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寧越 彰節書院

淸潭 2015. 4. 28. 20:54
 

 

 

 

 

 

 

 

 

 

 

 

寧越 彰節書院

 

 

 

 

 

 

창절서원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에게 의해 피살되거나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배견루

창절서원의 정문 누각으로 단정대왕이 승하후 두견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어

단종대왕을 사모하는 충심의 뜻이 담겨있는 현판으로

6.25때 소실되고 1964년 서원 원장을 역임한 정연홍님의 친필 현판입니다.

 

 

 

 

 

 

 

 

 

  

 

 

 

 

 

 

 

 

 

 

 

 

 

 

 

 

 

 

 

 

  

 

 

 

 

 

 

 창절사

10충신의 위패를 모신곳입니다!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 김시습, 남효은, 박심문, 엄흥도)

 

 

 

 

 

 

 

육신사

 창절사 10충신 위패를 모신 창절사 출입문 입니다.

 

 

 

  

  

 

동재

유생이 거처하여 글을 읽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사무실로 사용해요.

 

 

 

 

 

 

 

 

 

 

 

 

 

 

 

 

 

 

 

 

 

 

 

 

 

 

 

서재

 창절서언 서편에 있는 집

구한말에 소실된 것을 2000년에 준공하고 창절사당 및 서원강당에 봉안된 현판이 퇴색되어

알아볼 수 없어서 재정비하여 설치했다고 합니다.

 

 

 

 

 

 

 

 

 

 

 

 

 

 

 

 

 

 

 

 

 

 

 

 

 

 

 

 

 

 

 

 

 

 

 

 

 

 

 

▲ 사진: 2015년 4월 24일 답사

 

 

 

 

창절서원(彰節書院)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서원이다.

 

1685년 충정공

박팽년(忠正公 朴彭年) 및 사육신를 모시어 배향하기 위해 지어졌고,

 1699년 사액을 받았다.

  

생육신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창절서원은

 조선 제6대왕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을 위시한 10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도내 사당이나 서원 중 가장 규모가 크다.

  

1685년(숙종 11) 단종,

당시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보수할 때

강원감사 홍만종(洪萬鍾)의 발의로 묘 아래쪽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키 위한

 사당으로 육신사가 세워졌는데 이것이 창절사의 전신이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노산묘가 장릉(莊陵)으로 추증되고, 1705년(숙종 31) 육신사가

장릉 밖으로 이건하면서 창절사라 명하게 되었다.

 

1791년(정조 15) 생육신(生六臣)인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을 추가로 모셨고,

 1828년(순조 28) 단종 폐위 시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와 박심문(朴審問)을

추가로 배향하여 총 10인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창절사는 원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사당만을 지칭하였지만 지금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향교와 유사한

모습으로 확대되었다.

  

담장으로 구획된 창절사 영역은

 정문에 해당하는 문루와 서원과 사당을 갖추고 있는데

정문인 배학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계 건축이고, 강학 기능을 갖춘 창절서원은 중앙에 6간 대청을 갖춘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며,

 

 삼문을 지나

 한단 높은 제사공간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창절사와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배치되어 있다.

  

도내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창절사(彰節祠) 건립취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에 의하여

 피살되거나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원래 장릉(莊陵) 곁에 육신창절사(六臣彰節祠)가

있었는데, 1685년(숙종 11) 강원 감사 홍만종이 도내의 힘을 모아 개수하여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와 박심문(朴審問)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 등을 모셔서 팔현사(八賢祠)가 되었다.

1791년(정조 15) 창절사에 단을 세우고 생육신 중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을 추가로 모시고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2. 영월읍사무소에서 제천방향으로 약 50m지점의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11년(1685)에 강원도 관찰사 홍만종(1643∼1725)이 단종의 사우가 협소함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증축을 간청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은 당시의 영월부사인 조이한으로 하여금 사우 옆에 따로 사육신사를

세우게 하였으며, 그 현판은 송시열(1607∼1689)이 썼다. 여기에 사육신 외에 엄흥도의 위패도 봉안되었다.

숙종 25년(1699) 3월에 단종이 복위됨에 따라 장릉 경내에 육신사우가 있다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숙종 31년(1705)에 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숙종 35년(1709)에는 영월 유생 엄야영 등의 소청에 따라 「창절사」라는 사액을 내리게 되었고

이 현판을 권상하(1641∼1721)가 썼다.

 

영조 19년(1743)에 엄흥도를 공조참의로 추증하고, 영조 34년(1758)에 사육신을 증직하였다.

정조 12년(1788)에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창절사를 둘러보고 강당과 배견루가 허물어질 염려가 있어

이의 보수를 주청하자 정조가 허락하였으며, 친히 제문까지 지어 주었다. 이때 엄흥도의 정려각도 함께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정조 15년(1791)에는 금시습과 남효온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순조 28년(1828)에 엄흥도를 공조판서로 추증하고, 창절사를 「창절서원」으로 개칭하였으며,

순조 28년(1828)에 박심문을, 순조 33년(1833)에 엄흥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창절서원은 1892년부터 1898년까지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수되었으며,

배견루는 박심문의 후손인 박교묵이 종중의 협조로 이룩하였다고 한다.

서원의 문루는 배견루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2층누각의 팔작지붕이다.

그 현판은 한국전쟁때 없어져 1964년에 새로 쓴 것이 걸려 있다.

창절서원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이며, 현판은 윤사국이 서액한 것이며

기둥에 주연시 2구의 판목이 걸려 있다. 내삼문에는 「육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문을 통해 사당으로 들어가면 정면 5간, 측면 2간칸의 맞배지붕의 창절사와 좌우에 동·서가 있다.

 사육신을 비롯하여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 엄흥도가 배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올린다.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7, 《문화재안내문안집》;

영월군, 1995, 《영월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한림대학교박물관·강원도·영월군, 1995,《영월군의 력사와 문화유적》.

 

 

 

 

1999년 10월 5일 사단법인 영월창절서원이라 개칭하고

매년 가을 10월 9일에 제사를 지내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향사를 올린다고 해요.

 

현재 지방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창절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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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명상] -  내 안에 우는 눈물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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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소운(小雲)|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