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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役事 광화문..금강송 8t트럭 100대분 동원

淸潭 2010. 8. 15. 15:54
<大役事 광화문..금강송 8t트럭 100대분 동원>
궁궐건축용 긍강송.경기 포천산 석재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광화문 복원 공사는 3년8개월간 280여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대역사(大役事)였다.

   고종 중건 당시 광화문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2006년 12월 시작된 공사는 기존 광화문 해체에서 발굴조사, 축조 등의 과정을 거쳐 최근 완공돼 15일 일반에 공개됐다.

   ◇복원에 쓰인 재료는 = 한마디로 엄청나다. 8t 트럭 100대분의 소나무와 5천여t의 석재가 이번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기와도 큰 기와를 기준으로 2만6천185매나 사용됐다.

   부피로 보면 소나무 18만1천75재(才=약 0.00334㎥)와 석재 1천70㎥가 사용됐다. 석재 가운데 145㎥는 기존 광화문의 돌을 그대로 썼지만 925㎥는 신재(新材)를 사용했다.

   그렇다고 아무 소나무, 아무 석재나 쓴 것도 아니다. 소나무는 모두 전통적으로 궁궐 건축에 사용돼온 곧고 튼튼한 한국 전래의 금강소나무만을 썼고, 석재 역시 조선시대 썼던 인왕산 돌과 가장 비슷하다는 경기 포천산 돌을 사용했다.

  





◇원래 위치ㆍ각도 확인은 어떻게 = 광화문의 원래 위치와 각도는 모두 철저하게 문헌조사와 기존 광화문 해체 후 시행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했다.

   조사 결과 원래 광화문의 위치는 해체된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떨어진 곳이었으며 각도도 3.75˚ 틀어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발굴조사에서 광화문이 근정전-근정문-흥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ㆍ문의 남북 방향 직선 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조사에서는 고종 중건에 앞서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인 조선 초 태조 때의 광화문 유구도 확인됐다. 이때의 조사 결과를 통해 고종 때 광화문이 태조 때의 광화문과 규모와 크기, 중심축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광화문 복원 작업이 갖는 역사적 의미도 더 깊어졌다.

  



◇논란 빚은 현판도 복원 = 광화문 복원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사안은 현판이었다. 1968년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광화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된 한글 현판을 달고 있었지만 새 광화문의 현판은 유리원판 사진을 기초로 고종 중건 당시 모습으로 복원됐다.

   1916년께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판의 유리원판 사진이 2005년 2월 분석ㆍ복원돼 고종 중건 당시 공사책임자였던 훈령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任泰瑛)의 글씨로 드러남에 따라 현판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

   새 현판의 글씨는 각자장 오옥진 선생이 새기고 단청 채색은 단청장 양용호 선생이 솜씨를 냈다.

   현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현판을 한글로 걸어야 한다'는 한글단체 등의 주장으로 일부 논란도 일었지만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광화문과 경복궁을 복원한다는 대원칙에 따라 현판이 복원됐고 지난 8일 문루에 걸렸다.

   현판은 그동안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15일 오전 제막식과 함께 일반에 공개됐다.

  



comm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