숙주와 세조는 이미 세종조 때 훈민정음을 이용해 석보상절을 편찬할 때 이미 교분을 가졌고, 세조가 단종 즉위를 인정받기 위한 사절사로 갈 때, 동행함으로써 확실한 세조의 사람이 되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계유정난 직후 각자 상당부원군과 고령부원군에 책봉되었고, 세조가 즉위 후 그들의 벼슬은 올라가, 신숙주는 1462, 한명회는 1465년에 차례대로 영의정에 책봉된다. 성종 때 다시 그들은 영의정에 한 번 더 올라가는 관운을 타고났다.

 

그들은 생전에 천수와 부귀를 누렸고, 만천하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불의에 협력했다는 죄로 후세에 지탄을 받았고, 기회주의자, 모략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신숙주와 한명회는 이시애의 난 때 죽음을 당할 뻔했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강효문과 신숙주, 한명회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시애는 신숙주와 한명회가 역모를 꾀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자체만 해도, 조정이 내분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생각은 적중했다. 동시에 세조가 한명회와 신숙주의 권력에 두려움을 품은 것도 있었다.

 

결국 이시애의 반란이 끝나고 그들은 무죄방면 되었지만, 세조는 여전히 그들을 의심했다. 남이 같은 신진세력을 이용하여, 그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세조가 죽은 후 오히려 역습을 받아, 남이의 옥이 일어나고 만다. 그 후 예종이 죽은 후 어린 임금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권세를 부렸고, 결국 최고의 영광 속에 죽게 되었다. 여러분은 혹시 이광수의 <단종애사>라는 책을 읽어보셨는가? 성삼문의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한 후, 신숙주가 살아 돌아가자, 신숙주의 부인인 윤 씨가 신숙주가 살아 돌아옴을 부끄러워하여 자살했다고 한다.(물론 근거 없는 사실이다.)

 

만약 소설에서 본다면, 신숙주는 자신의 길을 부끄러워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삼문이 신숙주를 향해 꾸짖었을 때, 그는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과연 그는 자신의 길을 부끄러워했을까? 단종이 왕위에 있을 때, 그는 세조와 함께 명나라로 갔을 때, 명나라 영락제 무덤에 갔다고 한다. 영락제가 누구인가? 영락제는 자신의 조카를 죽이고, 황제로 오른 임금이다. 과연 영락제 무덤 앞에서 세조와 신숙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만 알 것이다. 결국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그들은 계유정난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3년 후 그들은 단종의 왕위를 뺏고,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부끄러워했을까? 어쩌면 자랑스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이게 다 백성을 위한 것이고, 조선을 위한 것이라고 자부했을지 모른다. 방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될 것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했을 것이다. 그들은 당세인의 비판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걸 신경 썼다면, 반란 따위를 생각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후세의 평가가 중요하다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락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겠지만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다라고 결국 영락제는 명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임금이었다. 여러분은 세조도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