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m가 넘는 발원자 명단에는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인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붉은 박스)’가 등장하고 있다. 사진제공=미술사연구회. |
10m 넘는 비단에 빼곡히 기록
발표자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
바늘주머니 등 처음 보는 유물도…
청양 장곡사의 숨겨진 보물이 베일을 벗었다.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의 복장유물이 지난해 극적으로 되돌아오면서, 이 성보들을 구체적으로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미술사연구회는 지난 12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을 주제로 전국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불상의 복장유물은 1950년대 개봉됐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 반세기 넘게 행방불명 상태였다. 그러던 중 2012년 서호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물 찾기에 나섰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1년 동안 수소문한 끝에 유물의 실체를 확인해줄만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개봉 당시 도난방지 및 보존 차원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는 1950년대 학술논문을 찾아낸 것이다. 이후 스님은 박물관 측에 성보를 제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뜻을 줄기차게 피력했으며, 이런 사찰 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발원문을 포함한 44점의 복장유물을 찾아왔다. 현재 유물들은 안전을 위해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해 보관중이다.
금동약사여래좌상의 복장유물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발원문이다. 1346년(고려 충목왕 2년) 불상 조성 당시 참여한 1078여명의 시주자 이름과 백운스님의 발원문이 홍색으로 천연염색을 들인 한 폭의 비단에 빼곡히 기록돼 있다. 그 길이만 10m(가로 1058cm, 세로 48cm)가 넘는다. 같은 해 서산 문수사에서 조성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 조성에 323명이 참여한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이 발원문은 고려시대 약사불 조성 및 발원에 관한 유일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날 학술대회 발표자들도 바로 이 복장 발원문에 주목하고 관련 논문들을 발표했다. 신은제 부산 동아대 교수는 “1000명 이상의 명단이 복장 발원문에서 확인된 것은 유례없는 경우”라며 이를 토대로 당시 불사에 참여한 발원자들과 발원내용을 심층 분석했다. 특히 신 교수는 공민왕(1330~1374)의 몽골식 이름인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가 등장하는 사실에 주목했다. 신 교수는 “당시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면서 “공민왕은 전례에 따라 볼모로 원의 연경에 있었지만 공민왕과 관련 있는 인물이 그를 대신해 불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
아름다운 오방색과 한 땀 한 땀 놓은 바느질이 그대로 남아있어 학계 연구자들을 놀라게 한 바늘집노리개(바늘주머니). 사진제공=미술사연구회 |
발표자로 나선 정은우 동아대 교수도 “아름다운 오방색과 한 땀 한 땀 놓은 바느질이 그대로 남아 있어 놀랍다”며 향후 이 복장유물의 정확한 용도를 밝히기 위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편 복장(腹藏)이란 부처님을 조성할 때 부처님 배 안에 사리와 경전 등을 넣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