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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바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애국가를

淸潭 2015. 3. 2. 10:49

복바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애국가를

 

10시 시보와 동시에 독립선언문낭독이 시작된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귀에 익숙한 선언문이 아니라 새말로

바뀐 선언문이다.

 

"삼일운동 기념 선언문이면 됬지 무슨 대수냐? 어? 참! 태극기"

선반에 올려 두었든 태극기를 끄집어 내 거실 밖 베란다 틀에 끼워 달고 주변 아파-트를 둘러 보았다.

눈 부릅뜨고 유심히 살펴 보기 전에는 한개의 태극기도 볼 수 없다.

 

근엄한 회의장에 애국가 제창이 거행된다.

취주악의 울림만이 거창하고 참석자들의 눈은 감겨 있거나 따라 부르는 입술 흉내 뿐 부르는 것 같지 않다.

 

단지를 대표하는듯한 어느 댁의 경축 태극기

 

거의 정확히 60년 전의 3 1절 기념행사 때였던 것 같다.

 

애국가 제창이 시작되고 1~2분도 지나기도 전에 학도호국단 파견 배속장교가 단위로 뛰어 올라 간다.

다른 교사들에게 버릇없이 대하는 20대 초반 장교와 달리 초급장교지만 연령도 30 대로 중후하고 해방직전에 일본 C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단기 사관학교를 나와 호국단에 배속된 분으로 예의에 벗어 난 짓은 않는 분이지만~

 

이 날은 좀 달랐다. 교장 선생님께 인사도 없이 단위로 뛰어 올라 가는 품이 여간 흥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작 그만! 아이곡가(愛國歌) 그만해!"

나도 그랬지만 앞쪽 줄에서만 붕어 입벌리듯 성의 없이 부르고 있었다.

 

이 분은 일본 태생으로 해방 뒤에 배운 한국말 때문에 거의가 한문 단어는 일본식으로 섞어 읽고 흥분하던가 하면 반 이상이 일본말이 튀어 나오지만 50년도 초에는 의사 소통에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내가 1 4후퇴 때 평양북방에서 총상을 입고 묘향산에서 북한 인민치안대원에게 포로가 되었다. 상대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도 없었고 나는 1949년의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대로만 대답했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아무 것도 못 먹고 허기져 쓰러지기 직전이었고 복부에 입은 부상때문에 버틸 수도 없었지만 그들의 집요한 구타와 심문에 차라리 죽는 것만 못했다.

 

끝까지 대한민국 장교로써 부끄럽지 않게 대응하고 답했다. 그들도 포기한듯 산에서 나를 직결 총살키로 정한 모양이었다.

 

 

눈 부릅뜨고 돌아 봐야 보이지 않는 경축 태극기

 

죽기 전에 그들에게 한 가지만 부탁했다.

"좋다. 말하라"

" 남 쪽에 있는 가족과 내 조국을 바라보고 아이곡가(愛國歌)를 부르게 해 달라"

 

나는 사타구니와 옆구리쪽 총상을 묶은 피에 젖은 태극기를 끄집어 내 목에 걸어 묶었다.

남쪽에  몸을 향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

 

고작 10 년도 못 되는 사이에 생긴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 간다.

1945년 8월 7일  일본 히로시에서 신병 훈련받다가 그 전날 부대배치 되면서 원자폭탄의 비극에서 용케 벗나 살다가 해방을 맞아 아내를 맞고 아이를 얻는 야릇한 행복이 아지랑이 같이 보이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여순반란사건과 6 25사변에 참가하기 위해 단기 장교 훈련을 받고 전쟁에 참여하고 종국에는 공산군의 포로가 되어 부당하게 죽는 모습이 너무나도 억울하지만~

 

이 한반도에 태어난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지만 가족과 위태로운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 하나를 위로하기 위해 부르는 이 "아이곡가"는 나를 위한 마지막 장송가였기에 소리는 작았지만 힘차게 불렀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한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머리 속이 몽롱해지면서 쓸어지려는 찰나였다.

 

"국군 동지! 반갑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요.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西北靑年團" 이요"

나는 이들과 함께 남으로 내려와 아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나를 살리고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이 아이곡가(愛國歌)였다.

느그들! 홍켄니 낫데 후타타비 우타우카?(진심으로 다시 불러 볼래?)

 

배속장교였던 박원복(朴元福)선생은 지금의 노조원들처럼 오른팔을 휘두르며 지휘했고

지루하게 서계시던 장준한(張俊翰)교장선생님은 두주먹 불끈쥐고 열창하고 구둣발끝으로 땅만 파혜치며

경청하던 선생님들과 우리 1,500학생 모두는~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 된 이래 최고의 애국가를 불렀든 것 같다.

 

오래전에 고인이 되신 모든 선생님께 명복을 빌며....

 

- 글 / 日光 -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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