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씨만큼이나’
글을 쓸 때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일배수(一杯水)라는 호를 가진 국어선생님께서 예문으로 들어준 옛시가 생각난다.
‘모시야 적삼 안섶 안에
연적 같은 저 젖 보소.
많이 보면 병 납네다.
담배씨만큼이나 보고 가소.’
‘조금만’ 보라는 말을, ‘담배씨만큼이나’ 로 표현한 옛시를 들어, 낱말 쓰임의 중요성을 강조해 주신 것이다.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한 모시 적삼, 그리고 연적같이 봉긋 솟은 젖가슴, 그것마져 많이 보면 병날 테니, 담배씨만큼만 보고 가라고 했는데, ‘담배씨’는 과연 얼마나 작은 씨일까? 일부러 담배씨를 구하여 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채송화씨보다도 작았다.
‘담배씨만큼이나 보라’ 는 것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조금’이라는 말을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보았다. ‘나는 눈꼽만큼도 그럴 생각이 없다’느니, ‘나는 추호도 그런 나쁜 생각을 먹은 적이 없다’느니 하는데서 ‘눈꼽이나 추호’가 아주 작다는 뜻의 대명사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눈꼽’을 쓴 이유는 알겠는데, ‘추호’는 무엇인가? 사전에서 찾아보니, 추호(秋毫 가을 추, 가는 털 호)는 가을철에 가늘어진 짐승의 털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또 짧은 시간을 이야기할 때, 눈 깜짝할 사이를 이야기하는 순식간(瞬息間)이니, 찰나(刹那)를 쓰고 있다. 순식은 10의 마이너스 16승, 찰나는 10의 마이너스 18승을 지칭하는 수라고 하니,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러한 작디작은 것을 나타내는 시간 용어들을 쓰지 않고, ‘담배씨만큼이나’ 라고 한, 작가의 혜안이 친근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글을 짓는데, ‘일물일어(一物一語)’ 란 말이 있다. 한 가지 사실이나 사물에는 꼭 적합한 단 하나의 낱말이 있을 뿐이라 해서, 글을 쓰는 사람은 그 낱말을 찾아내야 한다고 했다. 어느 책에서 본, 다음 글은 당시 나를 완전히 주눅들게 하였다. ‘낱말 가지고 함부로 장난질해서는 안 된다. 정말 안 쓰고선 못 배길만치 절실함을 느낄 때, 가장 적합한 표현 방법을 찾았을 때야 비로소 붓을 대야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선인들은 어떻게 ‘담배씨만큼이나’ 란 말을 생각해 내었으며, 좋은 글을 쓰는 선배 문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좋은 글, 표현이 아름다운 글들을 모으기도 했다. ‘담배씨만큼이나’ 처럼 절묘하게 쓰여진 글들을 찾아내고, 내 글 쓰는 생활에도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글을 쓸 때마다 ‘담배씨만큼이나’ 하는 옛시가 생각나서 낱말 쓰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 많은 낱말 중에 정말 최상의 적합한 낱말을 쓰고 있는 것일까? 어느 출판기념회에서의 일이다. 축사를 맡은 저명한 작가 한 분이 “나는 이 책에 쓰여진 것들을 다른 책에서 다 보았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내 놓았다. 장내가 발칵 뒤집혔다. 잠시 후 그 사람이 내어놓은 책은 ’국어사전‘이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안도하였고, 그 사람의 다음 말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러나 아무나 이 낱말들을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著者)야말로 이 책 속에서 이 낱말들을 가장 잘 찾아 쓴 사람입니다.”
낱말을 잘 쓰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 쓰고, 또 쓴 후에도 수정 가필 삭제하는 등, 거듭된 석공의 연마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밖에 못 그리는 건 아닐까 하는 필부(匹夫)의 생각으로 설익은 생각이나마 옮겨보고자 책상 앞에 다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 보지만, 만족한 글은 좀처럼 얻어지지 않는다.
글 쓰는 것을 그 지독한 산고(産苦)에 비교한 사람도 있지만, 마음에 드는 좋은 글을 얻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임을 한 번 더 느끼고 만다. 일찌감치 접했던 한 낱말이 이렇게 일생 동안 나의 글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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