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보시와 지계, 그리고 위빠사나가 삶의 세 가지 핵심”

淸潭 2015. 7. 5. 11:46

아신 냐니사라 스님

“보시와 지계, 그리고 위빠사나가 삶의 세 가지 핵심”

임은호 기자  |  eunholi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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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23  13: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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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냐니사라 스님은 “우리가 가져야 할 재산인 보시공덕을 갖고 참된 삶을 위한 계율공덕과 지혜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보(三寶)를 사랑하는 한국의 불자들을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게 돼 무척이나 기쁩니다. 오늘 법회에서는 담마야나선원 수행자들에게 삶의 가치와 핵심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축제 즐기던 사리불과 목건련
한 편의 연극보고 죽음 절감
삶에서 죽음은 정해진 결론

미스코리아 처럼 아름다워도
결국 무너지고 사라짐 알아
오온 관조해 지혜 공덕 쌓아야

 

부처님 회상에서 가장 뛰어났던 제자 중에 지혜제일 사리불과 신통제일 목건련이 있습니다. 두 분은 부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만큼 훌륭한 분들이었습니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라자가하(왕사성)와 나란다의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두 분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답게 인생을 즐겼습니다. 라자가하라는 도시는 대구처럼 산이 빙 둘러싸고 있는 곳인데 산 정상에서는 매달 보름마다 여러 축제가 열렸습니다. 당시 인도사람들은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을 숭배했습니다. 자연이 모두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강과 바다도 모두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제사와 축제를 산 정상에서 보름마다 열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해와 달, 별 등을 신으로 모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워서입니다. 물이나 불로 인한 재앙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무서움을 해결하기 위한 의지처로 해와 달, 별을 숭배하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욕심이나 욕망 때문입니다. 부유하고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해와 달, 별 등을 신이라 믿게 됐습니다. 어찌됐든 이런 현상은 종교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 등 자신의 분노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의지하게 되는데, 이렇게 탄생된 종교는 삿된 종교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시기 전 인도에는 스스로를 부처라 말하는 가짜 부처들이 많았습니다. 육사외도(六師外道)가 대표적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삿된 이론은 62가지로  더 확대되고 더 갈래를 나누면 162가지 확장됩니다. 여기 모인 우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담마야나’입니다. 그렇다면 삿된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은 ‘아담마야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리불과 목건련도 인도 당시의 풍습에 따라 축제를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 정상에서 열리는 축제에 너무 늦게 가는 바람에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뒤에서 축제를 구경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연극이 시작되자 맨 뒤에 있는 관계로 배우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종합적으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연극을 한참 보다 두 분은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됩니다. 축제의 현장에서 배우들이 울면 관객들도 울고 배우들이 웃으면 관객들도 웃었습니다. 사실 연극이라는 것이 거짓인데 관객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울고 웃고 있습니다. 두 분은 지혜가 있는 분들이라 이런 현장을 보면서 불현듯 우리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연극과 같았습니다. 또 연극에 끝이 있듯 우리의 삶도 모두 끝이 있습니다. 특히 죽음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힘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피해갈 수 없습니다. 지금 앞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들과 관객들은 100년 후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연극과 같은 삶을 살다가 그렇게 죽어갈 것입니다.

