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불교관련

거사(居士)

淸潭 2015. 9. 16. 10:14

거사(居士)


집에 있는 남자로 불교에 귀의한 사람을 말한다.

재가신자 중 남자를 뜻하는 우바이와 성격이 비슷하다. 집주인 또는 집에 있는 남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 그라파티(grha-pati)에서 유래하였다. 재산이 많은 자산가를 의미하여 경전에는 장자(
長者)라는 표현으로 많이 등장한다. 불교에 수용된 이후에는 불교에 귀의한 재가신도 중 남자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쓰였다. 중국이나 한국 등 동양권에서는 유교에서 유래한 처사(處士)와 혼동되어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신도를 보통 ‘보살’이라 칭하고, 남자신도를 ‘거사’라 부른다. 여기서 거사(
居士)란 불교를 믿는 남자 신도란 뜻이다. 산스크리트어는 grhapati이며, 가라월(迦羅越 또는 伽羅越)로 음사했다. 중국에서는 장자(長者), 가주(家主), 가장(家長)으로 한역했다.

현재는 삼귀(
三歸)와 오계(五戒)를 받은 남자 신도로, 곧 재가 남자신도들의 법명 밑에 붙이는 경칭이 되었다.

초기불교에서 승가(
僧伽)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 사부대중으로 구성했으며, 우바새와 우바이는 비구, 비구니를 믿고 그들을 외호(外護)하는 사람들로 우바새가 거사에 해당한다. 그 뒤 대승불교의 발전으로 출가하지 않고 속가에 있으면서 불도를 정진하는 수행자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남자 또는 세속 생활에 종사하면서도 수행에 힘쓰는 재가 남자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 됐다.

승단의 외호와 함께 비록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정진하는 남자 신도들을 일컫는 말로 넓어졌다. 유명한 거사로는 혜원거사와 유마거사가 있다.


이한상·장경호 거사 재조명 필요하다


최근 근현대 불교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재가불자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대한불교진흥원에서는 9월을 ‘대원 문화의 달’ 로 지정하고 대원 장경호 거사를 추모하는 기념행사와 더불어, 학문과 불교운동 면에서 큰 족적을 남긴 서경수 교수, 김기추 거사 등 재가불자 3인에 대한 기념발표회를 잇달아 개최한다.


장경호 거사는 대한불교진흥원 설립자로서 어려운 시대에 불교 발전을 위해 커다란 역할을 했던 불교운동가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재조명은 근 현대 한국불교 발전의 발자취를 더듬는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경호 거사와 함께 근대 한국불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덕산 이한상 거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세미나 개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출판물과 더불어 그의 주도로 이루어진 <한국근대불교백년사> 자료집의 한글화 작업 등이 진행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경전에는 유마거사나 승만부인과 같은 뛰어난 재가불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이들이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삼국시대에 원효. 의상스님과 같은 반열로 숭앙되던 윤필거사를 비롯해 부설거사 등 수많은 재가불자들이 불교발전에 힘써왔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지금처럼 성장한 데는 승가와 함께 재가에서 불교발전에 헌신한 재가들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업적을 기려 후세 불자들의 귀감으로 삼는다면 불교가 더욱 성장하는데 훌륭한 밑거름이 될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재가불자는 불교 발전의 한 축이다. 재가불자에 대한 조명을 통해 앞으로 제2, 제3의 대원, 덕산거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거사(居士) 와 처사(處士)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많은 사찰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몇몇 스님들과 부녀자들에 의하여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 시대에 남자들이 절에 간다는 것은 뜻이 있어 출가를 결심한 사람을 제외 하고는, 그야말로 할 일 없고 호구지책으로 절을 찾아간다거나, 아니면 떠돌이 신세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실을 도피하고자 찿아든 자들이 많았다. 그러니 그 시절 절에 가는 남자들을 자연스럽게 무능력한 ‘처사’라고 불렸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불교가 대중화 되고 각종 법회와 수련회, 템플스테이등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으로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을 배우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중에 특히 사회적으로 기반을 닦고 생활에 여유를 갖는 40대 이후 중년 남자 신도들이 절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재가신도 특히 남자 신도들에게 부르는 호칭에 문제가 있다.


