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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연기 속에서

淸潭 2016. 3. 31. 10:29




매일매일은 생활의 연속이다. 낯선 것을 보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면서, 머리가 크고 가슴이 넓어진다. 느닷없는 일에 웃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어 화도 내며 그렇게 부대끼면서 누구나 한 세상을 건너간다. 이런 자잘한 일상들이 다 훌륭한 글감들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고담준론(高談峻論)만이 능사가 아니다.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산문에는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난다. 소품화(小品化)의 경향이 그것이다. 소품은 길이만 짧다고 붙인 이름이 아니다. 짧은 글 속에 삶의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어야 소품이다. 읽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거나, 반대로 답답해져야 소품이다. 생활의 묘사가 있고, 삶의 단면이 드러나는 글,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나는 그런 글을 이 시기 문인들은 즐겨 썼다.  




이번에는 연기를 두고 쓴 짤막한 두 편의 소품(小品)을 함께 엮어 읽어본다. 이옥(李鈺, 1760~1813)의 〈연경(烟経)〉과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관재기(観斎記)〉란 글이다. 두 글 모두 절집에서 연기를 화두 삼아 스님들과의 문답을 적은 공통점이 있다.
지난 해 이옥이 지은 《연경(烟経)》이란 책이 발견되었다. 골초였던 그는 담배를 사랑한 나머지 담배의 역사를 기록으로 정리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이래 담배와 관계된 이야기들이 빠짐없이 다 기록되어 있다. 담배인삼공사에서 크게 반색을 할만한 책이다. 이 책을 보면 이옥의 정리벽도 가히 병적인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글 한편을 써도 절대로 남들 따라 쓰지 않고 저대로 썼다. 그의 글은 하도 개성적이어서, 정조는 그의 과거 답안지를 보고 화를 내며 합격을 취소하고 멀리 기장 땅까지 군역을 보내는 벌을 내리기도 했다.




여기서 읽을 글의 제목도 <연경(烟経)>이다. 담배를 소재로 법문 아닌 법문을 펼쳤기에, 장난 삼아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장난처럼 쓴 글이지만 담긴 뜻은 깊다. 불교의 연기설(縁起説)에 대한 비판을 행간에 담은 일장 논설이다. 글이 길어 몇 부분으로 나누어 읽기로 한다.





한때 내가 송광사 향로전에 머물며 부처님 전에서 가부좌를 틀고 《원각경(圓覚経)》을 강의한 일이 있었다. 이때 내가 담배 한 모금이 먹고 싶어 코끼리 코 모양으로 생긴 담뱃대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향로를 당겨오니, 행문 사미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합장하고 내게 말했다.
“우리 부처님께서 연화대좌에 앉아 전각 안에 두루 임해 계시니 하나의 작은 세계라 하겠습니다. 전각 안에서는 일체의 연기 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내가 크게 웃으며 행문에게 말했다.
“부처님에게는 향로가 있어 아침 저녁으로 향을 사른다. 향로에 향을 사르고 나면 향은 반드시 연기가 된다. 일체 세간의 불 땔 수 있는 모든 사물이 아직 연기가 되지 않았을 때는 향은 그대로 향이고, 담배는 그대로 담배로 각각 서로 다르다. 화로에 태워 연기가 되고 나면 향 연기도 연기이고, 담배 연기도 또한 연기이니, 담배 연기나 향 연기나 똑같은 연기여서, 똑같은 연기 가운데 이 연기와 저 연기일 뿐이다. 나는 연기를 사랑하여 담배 연기를 좋아하고 향 연기도 좋아한다. 부처님이라 해서 어찌 다만 향 연기만 좋아하고 담배 연기는 좋아하지 않겠는가? 또 나는 나그네지 부처님 앞에 향 사르고 도를 닦는 불제자가 아니거늘 어찌 석가세존여래께서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면서 손님인 내가 담배 한 대 피우는 것을 권하지 않으시겠는가?”