사리불과 목건련 두 분은 축제의 현장에서 우리 삶의 진실을 보게 됩니다. 오욕락(五慾樂)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우리는 죽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걸 직시한 두 분은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죽음이 있다면 죽지 않음도 있지 않을까.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가벼움이 있으면 무거움이 있듯이 그런 길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제는 축제에 참석하는 대신 죽지 않는 법을 찾아 나서겠다고 다짐하며 산을 내려옵니다. 그리고 두 분은 바로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리불과 목건련이 출가하던 때는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기 1년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른 법을 만나지 못하고 외도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분은 당시 회의론자로 알려진 산자야를 찾아가서 제자가 됩니다. 워낙 뛰어난 분들이라 불과 일주일 만에 산자야의 모든 가르침을 통과합니다. 그러나 산자야의 가르침을 모두 통과하고 나서 느끼는 감정은 허무였습니다. 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깨와 콩을 짜야하는데 마치 돌을 짜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돌을 짜서는 기름을 얻을 수 없듯이 산자야의 가르침으로는 죽지 않은 법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산자야를 포함한 육사외도 모두의 가르침이 삿된 까닭에 진리를 얻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어쩔 수없이 산자야 밑에서 계속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 회상에서 이뤄지던 안거가 끝나자 부처님께서 전도를 선언합니다. 함께 수행하고 있던 제자 60명에게 함께 가지 말고 모두 다른 곳으로 가서 전도를 하라고 당부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 처음으로 제자로 맞아 진리를 설했던 초전법륜의 다섯 비구 중 막내인 아사지 스님은 그렇게 해서 라자가하로 오게 됩니다. 사리불은 거리에서 탁발을 하고 있는 아사지 스님을 우연히 만납니다. 사리불은 아사지 스님이 모습에서 육사외도와는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청정함과 거룩함, 그리고 자비로움이 응축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사지 스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스님의 모습은 다른 사문들과 전혀 다릅니다. 평화롭고 고요하고 자비롭습니다. 어떤 스승을 모시고 수행을 하기에 이런 모습이 됐습니까?” 그러자 아사지 스님이 대답합니다. “저는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제자입니다.” 사리불은 진리를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탁발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사리불의 진지한 이야기를 들은 아사지 스님은 나무 그늘 밑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아사지 스님과 사리불의 대화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사리불의 혜안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사람들은 진리가 스쳐지나가는 것만을 봐도 한눈에 알아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리불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아사지 스님은 짧은 게송으로 부처님의 법을 전했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 일어나고 원인에 의해 사라진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는 오온(五蘊)은 고통이고 그 고통을 소멸하기위해서는 사성제(四聖諦)를 알아야 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게송을 들은 사리불은 그 자리에서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깨달아 수다원과를 얻게 됐습니다. 게송 하나로 바로 정견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리불은 이 게송을 통해 잘못된 견해, 잘못된 신심, 잘못된 앎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에 기뻐한 사리불은 목건련과 한 약속을 기억해 내고 바로 목건련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 게송을 들려주자 목건련도 바로 수다원과를 이뤘습니다. 아사지 밑에서 사리불과 목건련과 함께 수행하던 500명이 모두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부처님은 1000명의 제자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오시게 됩니다. 그때 머무르신 곳이 빔비사라 왕이 보시한 죽림정사입니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스승 산자야에게도 진리를 찾았다며 같이 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스승 산자야는 거절했습니다. 유명한 스승은 자신들이 가르침이 잘못됐음을 알아도 권위와 명성 때문에 쉽게 자신의 견해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리로 향하는데 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이들을 위해 삶의 핵심 3가지를 일러줍니다.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하면 핵심이 없는 껍질에 불과하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핵심과 껍질을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바른 견해는 무엇인가. 첫째는 보시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죽을 때는 가져갈 수가 없다. 오로지 보시를 통한 공덕만의 나의 재산이다. 둘째는 계율이다. 누구나 참된 삶을 살고 싶지만 결국은 죽는다. 오로지 계율을 지키는 삶만이 지혜로운 삶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계율은 지키는 삶이 참된 삶이다. 셋째는 지혜다. 오온을 관조해 그것이 모두 진실이 아닌, 결국은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미스코리아처럼 예쁘고 아름다워도 결국은 무너지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온이라는 무더기에 집착하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져야 할 재산의 핵심은 보시공덕입니다. 건강하고 참된 삶의 핵심은 계율공덕입니다. 그리고 오온을 관조해 지혜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500명의 제자들은 이 법문을 듣고 모두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됐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열심히 정진해 반드시 아라한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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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은 6월6일 서울 불광산사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아신 냐니사라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냐니사라 스님은

아신 냐니사라 스님은 1937년 2월 미얀마 바고주 떼공지역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해 사미계, 1958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0년 상가대학에서 법사자격인 ‘담마짜리야’와 ‘붓다 데사나’ 시험에 합격했으며 같은 장소에서 포교 관련 과목을 이수했다. 1967년부터 5년 동안 밧단따 빤디따 스님의 가르침 아래 팔리어 삼장, 청정도론, 밀란다왕문경 등을 영어로 숙지했다. 스님은 미얀마 자카잉, 양곤, 만달레이에 시따구 국제불법학교(Si-tagu International Buddhist Academy)를 설립하고 총장을 맡아 해마다 1000여명의 스님들을 교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