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왕의 길 일러준 정신적 지주
권력남용·재물·쾌락 등 경계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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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김재일 |
부처님 당시, 갠지스강 서북쪽에서 강대한 국력을 지니고 융성하고 있던 코살라국. 그 곳의 왕은 파세나디였다. 코살라국은 당시 16대국 가운데서도 특히 번영을 이룬 나라로, 경전의 묘사로부터 추측해 보건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던 곳이었다.
이런 대국의 왕이었던 파세나디는 어느 날, 세상에 붓다가 출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평소 출가 수행자들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있던 파세나디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를 찾았다. 그런데 왕의 눈에 비친 부처님의 모습은 예상과는 달 너무 젊었다. ‘이 자가 정말 붓다일까?’ 내심 석연찮게 여기며 인사를 나눈 후, 왕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널리 존경을 받고 있던 유명한 사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조차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는데, 어찌 나이도 젊고 출가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고타마 당신은 깨달았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어리거나 작다고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될 것으로 무사, 뱀, 불씨, 수행승의 4가지를 예로 드시며, 어린 무사라 할지라도 무시하면 가차 없이 공격을 당하게 되고, 어린 뱀도 물리면 죽을 수 있으며, 불씨도 능히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수 있고, 어린 수행자도 언젠가는 큰 깨달음을 얻어 각자가 될 수 있다고 설하셨다.
이 가르침을 들은 파세나디왕은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불법승 삼보에 귀의했다.
인도 최고 강국의 대왕
그날 이후, 왕은 틈나는 대로 부처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했다. 권력의 남용과 오만, 여색, 재물이나 쾌락에 대한 집착,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등과 같은, 가진 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온갖 유혹에 현혹되지 않도록, 부처님은 파세나디왕에게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세간의 지도자가 올바른 생각과 현명한 판단력을 지니지 못한다면, 백성들은 잘못된 그늘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점에서 부처님과 파세나디왕의 만남은 코살국의 백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던 것이리라.
한 번은 왕이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태어난 자 가운데 늙음과 죽음을 비껴간 자가 있습니까?” ‘불로장생’, ‘영생(永生)’모든 것을 다 가진 왕으로서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일이다. 실제로 역사상의 많은 왕들이 불로장생이나 영생을 꿈꾸며 희귀한 약초와 약을 구하고자 혈안이 되지 않았던가. 또 자신의 사후 관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을 고되게 했던가. 파세나디도 부족할 것 없는 자신의 삶에서 늙음과 죽음이라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부처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왕이여, 태어난 자 가운데 늙음과 죽음을 비껴간 자는 없습니다. 아무리 재물과 곡식이 풍부한 권세 있는 귀족이라도 늙음과 죽음을 비껴간 자는 없습니다. 번뇌를 다한 아라한으로 생존의 속박을 끊은 해탈한 수행자라 하더라도 이 몸은 부서져야 하고 버려져야 합니다. 하지만, 참다운 법만은 노쇠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축제의 날이었다. 파세나디왕은 온갖 장식으로 훌륭하게 치장된 흰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거리를 시찰하고 있었다. 왕을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저 멀리 한 건물의 창문에서 한 여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깐 왕을 보고는 곧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던 파세나디왕의 눈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들어왔다.
완전히 마음을 뺏겨버린 왕은 서둘러 왕궁으로 돌아와서는 대신에게 그녀의 신상 조사를 명했고, 그 결과 그 여인에게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그를 데려오게 한 후 자신의 신하로 삼았다. 무언가 트집을 잡아 처형시키고 그의 아내를 빼앗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녀에게 반해 버린 왕의 마음이 판단력을 잃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기를 느낀 이 남자는 열심히 일했고 좀처럼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참다못한 왕은 “이 보거라. 근처 강에 가서 하얗고도 파란 연꽃과 적토(赤土)를 가져 오거라. 만약 오늘 내 목욕 시간까지 대령하지 않는다면 너를 죽일 것이다”라는 억지스러운 명령을 내렸다. ‘하얗고도 파란 연꽃이라니...’ 공포에 질린 남자는 집으로 가서 도시락을 챙긴 후 강으로 뛰어갔다. 그는 밥을 조금 덜어낸 후 나머지를 먹기 시작했다. 마침 걸식자가 지나가자 덜어낸 밥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주먹은 물속에 던져 넣고 입을 헹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부근에 사는 금색의 용신(龍神)이시여. 부디 제 부탁 좀 들어주세요. 왕은 저를 처형하고자 찾을 수도 없는 하얗고도 파란 연꽃과 적토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제 식사의 일부를 걸식자에게 주었고, 또 물고기들에게도 주었습니다. 이 선행의 과보를 모두 당신에게 드릴 터이니, 부디 하얗고도 파란 연꽃과 적토를 강 속에서 찾아 주세요.” 남자가 이렇게 크게 3번 외치자, 이 목소리를 듣고 나온 용신은 그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파세나디 악행 일깨우기도