송광사 향로전에서 사미승 행문과 주고받은 첫 번째 문답이다. 이옥이 향로의 불을 당겨 담배를 피우려 하자, 사미는 부처님 앞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며 이를 제지한다. 향로에선 향 연기가 피어오른다. 불씨를 향에 붙이면 향 연기가 오르고, 담배에 붙이면 담배 연기가 오른다. 인연생기(因縁生起)니, 불씨가 어디에 가 닿느냐에 따라 달라진 것일 뿐이다. 향 연기나 담배 연기나 연기이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향연(香烟)은 선연(善縁)이요 초연(艸烟)은 악연(悪縁)인가? 금세 무(無)로 돌아가고 말 연기를 두고 이 연기는 좋고 저 연기는 나쁘달 수 있는가? 사물이 불씨를 만나 연기(烟気)가 되는 연기(縁起)에서 일체현상 생멸변화의 가치를 따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이렇게 기선을 제압한 이옥은 다시 2차전으로 돌입한다.





행문이 슬몃 웃더니 공손히 향로를 옮겨왔다. 내가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행문에게 말했다.
“한 가지 화로 불인데, 방금 전 네가 향을 사를 때 연기는 향 연기가 되고, 이제 내가 담배를 피울 때 연기는 담배 연기가 되는구나. 앞의 연기와 뒤의 연기가 같은 연기는 아니니, 네가 말한 담배 연기와 너의 향 연기가 서로 인연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행문이 합장하고 대답했다.
“손님께서 앞 연기는 앞 연기고, 뒷 연기는 뒷 연기라 하셨으니, 뒷 연기와 앞 연기가 무슨 인연이 있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훌륭하도다. 앞 인연과 뒤 인연이 아무 인연이 없다면 저 뒷 연기는 이 앞 연기의 생김새도 모르고 성명도 모르고 서로 아는 사람도 아닐 터인데, 어찌 반드시 앞의 연기가 뒷 연기의 처지를 위해줄 것인가? 앞 연기가 향 연기요 뒷 연기가 담배 연기든, 앞 연기가 담배 연기요 뒷 연기가 향 연기든, 향 연기와 담배 연기는 각각 제 연기를 피울 뿐이니 어찌 반드시 뒷 연기가 앞 연기의 복을 아껴 주겠는가?”
행문이 합장하며 가만히 탄식해 마지않았다.





“자! 한가지 불에서 두 가지 연기가 나왔다. 인(因)은 하나인데 연(縁)에 따라 달라졌다. 그렇다면 앞서의 향 연기와 지금의 담배 연기 사이에는 어떤 인연이 있느냐? 대답하라. 사미여!”
연기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상(事象)은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의 인연 속에서 우리 앞에 현상(現象), 즉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기실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일 뿐이다. 이것이 있어야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나야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멸하매 저것도 멸한다. 변치 않는 절대의 실체는 없다. 항상된 것은 없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헛것일 뿐인 현상에 미혹되어 마음을 뺏긴다. 문제는 마음이다. 마음을 잡아라.




그러나 그런가? 향 연기는 담배 연기를 모르고, 담배 연기는 향 연기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불씨를 인연하여 연기를 피워올려도, 향 연기는 언제나 향 연기를 피워올릴 뿐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는 법이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향은 향이고 담배는 담배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여기에 무슨 필연적 인연이 있느냐? 너는 향과 담배 사이에 필연적인 인연이 있다고 말할텐가? 향 연기 없이는 담배 연기도 없다고 말할 작정인가? 그도 아니면 담배도 없고 향도 없고, 다만 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려는가?
행문 사미는 공연히 불전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고 했다가 정신 없는 좌우 공격을 받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다시 3차전.





내가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 행문에게 말했다.
“향을 태우든 담배를 태우든 반드시 연기가 나게 마련이다. 너는 이 연기가 화로 불에서 나온다고 하겠느냐, 향이나 담배에서 나온다고 하겠느냐? 만약 이 연기가 화로 불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향을 던지기 전에는 어째서 연기가 나오지 않느냐? 만약 이 연기가 향이나 담배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불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찌하여 연기가 나오지 않느냐?”
행문이 합장을 하더니 내게 말한다.
“불이 없이는 연기가 없고, 향이 없이는 연기가 없습니다. 불과 향, 담배가 만날 때 연기가 비로소 나오게 되지요.”
내가 말했다.
“훌륭하구나. 자네가 비록 불씨를 화로 가운데 간직해 두고 향을 합 속에 담아두더라도, 죽을 때까지 향이 불을 쫓아 화로로 가지 않거나 불이 향을 찾아 합으로 오지 않는다면, 향은 그대로 향이고, 불은 그대로 불일 뿐일 걸세. 어디에서 자네의 향 연기가 나와서 부처님께 바칠 수 있을런지 모르겠구나. 대천세계에 한 점 연기도 없다면 부처님 또한 향 연기를 마실 수는 없을 것이야.”
행문이 일어나 사례하고 콧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오체투지(五体投地) 한 채 내게 말했다.




