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을 쉬어 고요하고 갈애를 소멸한 사람은 과거에도 집착하지 않고,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도 걱정하지 않고, 현재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람은 좋고 싫음을 떠났기에 성내지 않고, 두려움도 없고, 교만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과연 현재 우리는 어떠한가?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하여 요번 하안거 결제 중에 근진(根塵)에서 벗어날 일이다.

실제에는 치암범부(痴暗凡夫)이면서 법(法)이다 도(道)다 읊어대는 사람들 정신 차려 공부할 일이다. 염라대왕이 이런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다생(多生)에 익혀온 습성(習性)을 정복하고 그 근본(根本)에 체달한 후에야 물심(物心)이 일여(一如)한 도리를 자가용(自家用)으로 쓰는 방법(方法)을 알게 될 것이다.

만공선사(滿空禪師)는 일심(一心)이 곧 만상(萬像)이고 만상(萬像)이 곧 일심(一心)이다 이것이 가깝지도 멀지도 아니하여 건곤(乾坤)과 더불어 같이 덮이고 실렸으며 일월(日月)과 더불어 같이 비추어서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 하였습니다.

중생(衆生)이란 소아적(小我的) 개체(個體)에 국한하여 업풍(業風)에 불려서 사생육취(四生六趣)에 헤매게 되는 것이요

부처는 일체우주(一切宇宙)를 자신화(自身化)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다 내 한 몸이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川世界)가 다 한집이기 때문에 취사(取捨)를 임의대로 한다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심(一心)은 물(物)을 상대로 하는 일심(一心)이 아니라 물(物)과 심(心)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眞如法界)의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 경이로운 속도로 발전하는 양자학이라든지 유전공학은 서구사상의 이원론적(二元論的) 형이상학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관념적 허구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은 불교의 연기적 자연자체를 중심으로 해서 나타나야 하며 이때 그 가치의 중심(中心)은 인간뿐 아니라 생명(生命)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올바른 세계관(世界觀)은 인간(人間)과 자연(自然)을 둘로 갈라서 인간(人間)을 담론(談論)의 중심(中心)에 놓는 갈라서 이원론적(二元論的)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가 아니라 인간(人間)과 자연(自然)을 연기적(緣起的) 또는 유기적(有機的)으로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성주괴공(成住塊空)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생태중심주의(生態中心主義)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선사(禪師)들이 말씀하신 일심(一心)이 곧 만상(萬像)이요 만상(萬像)이 곧 일심(一心)인 도리입니다.

 

이(咦),

쓸데없는 구업(口業)으로 선문(禪門)을 더럽혔군.

참선일착최당연(參禪一着最當然)

이륙시중요기의(二六時中要起疑)

홀득통신한한출(忽得通身寒汗出)

행행보보전전기(行行步步轉全機)


참선하는 하나만이 가장 좋은 거라네

행주좌와에 애써 의심을 일으켜라

홀연히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리고 나면

하는 일마다 대기대용이라네


덕숭총림 방장 설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