한편 파세나디왕은 혹시 그가 진짜 하얗고도 파란 연꽃과 적토를 구해오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궁궐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다. 남자는 궁궐 밖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헤매다 근처 승원에 가서 지쳐 드러누웠다. 그 시각 왕은 내일 아침이 밝으면 그 놈을 죽이고 여자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는데, 새벽녘에 어디선가 음침한 울림을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두려워진 왕은 사제를 불러 의논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사제는 혹시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말을 들을까 염려하며, “대왕이시여. 큰일입니다. 당신의 생명에 위험이 닥쳐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두려움에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그럼 어찌 해야 하느냐?”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코끼리 100마리, 말 100마리, 암소와 수소 100마리씩, 산양 100마리, 양 100마리, 닭 100마리, 남자아이 100명, 여자아이 100명, 이 모두를 모아 희생제를 하면 됩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들은 이를 끌어 모으기 위해 온 도시를 휘젓고 다녔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
이 모습을 보게 된 말리까(Mallikā) 왕비는 “지금껏 다른 생류를 죽이고, 그 대신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는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고 왕의 잘못된 판단을 일깨우며, 부처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할 것을 권유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파세나디왕에게 부처님은 왕이 새벽녘에 들은 소리는 죄를 짓고 죽어 아비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라고 하시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온갖 악행 반복하고, 가진 재산 단 한 번도 베푸는 일 없이, 거대한 부를 지녔다 해도 그 모두를 쾌락에 다 써 버리고 세상 떠났구나. 지옥의 괴로움 받으면서 6만년이 지났구나.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이 괴로움의 끝은 어디인가. 분명 끝은 없으리라. 징조조차 발견할 수 없구나. 그도 그럴 것이 이 괴로움은 과거에 범한 악행의 결과 발생한 몸의 과보이니 만약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선을 행하고 계를 지켜 몸을 닦으리라.”
이 게송을 들은 파세나디왕은 남의 처를 갖고자 욕심낸 자신의 행동, 그리고 자신의 악행을 덮기 위해 하마터면 수많은 생물의 목숨을 빼앗을 뻔 했던 어리석음을 크게 뉘우치며 후회했다.
그리고 부처님께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그 밤만큼 길게 느낀 적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잠들지 못하는 자의 밤은 길고, 지친 자의 길은 멀기만 하구나.
범부의 윤회 또한 길고 길구나”라는 게송으로 답하셨다. 왕궁에 못 들어가고 헤매다 승원에서 머물고 있던 그 남자는 파세나디왕의 악행을 일깨워준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자신도 예류과를 얻었다고 한다.
부처님을 통해 파세나디왕은 헛된 욕망의 무상함을 깨닫고, 나아가 한 나라의 왕이기에 더욱 더 철저히 갖추어야 할 윤리적 삶에 눈뜨게 된 것이었다. 또한 파세나디왕은 세간의 지도자로서 승가라는 출세간 세계의 지도자인 부처님을 훌륭한 지도자의 모델로 여겼다. 왕과 왕이 싸우고, 귀족과 귀족이 싸우며, 심지어 부모와 자식이, 형제가 싸우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서로에 대한 존경과 화합을 강조하고 또 실천하며 살아가는 승가가 있었다. 최대의 권력을 지닌 자신 앞에서조차, 귀족들은 말을 가로막고 나서며 큰소리치건만,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설법하실 때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결코 권력이나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세나디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국의 왕으로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지혜로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실천하고자 했던 파세나디왕. 그리고 그런 왕의 정신적 지주로서 조용히 자리를 지켜주셨던 부처님. 훗날, 아들 비두다바의 모반으로 비참한 노후를 보냈던 파세나디왕은 사랑하는 말리까 왕비마저 잃은 어느 날, 비탄에 빠져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 부처님을 찾았다. 몸을 숙여 부처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그에게 부처님이 연유를 묻자, “부처님도 여든이시고, 저도 여든이네요”라고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고 한다.
한때의 영화를 뒤로 하고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쓸쓸한 노후. 왕으로서의 권력도 빛나는 젊음도 주변의 넘쳐나던 사람들도 모두 덧없이 사라져간 지금 이 순간, ‘진리’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자신에게 아낌없이 주었던 부처님에게 진심으로 귀의하며,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자랑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1050호 [2010년 05월 24일 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