“나이 열 다섯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절간에서 머리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이제 절에 산지가 또 스무 해입니다. 다른 사람이 머리 깎는 것은 대부분 비유하자면 스스로 향이나 담배를 지닌 까닭에 불에 던져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물건을 태우려 했던 것은 아닌데 잘못 불에 떨어져 타고 말았으니, 비록 타지 않으려 해도 이미 불타고 만지라 또한 어찌할 수가 없어, 아승기겁에 길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레 같은 말씀을 듣고 보니 마음 가득히 부끄럽습니다.”
행문이 이와 같이 한탄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향은 향 연기가 되고, 담배는 담배 연기가 된다. 연기가 비록 같지는 않지만 연기인 점은 서로 같다. 사물이 변화하여 연기가 되고 연기가 변화하여 무(無)가 된다. 연기가 나와서는 잠깐 사이에 함께 허무로 돌아가니, 네가 보았던 전각 가운데 향 연기와 담배 연기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세상은 하나의 큰 향로일세 그려.”

이옥은 대답이 궁해진 사미승을 다시 몰아부친다. 연기는 어디서 나오는가? 화로불에서 나오는가, 향이나 담배에서 나오는가? 이 물음은 소동파의 시에서도 보이는 친숙한 화두이다.



소리가 거문고에 있다 하면은
갑 속에 놓았을 젠 왜 울지 않나.
소리가 손가락 끝에 있다고 하면
그대 손가락 위에선 왜 안 들리나.
若言琴上有琴声 放在匣中何不鳴
若言声在指頭上 何不于君指上聴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연기는 어디서 나오는가? 손가락이 거문고 줄과 만날 때 나온다. 향이 불씨와 만날 때 일어난다. 만나지 않으면 소리는 나지 않는다. 인연이 없으면 연기도 없다. 너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부터 하려는구나. 향을 합 속에 담아두면 거기서 무슨 연기가 나겠니? 거문고를 갑 속에 넣어두면 저 혼자 울 수는 없겠지? 그러니 향을 합 속에서 꺼내야겠지. 불씨를 당겨야겠지. 손가락을 튕겨야 거문고가 울겠지. 자네는 어떻게 향을 꺼낼텐가? 불씨를 어찌 당길텐가? 부처님께 바칠 향연을 어이 마련할텐가?
사미는 그만 엉엉 울고 만다. 땅바닥에 온몸으로 엎드려 운다. “선생님! 제가 불문(仏門)에 몸을 의탁한 것은 향을 지녀서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인연이 소중해서가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조실부모하고 먹고 살 길 막막해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애초에 향을 살라 부처님께 이 마음을 드리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이미 불에 떨어져 타버린 이 몸을 어이해야 좋습니까? 길을 모르겠습니다.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렇지가 않다. 네 생각은 틀렸다. 향은 향 연기로 변하지, 담배 연기를 내는 법이 없다. 담배에서 향 연기가 나는 법도 있더냐? 하나 연기를 내는 것은 한 가지이지. 너의 길과 나의 길은 같을 수가 없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렴. 향이나 담배나 마침내는 허공으로 스러지고 마는 것을.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너는 무엇을 들었더냐? 조금 전 네 귀를 간지르던 거문고 소리, 눈 앞을 아른대던 연기의 자취를 이제 와 어디서 찾을 것이냐? 인연 따라 살다가 인연 따라 가는 것이지. 그러고 보면 눈 앞의 모든 것은 헛것이기도 한 게지. 무(無)라, 무라. 세상은 하나의 큰 향로, 인연의 불씨 따라 제 지닌 품성 따라 한 모금 연기를 피워올린 후 허공으로 스러져 자취도 없게 되는 것이지. 슬퍼하지 마라. 얻으려 하지 마라.”



