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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세미인 / 오탁번

淸潭 2014. 5. 21. 12:52

 

 


 

 

 

世美人 / 오탁번


-2006년 3월 21일 오후3시
조선시대 다식판 하나 사려고
양성동 골동품 가게에 들렀는데
늙은 주인은 어디 가고
갓 스물 된 아가씨가 손님을 맞는다
볼우물이 고운 복숭아빛 뺨과
몽실몽실한 가슴을 보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희고 미끈한 종아리는
왜무처럼 한 입 베어먹고 싶었다
다식판은 보는 둥 마는 둥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4시 반
천등산 손두부집에 들렀는데
삼원색 요란한 월남치마에
발목 다 보이는 나일론 양말 신은
젊은 아낙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한다
브래지어 한쪽 컵이 망가졌는지
짝짝이 가슴이 봉긋봉곳한
주근깨도 예쁜 아낙의 얼굴을 보며
식사 주문도 잊은 채
정신이 휑하니 아득해졌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6시 반
늙은 느티나무가 새잎을 피우고
저녁놀이 서녘 하늘 물들일 때
내내 방망이질한 가슴 진정시키려고
솔잎술 한잔 마시며
옛 사진첩을 그냥 뒤적거렸다
내가 서른여섯살 되던 가을
서른한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술잔을 엎질렀다
골동품 가게 아가씨보다도
손두부집 젊은 아낙보다도
몇곱절 예쁜 젊은날의 아내가
방긋 웃으며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날부터 지갑 속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며
아침저녁 새새틈틈 보고 또 본다
어느날 다따가
絶世美人이 된 줄도 모르는
아내는
달팽이관이 고장나서
메슥메슥 입덧하듯 토하고 있다
아아 아득히 흘러간 젊은 시절
아내가 아기 배고 입덧할 때
귤 하나 사다줄 생각 못했던 나를
호되게 벌주고 있다

-2007년 1월 12일 오전 9시
새해 들어 입덧 더 심해진
絶世美人의 손을 꼭 잡고
영하 12도 눈보라 치는 날
춘천 성심병원 이비인후과로 간다


내남편도 그랬지. 이 절세미인에게/심여수

 

남자들은 모른다

있을 때 잘 해야한다는 걸

버스 떠나고나서야 놓친 버스 향해 디따 손을 흔들어댄다는

마누라 브라의 컵이야 망가졌거나 말거나

고무줄 늘어진 빤스가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 같거나 말거나

다리에 착착 감기는 꽃무늬 팬티로 바뀌어 옛생각에 젖어들거나 말거나

거실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엔 하루에도 열두번 눈길 주면서

자신의 바지 줄 팍팍 세우는거나 관심 있지

꽃같던 마누라 얼굴에 온통 세월의 주름이 칼같이 날선 것엔 관심없지

칭찬에 인색해서 늘 하는 말이 누구나 다 당신만큼은 하고 산단다

니도 내 돼 봐라 나만큼 하고 살 줄 아나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하고 살 줄 아나

그렇게 한번씩 분통을 엎지르듯 분통을 터트릴 땐 그래도 젊었었지

 

어느날 부터 오탁번의 마누라처럼 달팽이 관이

혼자서 꼿꼿이 가는 게 안스러웠던가 세상과 함께 돌게 만들고

새끼 하나만 더 갖자던 남편 말에 눈 흘기며 뭣을 더 바래? 라며 옆에도 못오게 만들었음에도

수시로 입덧을 하는 마누라에게 행여나 행여나 어리석은 기대를 하더니 

어느날 새벽 안되겠다. 마누라 들쳐업고 종합병원으로 달음칠 치면서

'아직은 아니데이. 내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당신을 떠나 보낼 준비가 안되었데이'

등에 엎힌 세상은 더 돌아가고  내 속의 오물들이 남편의 등어리에 엎질러 놓고도

잘되었다. 실컨 내오물이나 뒤집어 써라.

형벌처럼 쏟아내어도 게안다. 게안다. 당신 맘대로 해라.

 

당직 의사 늦게 진찰한다고 눈부터 부라려 놓고

속 뒤집힌 마누라 침대에 때려 눕혀 이리 몰고 저리 몰고

몇 방을 돌아치며 사진을 찍어대며 눈물 뿌리던 남자.

마누라가 아직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절세미인이었기 때문일까

- 혼자서 그렇게라도 우겨야 지금껏 살수 있었기에 -

일찍 알아보지 못한 절세미인에 대한 회한이었을까

아직은 그나이에 홀애비 소리 듣기 싫어서였을까

얼굴을 마주하고 당당하게 물어보지 못했다, 아직.

그러는 마누라는 무엇이 두려워 눈 부라리며 그걸 따져 볼 수 없었을까

자신도 역시 남의 편이라는 핑계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책감이 들어서였을까

빵구난 양말을 모른채 세탁기에 돌려 다시 말려 반환점 돌아서 서랍장에 가지런히

앉혀 놓은 얄망궂은 심사를 들켜 버려서였을까

하늘하늘 닳아빠진 빤스의 뒷모냥이 허옇게 서리 내린 남편의 뒷퉁수 같아 애잖해서였을까

티셔츠 양쪽 소매자락 다 닳도록 눈감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어 줄 심사 없었던 게 무안해서였을까

절세미인을 미리 알아보지 못한 죄가 이토록 크다는 걸 깨우쳐 주고 싶어서였을까

 

 

가져온 곳 : 
카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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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심여수|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