출가 스님들은 같이 공부하고 수행하는 스님을 ‘도반(道伴)’이라 하고, 일반 재가불자들이 법회에 참석하여 부처님 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자들은 ‘법우(法友)’라 하여 상호 존중으로 이름 뒤에 붙여 사용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분이나 나이차이가 많이 나면 스님들은 법명 뒤에 ‘○○스님’ ‘큰스님’ 또는 직책에 따라 ‘주지스님’ ‘총무스님’등 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재가불자 특히 남자신도를 부르는 데는 통일되지 않고 있다. 여자신도님은 이름 뒤에 ‘보살님’으로 통칭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남자신도를 부를 때 일부 스님이나 여자보살님들이 유교문화의 잔존인 ‘처사’라고 불러지고 있어 매우 잘못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금강경」에 무엇 무엇 때문에 단지 이름이라 한다. 라는 말이 곳곳에 나온다. 한 예로 제9분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에 부처님의 제자 중 성문승의 수행 단계별로 각기 이름이 있으니, 「색성향미촉법을 잘 다스려 밖의 경계에 물들지 않고, 성인의 무리에 들어갔다(入流)하여 이름을 수다원(須陀洹)이라 부르며, 일반중생은 수많은 윤회를 거듭하지만 성인의 두 번째 단계인 사다함의 경지에서는 한 번만 갔다 오므로(一往來) 이름을 사다함(斯陀含)이라 부르며, 성인의 세 번째 단계인 아나함의 경지에서는 다시는 윤회를 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을 자(不來)라 하여 이름을 아나함(阿那含)이라 부르며,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하여(實無有法) 이름을 아라한(阿羅漢)이라 부른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이름을 갖게 된다. 사람도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이름을 지어준다. 그 이름에는 소망이 담겨있다. 이름처럼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름으로 인하여 잘되기도 하는가 하면, 이름으로 인하여 그 이름에 구속을 받는 경우도 있다.


「금강경」 곳곳에 다만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름은 단지 이름뿐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할 수 있지만 이름 또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교단을 구성하는 요소를 사부대중이라 한다.


「금강경」 제32분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설하여 마치시니 장로수보리(長老須菩提)와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와 일체세계 천인아수라들이 모두 기뻐하고 받들어 봉행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사부대중이라 하여 부처님 당시부터 불교교단을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즉 남자스님을 비구(Bhiksu), 여자스님을 비구니(Bhiksuni), 남자신도를 우바새(Upasaka), 여자신도를 우바이(Upasika)라고 한다. 출가 스님인 비구, 비구니는 말할 것도 없지만 재가 신도인 우바새, 우바이는 불교를 믿고 착한 일을 행하며,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지키는 재가신도들이다. 오늘날 출가스님을 비구, 비구니라 부르는 것은 귀에 익숙하게 들리지만 재가신도를 우바새, 우바이로 부르는 종단이나 사찰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불교 종단이 출가 스님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또한 재가신도는 남자신도 보다는 보살이라 칭하는 여자신도 중심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살(菩薩)이란 범어 보리살타(Bodhisattva ; 菩提薩)의 준말로 보리(Bodhi)는 진리, 깨달음[]이고, 살타(sattva)는 중생(衆生), 유정(有情)이니 「깨달음 속에 있는 중생」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보살은 깨달음의 마음을 내며[上求菩提], 중생을 제도하는 것[下化衆生]을 최상의 과제로 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란 부처보다 한 단계 낮은 경지에 있는 수행이 깊고 원력이 높은 자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모두가 보살이 되어야 하며, 보살운동을 전개하여야 마땅하다. 이렇게 훌륭한 이름을 여자 신도를 부를 때만 사용한다.