이렇게 해서 송광사 향로전에서의 한 바탕 설법은 끝이 난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의 논리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논법이다. 그런데 나는 막상 알 수가 없다. 그의 말이 불가의 논리로 불가의 연기설을 격파하고자 한 것인지, 마침내 연기처럼 스러지고 말 인생의 슬픔을 말하려 한 것인지. 담배 한 대 피우자고 늘어놓은 장광설치고는 남기는 여운이 길다.
이때 이옥은 불온한 문체를 쓴다 하여 정조의 견책을 입고서 머나먼 남쪽 기장 땅으로 군역을 살러 가던 길이었다. 세상살이 씁쓸하기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행문 사미나 망우초(忘憂草)를 태우며 푸른 슬픔을 내뿜던 이옥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박지원의 글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가까운 벗 서상수(徐常修, 1735-1793)가 집 이름을 관재(観斎)로 짓고, 기문(記文)을 청해왔다. 관재는 ‘보는 집’이다. 본다니 무엇을 본단 말인가? 박지원은 그를 위해 〈관재기(観斎記)〉를 지어주며 언젠가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 들었던 치준대사(緇俊大師)와 사미승과의 대화를 가지고 보는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역시 두 단락으로 나누어 읽어보자.





을유년 가을, 팔담에서부터 거슬러 가서 마하연으로 들어가 치준대사를 방문하였다. 대사는 손가락을 깍지 껴서 인상을 만들고는 눈은 코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동자가 화로를 뒤적이며 향에 불을 붙이는데, 연기가 동글동글한 것이 마치 헝크러진 머리털을 비끌어 매어놓은 것도 같고, 자욱한 것은 지초가 무성히 돋아나는 듯도 하여, 그대로 곧게 오르다가는 바람도 없는데 절로 물결 쳐서 너울너울 춤추듯 흔들려 마치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자가 홀연히 묘오를 발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공덕이 이미 원만하다가 지나는 바람에도 움직여 도는구나. 내가 부처를 이룸도 한낱 무지개가 일어남과 같겠구나.”
대사가 눈을 뜨며 말하였다.
“얘야! 너는 그 향을 맡은 게로구나. 나는 그 재를 볼 뿐이니라. 너는 그 연기를 기뻐하나, 나는 그 공(空)을 바라보나니. 움직이고 고요함이 이미 적막할진대 공덕은 어디에다 베풀어야 할꼬?”
동자가 말하였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시험 삼아 그 재의 냄새를 맡아보아라. 다시 무슨 냄새가 나더냐? 너는 그 텅빈 것을 보거라. 또 무엇이 있더냐?”





향을 피우니 연기가 올라간다. 온갖 모양을 지으며 꼬물꼬물 잘 오르던 향이 어느 순간 너울너울 춤추듯 흔들려 허공으로 바쁘게 흩어진다. 바람도 없는데 연기는 어이해 저렇듯 흔들리는가? 어린 스님은 그것을 보다가 마음속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곱게 올라가던 연기가 까닭 없이 흔들려 흩어지는구나. 나의 원만하던 공덕도 나도 모르게 저리 사라지고 말테니, 내 어찌 부처를 이룰 수 있으리. 깨달음이란 것도 알고 보니 있다가 사라지는 무지개가 아닌가? 스스로 흐뭇한 나머지 씩 웃기까지 했겠지.
가부좌를 틀고 좌선삼매에 들었던 큰 스님은 종작없이 주절대는 어린 스님의 말을 듣고 감았던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제법이구나. 연기를 보고 깨달음을 말하는도다. 너는 연기를 보았느냐? 나는 그 연기가 사라진 허공을 본다. 내 마음은 흩어진 연기요, 사라진 종소리다. 본래무일물(本来無一物)이거늘 네 공덕을 어디다 베풀려느냐? 아니, 그 공덕이란 것이 어디에 있느냐? 한 번 내놓아 보아라.”
까불다가 한 방 맞았다.





