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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탐방기

淸潭 2016. 1. 13. 12:45

 


   길상사 탐방기

 

              천재시인 백석과  대원각 여주인 김영한의 사랑이야기...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길상사 탐방기

                           (북악스카이웨이,팔각정에서바라본 북한산) 

 

모처럼 김영택화백님의 북한산 숙정문의 취재에 동참 하였다....

골치아픈 일상사를 잠시 접고 잠깐 짬을 내어오후에

앞에 보이는 겔로퍼를 몰고 다녀왔다... 

 


황사가 끼어 있는2월24일수요일2시경의 북악산의 전경은
우중충한 황사의 영향인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팔각정 위의 전망대 망원경은 먼~

발치의 서울 전경과 북한산을 바라 볼수있지만
숙정문은 청와대와 근접해 있어서 촬영이 금지 되고 있었다....

 

 

경비가 삼엄하고 취재 하기에는 너무 날씨가 흐려

나중에 취재 하기로 하고 삼청동으로 내려 오려다가
지나는 길에 길상사를 들르자는 나의 청에 김영택 화백님과 같이 들렀다.

 

 

 (법고가 새롭게 만들어져있다..)

제3공화국시절 내노라 하는 요정이 많았지만 3대요정의 하나인
대원각은 80년대 들어서 회갑연이나 칠순잔치를 할라치면

상다리 휘어지게 한상 차림을 몇겹 얹어

어깨위에매고 손님을 맞이하던 유명한 요정이었다..

 

 

 (새로 칠한 화려한 법고)

나도 회갑연이나 칠순잔치에 몇번 가 봤던 대원각은 그당시 기억엔
여름엔 계곡에서  많지 않지만 물이 흐르고 새소리가

들리는 경치가 좋은 곳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유명한 술과 음악과 여자가 어우러지는

화려한 요정이 어느날 갑자기 문을 닫는다..

 

 

(나무 기둥에 새겨진 용의 형상이 화려하다...)

대원각 소유자인 김영환보살이 '무소유'를 읽고.
법정스님께 대원각의 모든것을 시주 하려고 하였지만
무소유를 강조하시며 실천 하시는 법정스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번의 간곡한 요청으로 법정스님은

길상사라는 절을 세워 마음의 도량을 세우신다..
고 김영환 보살은 1932년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진향기생으로 시작하여 어느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인 백석과의 만남의 사랑으로 긴나긴 기다림을 가진다...

 

 

 (방문 한 날에는 극락전 현판을 달고 있었다...)

그 하룻밤의 사랑은 백석,집안이 명문가의 집안이라
반대가 아주 심했다 자야는 백석집안의 반대로 인연을

이룰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헤어져 있으며 시인 백석을

기다리며 내사랑으로 간직하며 죽는날까지 천재시인 백석을 기린다.

 

 

(제 3공화국시절 고급 요정인 유명한 대원각 건물...)

하룻밤의 사랑으로 서로의 마음을 간직한체 백석은

고 김영환 보살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한지에

써서 편지와 함께 남기고 홀로 떠나간다... 

 

 

 백석과의 못다한 사랑을 간직한체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인 지금의 터에서 첨암정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한다.

 

 

 수많은 정치인과 많은 단골의 구애를 뿌리치고

천재시인을 기다리며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다.
1997년12월14일싯가 1000여억원의

 7000여평 넓은땅을 무 보시로 시주한다..

 

 

그당시 싯가 1000억여원에 이르는 많은 돈을 아무 조건없이
시주한다는 것은 그 당시 상상하기 힘든 결정 이었을 것이다.
 

 

 

 자야는 살아 생전에도 백석을 기리며 시인을 위하여 '백석상'을
만들기도 하였던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아는 기생 이었다.

 

 

 당나라 이태백의 시에서 따온 중국의 변방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등장하는 자야오가

(子夜五歌)라는 시에서 따 왔다는 자야는 길상사라는

절을 열때.법정스님으로 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를 받아든 사랑의 기다림을 간직한 자야.

 

 

 1999년11월14일 그녀는 사랑의 그리움만 간직한채

길상헌에서 생을 마감 하였다.

죽기 전날 그녀는 목욕 재계하고 절에 참배하고

하룻밤을 길상헌에서 자고 생을 마감 하였다고 한다..

 

 

 84살의 적지도,많지도 않은 생을 살다간 자야의

하룻밤의 심정은 어땟을까? 아마 첫사랑을 간직한

젊을적의 백석을 그리워하며 가진것없이 모든것을 희사한 무 보시를 한
기쁨으로 가볍게 이승을 훌훌 털고 생을 마감했으리라..

 

 

 나는 이돌 앞에서 자야의 아름다운 사랑의 드라마가 펼쳐진
옛 대원각의 자리인 길상사에서 오후의 시간을 보냈다.

 

 

길상사에서의 오후 하루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여행이 유명한 경치나 관광지나 보는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작지만 정감이 가는 곳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길상사를 떠나기 직전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넓고 정감이 가는 목재로 화장실을 만들어져 있었다
유리창이 시원하게 펼쳐져있는 하늘이 보이는 화장실.
화장실을 보는 일도 생리적인 것을 떠나 마음의 편함을 갖는다.

 

 

 

 

 

 

백석은 말년을 북한에서 힘들게 보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체제에 맞는글을 쓸수가 없으니 번역을 주로 했다고 한다.

