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 열반 100주기를 맞아 덕숭총림 수덕사가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고,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근대한국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스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사부대중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옹산스님(전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이 보내온 3편의 글을 매월 한차례씩 소개한다. 2805호와 2813호에 이어 세 번째이다.  

 

   
 

경허당 성우선사의 제자인 만공선사께서 스승의 행장과 법문, 일화 선시 같은 것을 묶어서 <경허법어집>을 출간한 바 있다. 나는 그 책을 곁에 두고 선사를 대하 듯 틈틈이 읽는 것으로 발자취와 숨결을 느낀다. 번역이 잘 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글세대들로서는 생생하게 공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흠이랄까. 나는 경허 어록을 통독한 결과로 선사가 매우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팔만대장경은 물론이거니와 유교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서삼경과 장자까지 통째로 머릿속에 들어 있어 무엇을 들이대도 새기는데 막힘이 없었던 대강백이면서도 선의 중흥조가 된 위대한 선객이었다. 하지만 그의 언행에서는 권위의식이나 위엄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선사께서는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추상같았지만 제자들에게는 격식을 집어던지고 그때그때 번뜩이는 해학과 기지로 깨우침을 주신 흔적이 경허어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선사께서는 제자 사랑이 애틋하고 사무쳤던 분이다. 특히 만공당 월면선사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천장사에 수월ㆍ혜월ㆍ월면이 함께 했던 시절. 수월은 주로 땔나무를 했었고, 혜월은 사전(寺田)을 가꾸는 소임에 전념했다. 경허선사의 수발은 막내인 만공당 월면의 차지였다.

그리고 수월과 혜월은 나이가 든 상태에서 사제의 인연을 맺고 법을 이은 것이지만, 만공은 열네 살에 경허선사와 만나 그림자처럼 시봉을 했으므로, 경허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으면서 온전하게 경허의 가르침을 통해 득도한 진정한 의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경허선사는 한동안 월면 사미승을 운수행각이나 탁발 시에도 데리고 다녔다. 영특했던 사미승 월면을 몹시 아꼈다는 반증이다. 하루는 사미승 월면이 경허선사께 묻는다.

“도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이옵니까?” “도가 대체 무엇이냐?” “예, 스님?” “도라는 것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천지사방에 있는 것이다.” “천지사방에 도 아닌 것이 없다고요?” “그래. 꽃피는 것도 도고, 꽃이 지는 것도 도다. 바람이 부는 것도, 불지 않는 것도 역시 도다. 그 오묘한 도리를 알면 누구나 부처를 볼 것이니라.”

“부처가 어디 있는데요?” “벽에 걸려있는 저 거울을 들여다보아라. 거기에 부처가 있다.” 거울을 향해 눈을 주었던 월면이 말한다. “이 거울 속에는 제 얼굴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경허선사의 죽비가 사정없이 월면의 등을 내려쳤다. 월면은 기겁을 했다. “아니 왜 때리십니까요?” “아직도 부처를 보지 못하였느냐?” “스님, 거울 속 어디에 부처가 있단 말씀이에요!” 다시 죽비가 작렬한다. “왜 자꾸 때리기만 하십니까요!” “거울을 다시 보아라.” “제 얼굴밖에 안 보인다니까요!” “잘 보아두어라. 그 얼굴이 바로 부처니라“ “예? 제 얼굴이 부처라고요?” “그렇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지 말거라.”

스승은 사무치게 가르치기 위해 애정의 매를 든 것이었다. 그렇지만 경허선사가 월면을 가르칠 때 굳이 딱딱한 경학이나 계율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어린 제자를 데리고 운수행각이나 탁발을 다니면서 그저 흰 구름, 피고 지는 꽃, 흐르는 물, 솔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거기에서 도를 구하고 부처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이별은 예사라서 어렵지 않지만

뜬 인생들은 헤어지면

훗날을 기약하기가 아득하다

말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제자가 저절로 깨우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한국 불교사에 수많은 조사가 있고, 제자가 존재하지만, 경허와 만공의 사제지연이 가장 돋보인다. 경허가 있기에 만공이 있고, 만공이 있기에 경허가 빛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두 사람 사이니 전하는 일화도 많다.

한번은 경허선사께서 시봉인 월면에게 말했다. “단청불사를 해야겠다. 시주 좀 받으러 가자.” 당시 천장사는 퇴락해 있었다. 단청불사를 한다니 천정사에 단청을 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인 월면이 기꺼이 따라 나섰다. 스승과 제자가 마을로 내려가서 얼마의 시간이 경과하자 약간의 시주금이 모였다.

경허선사는 주막에 들려 그 돈으로 술을 사 마셨다. 그러자 월면이 투덜거렸다. “스님은 시주를 받아 술을 드셨으니 지옥에 떨어지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단청한다며 받은 시줏돈으로 어떻게 술을 사 마실 수 있습니까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너는 단청을 못하게 되었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단청불사를 마쳤느니라.”