거사(居士)란 말은 부처님당시 재가남자신도로 덕이 높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 유마힐(維摩詰)거사 이름에서 유래한다. 거사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지키며 불교신행(信行)을 하는 재가 남자신도를 ‘거사’라 부르다. 유마거사의 「유마경」에는 ‘부처는 한 가지 소리로 설법하지만 중생은 이를 여러 가지로 듣는다.’고 하는 유명한 가르침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유마거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믿음이 얼마나 견고하고 수행과 덕이 높은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남자 신도를 ‘거사’라 불러져야 하고, 또한 남자 신도 역시 유마거사와 같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선업을 쌓고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지키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반면 처사(處士)란 유교사상을 이념으로 한 조선조 시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골에 낙향하여 은둔과 도피, 세상을 부정과 원망으로 할 일없이 세월을 보낸 무능한 남자들을 처사라 하였다. 이렇게 좋지 못한 이름을 일부 스님이나 여자 신도님들이 재가불자 남자 신도를 부를 때 ‘처사’라고 부르는 것은 불자로서 매우 유감이다. 이러한 배경은 아마도 조선조 500년을 지내 오면서 여자신도들의 역할보다 남자신도들의 역할이 전무 하다시피 하지 않았나 생각이 되며 또한 남자신도 스스로가 반성하여야 할 부분이다.


타 종교에서 신분계급을 나타내는 말 중 장로(長老)와 집사(執事)라는 말이 있다. 이는 본래 불교용어이다. 장로(Ayusmart ; 長老)는 범어 ‘아유솔만’이라 하여 음역하면 존자(尊者), 구수(具壽)라고 번역한다. 장로란 덕()이 높고 수행을 많이 하여 지혜와 도덕이 뛰어나고 나이가 많은 분을 일컫는다.


「금강경」 제2분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 「장로수보리존자(長老須菩提尊者)가 대중가운데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장면이 나오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32분에서 장로 수보리가 나온다. 이미 부처님 당시부터 장로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집사(執事)란 절집에서 온갖 살림을 맡아 꾸려가는 사람을 집사라 하였다. 즉 오늘날 원주소임 역할을 하는 스님을 집사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장로와, 집사는 불교집안에서 사용하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로 빼앗기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처사’라는 이름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일부 잘못된 소견을 갖고 계신 분이 있다. “공부를 많이 한 남자신도를 거사라 하고, 그렇지 못한 일반 남자신도를 처사라 한다.”라는 그릇된 소견을 갖고 계신 분이 있다. 그런가 하면 불교가 암울한 조선시대에는 일부 스님네들이 자기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스스로를 ‘처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야말로 아무런 근거가 없고, 그릇되게 이해하고 잘못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다르다. 불교가 대중화 생활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상호존중과 남을 높여 줄 때만이 나의 존재 가치도 올라간다. 여자신도는 ‘보살’이라 대단히 높은 칭호를 사용하는데 왜 남자신도는 천박하고 무능력의 상징인 ‘처사’라고 불려야만 하는가? 오늘날 절을 찾는 남자 신도 분들 이야말로 가족을 봉양하고 사회생활에 충실하면서 참 나를 찾고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보살’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보살들을 ‘거사’라 불러야 마땅함에도 유교문화의 잔재, 그것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능력의 상징인 ‘처사’라 불러서야 되겠는가. 불교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삶을 초월하여 살아야 한다. 남자신도들도 반성하여야 한다. 할 일 없이 그저 절에만 왔다가 기웃거리고 돌아가는 ‘처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적극적으로 사찰행사에 참여하고 사회생활 하면서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지키고 수행을 더불어 실시하는 ‘거사’가 될 때 참된 대중불교, 생활불교가 되리라 생각한다. 일부 스님들이나, 여자 보살님들께서도 자각을 하셔서 남자신도를 당당하게 ‘거사’라 불려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