영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에도능통했던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 시인 '푸쉬킨'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말라'

라는 詩의 번역도 일본인이 쓴 걸로 되어있었으나

사실은 백석이 처음으로 번역을 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있다.

                                                       

                                                                                김    진    식

 

 

 

길상사의 유래

 

 

 ***우리나라 3대 요정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이 법정스님께 시주한 사찰인 길상사

           천재시인 백석과 대원각의 기생 김영한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길상사 ***

 

 

제 3공화국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이 었던 대원각,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기생이 법정 스님께 시주하면서 사찰이된 길상사.

열여섯 나이에 기생된 김영한씨는 춤 노래 문학이 뛰어나 스승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으로, 스승이 감옥에 투옥되어 면회길에서 시인

백석을 만나 첫눈에 사랑을 하게 되었다. 시인 백석은 영어교사를 그만하고

둘은 3년의 사랑을 하지만...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만 ...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그때마다 김영한을 찾아오지만, 결국 남북이 분단되어 영원한 이별을 한다.

백석은 북한 재북작가로...   

김영한은 대원각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평생 재산 중 현금 2억원은 '백석문화상'으로 기금하고...  

대원각의 모든 전각과 땅은 법정스님께 시주하게 되었다.

 

 1000억원이 넘는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꺼야" 라고...

 

 

 

박정희 전 대통령시절 서울의 유명한 3대 요정이라면 삼청각 청운각

대운각을 손꼽을수 있다. 당시막강한 권력의 정치인들이 자주찾던

최고급 요정으로 숱한 여인들의 애환이,

당시 절대권력자들과 한때를 풍미했던 곳이기도한 대원각 요정....

이곳의 안주인 김영한이라는 여주인이 있었다.

1997년 이곳안주인 김영한 여사는 당시 불교계에 연을맺고있던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7천여평의 대지에

40여동의 건물로이루어진 요정 대원각 ,당시시세로도 1000억이넘는

어마어마한 재산, 그러나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받지않으려는 법정스님,

결국,법정스님은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 라는 절로 다시 태어난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108염주 한벌을 길상화 공덕주에게 걸어준다.

그리고 길상화의 이름을 따서 이절의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정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길상화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나죽으면 화장해 길상사 경내에 뿌려주시오" 유언을하고 이튿날인

11월14일 108염주를 목에건채 파란만장한 83세의 일기를 마친다.

 

 그해 49재를 지내고 그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그의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천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법회때는 역시 고인이되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기도 했으며, 2000년엔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 상과 흡사한 형태의 관세음 보살상을

조각해 봉헌하여 경내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길상사 경내에 수녀님들과 천주교 신자모습을

종종 볼수 있다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런 연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사찰이가도 한다네요.

 

성모 마리아상과 닮은 관세음 보살상

 

(캐톨릭과 불교는 의식이 비슷한게 참 많은것 같습니다,

위의 관세음 보살상, 특이하고 참 예뻐요...)

김영한 할머니, 길상화와 시인 백석(白石)의 소설같은 휴먼 러브스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이 몰락하자 가난한 탓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몸이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하는사이에 남편은 그만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끝내,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위해스스로 한성 기생 진향(眞香)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무와 궁중무를배워 서울의 권번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젊은시절 김영한과, 18세 기생 진향(眞香)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

스물 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 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 당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수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시인 白石.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백석은 그녀를 위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란 시를 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김영한보다 네살더 많았던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의 첫만남에서

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때까지 이별은 없을것" 이라고 하지만 백석의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다른여자와

결혼을 시키게된다.

 그러나 결혼식날밤 집을 빠져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그에게 걸림돌이될것같은 마음에 영한은 끝내거절하자 1939년에 혼자

만주로 떠난다.

이것이 이들두사람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된것이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뒤 해방이 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영한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뒤여서 만날수없었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이후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들여

"백석 문화상"을 제정하고 같은해에 대원각을 시주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편에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길상화 공덕비

金英韓 여사의 일화

어느날 백석은 진향(김영한 기생이름)이 사들고 온 시집을 뒤적이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서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에서 서역지방으로 오랑케를 물리치러나간

낭군을 기다리는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편이

'장안달 밝은반에'로 소개된적있다. 이백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백석이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김영한은 '내사랑 백석' 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것은 아닐까.'

백석이 당시로서 최고의 직장인 고보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어 졌고

이에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옆에있기위해 사표를 던지지만

운명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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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가 죽기전 젊은 기자가 김영한 여사에게 물었다.

*.천억대 재산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사람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천억을 내놨으니 만복을 받으셔야지요.

"그게 무슨소용있어.."

*.다시태어난다면... 한국에서?

나..,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文學할거야."

*.그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사람 詩 한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 난다면 나도 시를 쓸거야"

 -- 평생 사랑한사람을 못잊어 다시 그사람의 뒤를 따르겠다는

여사의 일념이당시 여인상을 대변하는것 같다--

상사화

 

잎이지고나면 꽃이 핀다는 상사화,

두사람의 사랑이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날수없는 상사花 같은 사랑이었을까?

80평생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다가신분,

1999년 12월어느날, KIST(한국과기대)에 김영한여사의 유언장한통이 전달되었다.

한국 과학기술 영재 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원이 넘는

여사소유의 부동산을 기부하고는...

 

 

무소유의 고귀함을 몸소 실천하고 가신분... 기생 眞香. 金英韓 女史.....

 

 

  


 


가져온 곳 : 
카페 >漢詩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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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巨村|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