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日역사왜곡 비판 40여년 야마다 쇼지 立敎大 명예교수
자택 현관 앞의 대나무를 배경으로 선 야마다 쇼지 일본 릿쿄대 명예교수. 40여 년간 재일 한국인의 역사 연구에 천착해 온 그는 일본인의 역사 인식 결핍을 무엇보다도 걱정한다. 사이타마=조헌주 특파원 |
《“저기 고등학교가 모교인데, 히노마루(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그동안 거부해 왔지만 요즘 적극 반대하는 사람은 나 혼자라서 얼마나 더 버틸지….” 도쿄(東京)에서 전철로 한 시간 거리인 사이타마(埼玉) 현 니시도코로자와(西所澤) 역에서 내려 전화하자 야마다 쇼지(山田昭次·75) 릿쿄(立敎)대 명예교수가 직접 마중 나왔다. 20여 년간 살아온 자택으로 걸어가며 인터뷰는 시작됐다.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없이 일제 상징물을 국기와 국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신념.》
서재에 들어서며 두 달 전 작고한 부인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자 그는 예를 차리면서 “저 사람 아플 땐 속 편히 나다니질 못했는데 이제 걱정거리가 없어졌다”고 허허롭게 웃었다. 인기 없는 연구를 하는 남편 탓에 고생했을 부인에 대한 미안함이 배어난다.
“역사 공부는 저도 늦게 시작한 셈이지요.”
릿쿄대 교단에 선 직후인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 참가하면서부터 그는 재일 한국인, 한국의 존재에 눈을 떴다. 34세 때였다. 종전 당시 고교생이었던 그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한 사람으로 비행기공장에 동원돼 연합군기 공습을 감시했다.
“천황 사진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며 교육칙어를 암송했지요. 반복 교육을 받다 보니 포로가 되면 자결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지요.”
세뇌에서 풀리지 못한 듯 침략전쟁을 ‘조국 방어전’이라고 강변하는 일본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때면 작고 가냘픈 체구지만 그에게선 허명(虛名) 대신 사실(史實)만을 추구해 온 삶의 당당함이 넘쳐 난다.
그가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재일 한국인 학살 문제를 다룬 책에서 일본 민중의 책임을 거론한 것이 2003년. 학살의 주 책임은 ‘조선인 폭동’이란 허위 정보를 유포한 일본 정부였기에 대학살 80주년이던 그해 일본변호사연맹 인권소위원회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게 정부의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권고서를 보냈지만 묵살됐다.
하지만 야마다 교수는 민중의 책임 또한 크다고 말한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시 표가 모이니 국회의원들이 앞 다투어 참배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일본 정부나 기업 모두 일제하 징용 문제를 논의할 때 민족 차별 측면은 철저히 무시하고 있어요. 관련 자료는 감추기 바쁘고요.”
현장 연구 활동을 해 오며 겪은 어려움을 말하던 그의 얼굴이 올해 초등학교 4년생인 손자 이야기를 하면서는 환해졌다. 가나가와(神奈川) 현 사가미(相模) 호수 옆에서 열린 건립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길의 일화다.
“손자가 묻더군요. ‘할아버지는 총리가 되면 뭘 할 거야?’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어 머뭇거리는데 그 아이는 ‘내가 총리가 되면 평화헌법 9조는 절대 고치지 못한다고 선언하겠다’고 하더군요. 키운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런 그는 최근 교육 현장에 대해 말이 닿자 “학교의 암흑화”라고 잘라 말했다. 최근 도쿄도가 역사담당 교사들에게 ‘교과서 내용 외에는 교안에 포함시키지 말라’고 지시한 일을 거론하면서 “전시 교육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며 걱정했다.
박정희 치하에서 벌어진 인권과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한국과 만난 그는 오늘의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재는 일본에 비하면 훌륭한 민주국가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 후 스탈린 독재와 미국 파시즘의 충돌 등 세계사의 모순 속에 고생했지요. 1970년대 행동하는 한국인 지식인들에게 감동했어요. 혼란은 있겠지만 끈질기게 헤쳐 나가야 합니다.”
오랜 수형생활을 한 두 아들, 서승(徐勝)과 서준식(徐俊植)의 옥바라지로 60회나 한국을 오간 재일교포 오기순(吳己順) 씨의 모습에서는 가난과 민족 차별과 싸워 온 한국의 이름 없는 여성들, 어머니의 힘을 느끼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인은 납북 일본인만 생각하고 강제연행된 한국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도 너무 공부가 부족해요. 한일회담 기록만 읽어 봐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을…. 내셔널리즘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각 증상도 없고.”
일본의 역사 인식 결핍을 질타하는 그의 발언은 이어졌다. 이런 자세는 ‘보통의 일본인’에게 거부감을 주었고 지원보다 견제, 지지보다 비판을 받아 왔다. 5년 전 퇴임연설 시 청중석에서 “당신은 비국민(非國民)이야”하는 고함이 날아든 것도 그래서다.
현관 앞 대나무 옆에서 야마다 명예교수의 사진을 찍었다. 포커스에 들어온 것은 역사의 진실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세파와 싸워 온 한 그루 올곧은 대나무였다.
사이타마=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야마다 쇼지는:
△1930년 일본 사이타마 현 출생
△1953년 릿쿄대 사학과 졸업
△1956년 도쿄교육대 석사 과정 수료
△1962∼95년 릿쿄대 교수
△1964년 한일 회담 반대운동 참가
△1970∼90년 한국 민주화, 인권 옹호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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