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 어른, 이번에는 딱 맞을 겁니다.”
오생원은 짊어지고 온 고리짝을 대청마루에 내린 뒤 끈을 풀어 열고 갓·유건 아래에서 탕건을 꺼내 이진사에게 건넸다. 이진사가 바로 머리에 써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이번엔 좀 작아. 이것 보게, 머리에 꼭 끼잖아. 금고아(손오공 머리띠)보다 더 죄네.”
오생원이 한숨을 토해냈다.
“진사 어른, 지난번에 어르신 머리 둘레를 재어 그대로 만든 겁니다. 몇번 쓰면 늘어나요.”
이진사와 오생원은 한참 실랑이를 했다. 그러다가 오생원이 탕건을 양손으로 잡고 ‘북-’ 찢어버리고선 고리짝을 어깨에 둘러멨다. 대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뒤돌아 침을 ‘퉤’ 뱉은 오생원은 씩씩거리며 주막으로 가서 막걸리 한호리병을 후딱 비웠다. 그러고선 국밥 한그릇을 시켰는데, 반쯤 먹다 말고 냅다 소반을 걷어찼다.
“주모 이년! 이거 네년 ○○털이지, 꼬실꼬실한 걸 보니.”
고래고래 고함을 치자 툇마루·멍석·객방에 앉은 손님들의 온 시선이 갓장수 오생원에게 박혔다. 부엌에서 주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와 오생원이 국밥 속에서 나왔다는 털을 받아들었다.
“토란 줄기를 벗기면 이런 실이 나온다오. 눈 좀 똑똑히 떠야 쓰것소. 오라버니~!”
주모의 부름에 뒤꼍에서 어깨가 떡 벌어진 주모의 기둥서방이 뚜벅뚜벅 나오더니 바위 같은 주먹으로 번개처럼 한방을 날렸다. ‘퍽-’ 갓장수 오생원은 순식간에 왼쪽 눈을 감싸고 평상에서 나가떨어졌다.
오생원은 배짝 말랐다. 성질이 불같이 급하니 살이 붙을 사이가 없다. 오늘만 해도 제 성질에 못 이겨 탕건 하나 날렸지, 주막에서도 부서진 소반에 박살난 국그릇과 깨진 접시값을 물어줬다. 그뿐인가, 눈두덩은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이렇게 불 같은 성질로 화를 입은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생원은 한쪽 눈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다 주막집 평상에서 굴러떨어지면서 허리도 아프고 부아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장삿길에 오를 수 없어 집으로 향했다. 밭둑 길을 돌아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는 중에 노스님과 동행하게 되었다.
“자네가 주막에서 낭패를 당할 때 나는 툇마루에서 국수를 먹고 있었네.”
“소인도 스님을 보았습니다요.”
“자네, 불 같은 성질 때문에 낭패본 게 한두번이 아니지?”
오생원은 스님의 물음에 주막집으로 오기 전 이진사 집에서 탕건 찢은 얘기와 함께 그 전에도 성질을 못 참아 화를 입은 일들을 술술 털어놓았다.
“쯧쯧, 그래도 정말 큰 낭패는 당하지 않았군. 살(殺)이 끼었을 때 화를 못 참으면 살인을 하는 게야. 그러면 자네도 사형을 받아.”
노스님이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욱하고 끓어오를 때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세번만 외워.”
갈림길에서 노스님과 헤어질 때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오생원은 혼자 밤길을 걸으며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중얼거렸다.
스무날을 잡고 장삿길에 나섰다가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밤은 깊어 삼경(밤 11시~새벽 1시 사이)이 되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처마 밑에 낯선 짚신이 보이고 마루 구석엔 바랑이 있지 않은가.
오생원은 순간 눈이 뒤집혔다. 시퍼런 낫을 찾아 들고 방문을 박차니 마누라가 까까머리 중놈과 부둥켜안고 자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오생원은 치켜든 낫을 내리치려다가 언뜻 노스님이 당부한 말이 생각나 잠깐 멈췄다.
“여보, 여동생이….”
“형부!”
시집갔다가 소박맞은 마누라의 여동생이 자취를 감춰 모두들 죽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10년 만에 여승이 되어 제 언니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