동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옛날에 스승님께서 제 정수리를 문지르시며 제게 다섯 가지 계율을 내리시고 법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름은 내가 아니요 나는 곧 공(空)이라 하십니다. 공은 형체가 없는 것이니 이름을 장차 어디에다 베푼답니까? 청컨대 그 이름을 돌려드리렵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순순히 받아서 이를 보내도록 해라. 내가 예순 해 동안 세상을 살펴보았으되, 사물은 한 자리에 머무는 법 없이 도도히 모두 가버리는 것이더구나. 해와 달도 흘러가 잠시도 쉬지 않느니, 내일의 해는 오늘이 아닌 것이다. 그럴진대 맞이한다는 것은 거스르는 것이요, 끌어당기는 것은 애만 쓰는 것이니라. 보내는 것을 순리대로 하면, 너는 마음에 머무는 것도 없게 되고, 기운이 막히는 것도 없게 되겠지. 명(命)에 따라 순응하여 명으로써 아(我)를 보고, 이(理)로써 떠나 보내 이로써 물(物)을 보면, 흐르는 물이 손가락에 있고 흰 구름이 피어날 것이니라.”
내가 이때 턱을 받치고 곁에 앉아 이를 듣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마득하였다.
서상수가 그 집을 관재(観斎)라고 이름짓고서 내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대저 그가 어찌 치준 스님의 설법을 들었단 말인가? 드디어 그 말을 써서 기문으로 삼는다.





“큰 스님! 예전 제게 계율을 내리시고 법명을 주시면서 공덕을 닦으라 하시더니, 이제 와 그 공덕이 무(無)라 하시고 공(空)이라 하십니다. 공덕을 닦아도 까닭 모를 바람에 흩어져 버리고, 재에는 향기가 없고, 허공엔 연기가 없다 하십니다. 제 몸은 껍데기요 마음은 텅 비었다 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누구입니까? 저는 어찌 살아야 합니까?”
“까불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아라. 얻었다 좋아 말고, 잃었다 슬퍼 말아라.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것이지. 오늘 해는 내일도 뜬다. 오늘은 내일과 다르지만, 그 해는 어제 떴던 바로 그 해니라. 같지만 다르고, 다른데도 같다.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이치를 네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까닭을 너는 알겠느냐? 있지도 않은 마음을 잡았다고 하지 말아라. 허공 속의 연기를 보았다고 하지 말아라. 종을 떠난 종소리를 어이 쫓아 잡으리.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말아야지. 하나 속에 없는 것이 없고, 그 많은 것들 속에 든 것도 기실은 하나뿐이니라(一中一切多中一). 그렇다면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다름 아닌 하나가 아니랴?(一即一切多即一) 티끌 하나 속에도 시방세계를 머금었으니(一微塵中亦含十方), 그 많은 티끌마다 다 그렇지 않겠느냐?(一切塵中亦如是) 흐르는 물처럼 순리를 따라 이치로 본다면 네 마음이 허공처럼 맑아질 것이니라. 텅 빈 산에 사람 없고,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었다(空山無人, 水流花開). 손가락을 들어 흐르는 물을 가리켜 보렴. 네 손가락 끝에서 흰 구름이 피어오를 것이니라. 네가 세계가 되고, 향기가 되고, 허공이 되고, 우주가 될 것이니라. 제자야! 네가 이 뜻을 정녕 알겠느냐?”



이렇게 해서 큰 스님 앞에서 깨달은 체 하던 사미승은 앞서 송광사의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엉엉 울며 엎드리고 만다. 관재(観斎)란 벗의 집을 위해 글을 써주면서 박지원은 엉뚱한 이야기를 끌어온 까닭은 이렇다. ‘자네가 이 집에서 무언가를 보려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엇을 보려하는가? 아니 그 전에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려면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일세. 보려면 정신 차리고 보아야 할 것이네. 헛것을 보지말고 제대로 보아야지.’
담배 연기와 향로 연기를 가지고 쓴 두 편의 글을 읽었다. 장난투가 있지만 행간에 만만찮은 내공이 느껴진다. 공연히 아는 것 많은 체 해봤자, 우리가 이런 글 한 줄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유자들이 불교의 논리를 빌어 쓴 이런 글을 읽는 것은 조금 뜻밖이라 재미있다. 사실 깨달음의 길에 문이 따로 있을 수야 없겠다. 그 옛날 절집 향로 앞에서 향을 사르다 주고 받은 문답들이 이렇게 글로 남아 우리의 건조한 일상에 죽비소리가 된다. 정신이 화들짝 들어오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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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우물속의 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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