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失地王이라 불리는 존 영국왕 헨리 2세(1133-1189년 재위)와 왕후 엘레오노르(프랑스 서부 아케텐지역 영주의 딸) 사이에는 5남(윌리암, 헨리 제프리, 리처드 1세, 존)과 딸 3명, 모두 8명의 자녀를 두었다.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할 당시 아들 중 윌리암(어려서 병사), 헨리, 제프리 3명은 사망하였기 때문에 왕의 계승권을 두고 동생 존과 다툼이 있었지만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후원을 받아 리처드1세가 왕위에 올랐다. 리처드1세가 왕위에 오른 후 존은 모턴 백작이 되었고 아일랜드 영주의 지위를 승인 받았다. 또 해마다 6,000파운드의 수입 이 들어오는 땅을 받았고,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녀인 이사벨과 결혼했다. 리처드가 십자군원정을 떠날 당시 리처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아서(형 제프리의 아들 3세)를 태자로 봉하면 서 리처드는 존에게 "존 너는 짐이 잉글랜드를 비운 동안 프랑스에 머물면서 잉글랜드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하라"는 명 령을 내렸다. 이는 자기가 없는 동안의 왕권 찬탈을 막고, 유고시에는 조카 아서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조치였다.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3차원정)중에 같이 출정했던 프랑스왕 필립2세는 병을 핑계로 먼저 귀국하여 영국에서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안에 있는 영지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또 리처드가 원정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오스트리아 공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 은 존에게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였다. 존은 형인 리처드가 父王 헨리2세에게 반기를 든 것 처럼, 프랑스 존엄왕이라 불렸던 필립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지배권 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모후인 엘레오노르가 강력하게 반대하여 좌절됐지만, 존은 그후에도 계속하여 필립2세와 협정을 유지하면서 영국에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리처드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에서 풀려나 귀국한 후 프랑스에게 빼았긴 영토를 회복하기위하여 프랑스에 출정, 필립2세와 전쟁을 수행하다가 1199년 4월 리처드가 죽었다. 그 때 영국의 왕위 계승정책에 따라 조카인 아서가 왕위를 계승해 야 했지만 존이 같은 해 5월 리처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아서는 법적으로 리처드의 재산과 지위에 대한 상속권자였기 때문에 아서가 이의를 제기하면 존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아서는 그의 부친 제프리가 죽은후 1196년부터 외척인 프랑스 왕가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존은 이를 이용하려 했고 프랑스는 自己측의 이익을 얻기 위한 협정을 맺는다. 필립은 르굴레 조약(1200. 5. 22)에서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아서가 아닌 존을 리처드의 상속자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존으로부터 에브뢰와 노르망디의 벡생을 할양 받았다. 또 존은 조카딸인 카스티야의 블량슈가 미래의 프랑스 왕 루이8세와 결혼할 때의 지참금으로 이수과 그라세를 주기로 동의 했으며, 베리와 오베르뉴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포기했다. 존은 자신을 위해 귀족들과 상의도 없이 프랑스 내 영국의 소유지들을 서슴없이 내어 놓았는데, 이 때문에 그를 실지왕(失地 王, Landless)이라 부른다. 존은 교활한 성품이었지만 교양과 학식을 갖춘 인물이고 활동적이었다. 존의 치세에서 재무와 사법 행정, 옥새와 왕실의 중요성, 과세 방법과 군대 조직법,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는 방식에 큰 발전을 이룩했던 점을 들 수 있지만, 존이 왕위에 오른 후에 결혼 문제 등으로 프랑스와 전면전이 발생하였다. 또 1202년 8월에는 조카 아서를 사로잡았지만 프랑스에 있던 영국의 영지인 노르망디와 투렌지방의 일부를 프랑스에게 빼았기게 되었다. 존은 필립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존의 권위는 큰 상처를 입게되었고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무리한 과세등으로 국민들의 원성을 많이 샀으며 종교계와 귀족들까지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는 결국 많은 失政을 계속하다가 1216년 10월 18일에 너무 많은 술과 음식을 먹은후 급체로 뉴워크 타운 근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상은 영국사에서 발췌. 보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