“언제 어디다 단청을 했단 말씀이세요?” “내 얼굴을 보거라?” “술 취한 모습이 가관입니다요.” “녀석 진정한 단청을 볼 줄 모르네. 볼그족족한 것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그럼 처음부터 스님 술 드시려고 시주를 받았단 말씀입니까?” ”그랬다 이놈아. 목은 마르고 컬컬해서 한 잔 생각이 났지. 이렇게 목도 축이고 기분 좋게 길을 갈 수 있으니 그 부처님 참 영험하시다. 허허허~”

“그렇게 말씀하시면 남들이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합니다요.” ”그렇다면 내가 무슨 궤변을 늘어놓았는지 지적해 보거라.” “첫째로 스님의 몸과 법당은 다르단 말입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고?” “스님은 인간이지만 법당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잖아요.” “아따 고놈 눈도 나쁘네.” “뭐가 말입니까?” “내 속에 부처가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그야 말씀이고 실제로는 다르지 않습니까?” “귀까지 나쁜 것 같으니 한번만 더 말해주겠다. 잘 듣거라. 이 몸이 법당이요 이 마음이 부처니라. 법당의 부처는 죽어있는 돌덩어리이고 법당은 돌덩어리를 지키는 집에 불과하다. 나는 내 법당에 단청을 하려고 했는데, 너는 죽은 부처의 법당에 단청을 하지 않는다고 타박이구나.”

“스님 말씀을 듣고 보면 그럴싸하기는 합니다만, 부처님께서 술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스님은 술을 드셨으니 문제 아닙니까요.” “문제 될 것이 없느니라. 술을 마시고 본성이 취해서 함께 흔들리면 문제지만, 내가 술을 많이 마셔도 어디 한번 비틀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이놈아, 술을 마셨느니, 계를 범했느니, 맨날 고시랑거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가 기특하다고 수기를 줄 것도 아니고, 너 스스로 그 속박에 매일 뿐이란 말이다. 오로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만 못한 것이다!”

경허선사께서는 어느 산문의 조실이 되어 일신의 안락을 도모하며 법음을 내리는데 만족하며 살겠다는 생각을 버린 후 만행을 떠나기 전에 또 한 명의 법제자인 한암을 시봉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었다. 이에 경허선사는 길 떠나기 직전 한암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써서 보냈다.

“가야 할 길 먼 하늘에 드리운 날개 / 느릅나무 가지를 향해 활개 치기를 몇 해던가 / 이별은 예사라서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 저 뜬 인생들은 헤어지면 훗날을 기약하기가 아득하구나.”

경허 같은 대선사가 제자에게 이렇듯 애틋하게 마음을 털어놓은 시를 써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허선사는 시인묵객으로도 고금에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몸은 6척 거구였지만 마음은 여인네보다도 더 섬세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경허 외에 제자를 이런 식으로 살뜰하게 사랑한 선사는 다시 찾기 어렵다.

그러나 한암은 진심에서 동행을 원하는 스승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한암스님은 스승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스승의 애틋한 권유를 거절한 것이 잘한 일 같지는 않다.

이때 한암 스님이 동행했다면 사제 간에 주고받은 법담과 선시도 많이 남겨졌을 것이고, 우리의 근세 선사(禪史)는 지금과 달리 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 길을 떠났던 경허선사께서는 금강산을 유행하며 무려 175편의 연작시를 남겼다. 그것들이 선사가 위대한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북녘 땅 깊숙이 들어가신 선사께서 마지막 하신 일은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친 것이었다. 비승비속의 모습이었다고 하나 머리를 기른 것은 일제(日帝) 단발령에 대한 저항의식의 발로고, 훈장으로서 나라의 기둥이 될 아이들의 까막눈을 뜨게 해준 일은 산문의 조실로 존경받으며 노후를 편히 지낸 것보다 훌륭한 선각자의 길을 가신 것이라 여겨진다.

선사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은 담여 김탁이다. 1912년 4월 25일 첫닭 우는 소리가 새벽 정적을 가른 직후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경허선사는 김탁에게 지필묵을 청하였다. 김탁은 경허의 손가락에 붓을 쥐어 주었다. 선사께는 먼저 종이 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그런 다음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써내려 갔다. “心月孤圓(심월고원) / 光呑萬像(광탄만상) / 光境俱忘(광경구망) / 復是何物(부시하물)” “마음 달 홀로 둥근데 / 그 빛은 만상을 삼켰어라 / 빛과 경계 다 공허한데 /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붓을 내려놓은 후 경허선사께서는 눈을 감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시는 내쉬지 않는 것으로 일대사를 마무리하신 것이었다.

[불교신문 2824호/ 6월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