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해심밀경(解深密經)[성철스님 법어집]

淸潭 2015. 7. 9. 09:32
해심밀경(解深密經)[성철스님 법어집]

해심밀경(解深密經)[성철스님 법어집]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심의식의 비밀한 뜻을 설하리라. 광혜야, 너는 마땅히 알아라. 육 도의 생사에 있는 저 유정(有情)들이 저 유정들의 무리 가운데 떨어질 때, 혹은 알로 나고 혹은 태로 나고 혹은 습기로 나고 혹은 화해서 나고 혹은 분신해서 난다. 그 가운데 최초 일체 종 자의 심식이 성숙하고 반복하여 화합하고 더욱 자라나 커지니 두 가지 집수(執受)에 의지하느니라. 
첫째는 유색(有色)의 모든 근과(그것이)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수요, 
둘째는 상명(相名)분별의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수이다. 유색계 중에서는 두가지 집수 를 구비하며, 무색계 중에서는 두 가지 집수를 구비하지 않느니라. 

광혜야, 이 식을 또한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니 왜냐하면 이 식이 몸에 따라다니며 집지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니 왜냐하면 이식이 몸 가운데서 섭수하고 간직하여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같이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심(心)이라고 하니 왜냐하면 이식이 물질·소리·향기·맛·감촉 등을 쌓이고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니라. 이때 세존께서 거듭하여 이 뜻을 밝히고자 게송을 설하셨다.

아다니식은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명하지 않노라. 일체 종자가 폭포수 흐르듯 하니 저들이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두려워하노라.

 

吾當爲汝說心意識秘密之義하리니 廣慧當知하라. 於六趣生死에 彼彼有情이 
墮彼彼有情衆中할새 或在卵生或在胎生하며 或在濕生或在化生하며 或在身分生起하니 
於中最初一切種子心識이 成熟하고 展轉和合하여 增長廣大하니 依二執受니라. 
一者는 有色諸根及所依執受요 二者는 相名分別言說戱論習氣執受라. 有色界中에는 
具二執受하고 無色界中에는 不具二種이니라. 廣慧此識 亦名阿陀那識이니 何以故오. 
有此識이 於身에 攝受藏隱하여 同安危義故니라 亦名爲心이니 何以故오 有此識이 
色聲香味觸等의 積集滋長故니라.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頌曰 阿陀那識이 甚深細하여 我於凡愚에 不開演하노라. 一切種子如瀑流하여 恐彼分別執爲我하노라.

                                                                               [解深密經 ; 大正藏 16, p. 692 중.하]

 

 

'심의식'에서 심(心)이란 제8아뢰야식이고, 의(意)란 제7말나식이고, 식(識)이란 제6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의식이란 8식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곡식 같은 것이 다 자라서 시들면 종자만 남아 그로부터 다시 싹이 돋아나듯이, 유정(有情)이 생멸할 때에 사람의 심식도 그러해서 사람이 죽은 뒤에 일체의 종자식이 남아 윤회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곡식의 종자가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정의 근본식이 종자식이 되어서 그로부터 모든 생사가 벌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즉 종자식이 주위의 환경과 여러 가지로 화합하여 증가하고 자라므로 생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일체 종자식은 두가지 집수에 의지하여 자라납니다. 하나는 유색(有色)으로 된 육근(六根)과 그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고, 다른 하나는 모습과 이름으로 인한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근본이 되어 우리의 종자식을 훈습하게 되며 육도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단계(三界) 가운데 유색계 중에는 생사가 있으므로 두가지 집수를 다 구비하고, 무색계 중에는 본래 주관과 객관이 떨어진 곳이므로 두 가지 집수를 모두 구비하지 않습니다.

'아다나(阿陀那 : adana)'란 번역하면 '집지(執持)'인데, 아뢰야의 다른 이름입니다. 집지란 가진다는 말인데 선업이나 악업의 세력 등 모든 종자를 온전히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아다나식은 유정의 몸에 언제든지 따라다니는데, 이것이 없어지면 종자의 근본이 없어지므로 모든 식의 뿌리가 다 빠져버립니다.

'아뢰야(阿賴耶 : alaya)'는 '무몰(蕪沒)'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뢰야식이 유정의 몸 가운데서 모든 것을 섭수하고 창고처럼 저장하여 편하든지 고생하든지 간에 늘 이것이 근본이 되어 활동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려면 아뢰야식을 두드려 부수지 않고는 절대로 대자유한 대열반을 증득할 수 없습니다.

일체의 종자를 또한 심(心: citta)이라고 하는데 이 식으로 말미암아 색성향미촉 등이 쌓이고 생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아다나식이 곧 아뢰야식이고, 아뢰야식이 곧 종자식이며, 종자식이 곧 심입니다. 이처럼 제8식은 여러 가지 성질에 입각하여 각각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야뢰야식이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명하지 않노라"고 한 까닭은 말해도 못 알아듣고 도리어 반대를 하고 비방만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학자들도 아뢰야식이 있다는 증거를 댈 수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이르러서 윤회가 어느 정도 확증이 된만큼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윤회하는 근본종자가 없어지게 되므로 여기에서 아뢰야식이 결국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것이 객관적인 증명의 일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일체 종자가 폭포수 흐르듯 하여 중생이 그것을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두려워하노라"고 한 까닭은 중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영원불멸하는 자신의 실체로 삼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일체 중생은 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생사를 윤회하게 됩니다. 여기에 전쟁을 포함시켜도 상관없고, 설사 포함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생사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시간적으로만 다를 뿐 윤회라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유식에서 논의하는 아뢰야식 사상은 후세에 발달된 사상으로서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에서는 이런 사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불교의 원시경전 중에는 심의식설도 있고 종자식설도 있었으며 아뢰야식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다나라는 용어는 없지만 아뢰야라고 하면 아뢰야 속에 집장(執藏)·능장(能藏)·소장(所藏)의 뜻이 내재되어 있는만큼 그 뜻이 서로 통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나라는 이름이 없다고 해서 아뢰야연기설이라는 것이 후세에 새로이 나온 사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시 경전에 거의 다 원초적으로 설해져 있는 것을 그 뒤에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불타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