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역대국수 초청 대국 우승 서봉수 9단
서봉수 9단은 “기보를 보다가 몰랐던 수를 깨치게 되면 희열을 느낀다”며 “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 만큼 내 바둑 실력은 앞으로도 늘 것”이라고 말했다. 강병기 기자 |
프로기사 서봉수 9단. 그의 이름은 잊혀질 만하면 언론에 등장한다. “승부사 서봉수, 아직은 살아 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8일 국수전 50주년 기념으로 열린 역대 국수 초청대국에서 우승해 다시 신문에 이름이 났다. 이창호 최철한 9단을 만나지 않은 대진운도 따랐지만 결승에서 조훈현 9단을 멋지게 밀어붙여 이기면서 그의 칼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15일 오후 9시 반 경기 안양시 평촌역 근처 오피스텔 앞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달 말부터 출근하고 있는 인근 바둑교실에서 귀가하는 길이었다. 바둑교실에서 그는 입단 유망주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손님이 왔다”며 집에서 쥐포와 과일, 양주 한 병을 들고 나오더니 오피스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와의 심야 인터뷰는 술잔을 기울이며 시작됐다.
“제게 언제 전성기가 있었나요. 항상 2인자였죠. 2인자였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감지덕지할 뿐입니다.”
서 9단은 전성기와 비교해 요즘 바둑 실력이 어떤 수준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운을 뗀 뒤 말을 이었다.
“제 바둑은 꾸준히 늘고 있어요. 열심히 연구하면 분명히 늡니다. 생활 때문에 연구에 몰입할 여건이 안 돼 이 정도 실력밖에 안 되는 거죠.”
서 9단의 매력은 항상 의외의 승부를 연출한다는 데 있다.
1974년 그는 명인전에서 조훈현 9단과 처음 도전기를 뒀다. 바둑계에선 당연히 조 9단의 우승을 점쳤다. 하지만 서 9단은 3-1로 조 9단을 눌렀다. 1991년 동양증권배에서 이창호 9단을 이길 때도, 2000년 32연승을 구가하던 이세돌 9단을 왕위전 본선에서 두 번이나 꺾고 도전권을 차지할 때도 그랬다. 평소 전력으로 보면 다들 진다고 할 때 그는 이겼다.
1993년 잉씨배 우승이나 1997년 진로배 9연승 우승은 모두 ‘이제 서봉수는 한물갔다’고 여길 때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중요한 승부에서 상대가 정해지면 그를 연구합니다. 그리고 비책을 만들어 갑니다. 그럼 이창호 9단이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못 이긴다면 연구가 잘못됐을 뿐입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도 똑같은 방식을 적용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바둑의 신이 있다면 지금 프로기사들은 두 점으로 승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어요. 인간의 한계치에 육박하고 있는 겁니다. 이창호 9단 같은 경우는 두 점이 아니라 1.7점 정도일까요. 저는 한 1.9점 정도 될 겁니다. 0.2점이면 미세한 차이지만 수를 떠올리는 발상에서 차원이 다릅니다. 평상시에는 그게 승부를 가름합니다. 집중력을 발휘한다면 저도 상대를 벨 칼이 있다는 거죠.”
서 9단은 ‘서 명인’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그는 명인전에서 5연패하는 등 유독 명인전에서 우승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는 2번밖에 우승하지 못한 ‘국수’에도 애착이 간다고 했다.
“명인전이 절 키워 준 기전이라면 국수전은 기사로서 명예를 가져다준 기전입니다. 기사라면 누구나 국수를 한번 해 보고 싶어하죠. 그 반열에 제 이름을 올렸다는 게 소중합니다.”
그가 1986년 국수에 오를 당시 최초로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순 국산 기사’가 국수가 됐다며 많은 화제를 불렀다.
서 9단에겐 허세나 체면치레가 없다. 그의 기풍처럼 생활과 사고방식이 무척이나 실리적이다. 그는 한국기원에서 후배 기사들을 만나 바둑 수를 열정적으로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호구책으로 바둑교실에 나가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강자를 만나면 몸을 낮춰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승부사 서봉수를 실력 이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그가 바둑 말고 신문지상에 이름이 오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2004년 29세 연하의 베트남 여성과 재혼한 것이다.
“매달 일정액을 처가에 보내 주고 있지요. 올가을엔 처가에 찾아가 낚싯배 한 척을 사 줄 생각입니다. 늙은이한테 시집 와 고생하니까 보답을 해야죠.”
그가 결혼할 당시 한국기원에선 서 9단의 결혼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심지어 바둑계의 망신살이라고 하는 얘기도 나돌았다. 그러나 그는 “여생을 편하게 살려면 이 길이 가장 좋은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일축했다.
그에게 타이틀 홀더로 복귀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바둑교실에서 돈을 벌어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습니다. 요즘 복기를 하면 참 재미있더군요. 젊은 시절엔 밤새워 술 마시고 노름하느라 공부를 안 했는데 늦바람이 드나봅니다. 꼭 한 번은 타이틀을 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협지에선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하죠, 하하.”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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