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꾸밈없는 보통사람들의 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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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70년대 신문에서 사람들의 새해 소망을 찾아 읽다 보면 정말 많은 것을 생각게 된다. 우선 당시 사람들의 소망이 지금 눈으로 보면 지극히 소박했다는 느낌이 온다. 개인적인 신변잡사부터 인류와 미래를 위한 거창하고 이타적인 기원까지 꿈은 가지가지지만 대개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꾸밈이 없고 속마음이 우러난다. 보통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가령 "돈이나 실컷 벌어 2층 집을 짓고 싶다"는 회사원, "내 재주로 돈 벌긴 틀렸으니 공돈 1억만 생겼으면…"하고 바라는 어느 음악 평론가의 꿈같은 것이 밉지 않고 그냥 재미있다.
창경원(당시 명칭, 일제에 의해 격하된 창경궁의 명칭으로 1983년에서야 원래 이름으로 환원됐다)의 동물사육사가 "우리나라에도 기린이 들어와서 아이들이 보고 기뻐했으면…"하고 바랄 때는 너무 정감이 가 혼자 킥킥 웃기도 한다.
그 뿐인가. 새해 소망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인기 탤런트가 "작년에 못 단 전화를 올해는 꼭 다는 게 꿈"이라고 말하고 60년대 성악가는 이탈리아 극장 무대에 서보는 게 필생의 소원이라고 말한다. 한 택시 운전사는 우동을 먹다 흑진주를 씹기를 바라는가 하면 항공사 스튜어디스는 국제선 노선이 늘어 외국 운항 승무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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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 힘든 60년대 "봉급만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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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단위로 60년대와 70년대의 소망도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먹고 살기가 정말로 힘들었던 시절엔 이뤄지지 않겠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으로 해외여행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게 안 되면 국내여행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70년대엔 책읽기, 글쓰기 등 자기계발을 위한 소망이
많이 나오고 자유와 인권을 말하는 지성인도 눈에 띈다.
지금부터 47년 전인 63년, 성악가 이규도 씨는 '새해 첫 꿈'을 통해 이태리 라 스카라 좌 무대에 쥬제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서 커튼콜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사랑의 묘약'을 함께 부르다 박수를 받았는데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란에서 배우 신성일 씨는 "뉴욕의 엑터스 스튜디오 같은 데 가서 한 1년쯤 흠씬 스타수업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66년, 지휘자 김만복 씨는 '새해 민성(民聲)'을 통해 "우리는 너무 우물 안 개구리다"고 자탄하며 "예술인의 해외진출을 위한 정부 원조도 없었지만 예술인들이 한 덩어리가 돼 정부를 설득할 능력도 없었다. 이젠 해외진출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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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변종하 씨는 "'국가재건'은 국민정서 문제를 중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국가 체면을 위해서라도
현대미술관이 건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음악가들이 거의 국내에서만 활동할 뿐, 해외활동이 미미했으며 현대미술관이 없어
화가들이 창피스러워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경제 부양에만 관심이 많았는지 예술가들의 불만이 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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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임성남 씨는 "국립극장의 66년 공연예산이 9백만원에서 4백만원으로 무자비하게 삭감됐다."며 도대체 국립극장 존립 이유가 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알려준 건 무엇보다 어느 주부의 민성이었다. 박00씨는 "한 해 동안 절약이란 소리를 귀가 아프게 들어왔다. 아무리 절약을 해도 모자라는 살림이었다."면서 "새해엔 제발 그렇게 아껴 쓰지 않아도 조금은 저축도 할 수 있는 삶이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면서 물가가 오르면 월급도 좀 오르고, 여자가 할 수 있는 부업거리도 늘어나기를 소망했다
먹고살기가 워낙 힘들어 설까. 67년엔 공무원, 교사들이 봉급 좀 오르면 좋겠다는 소망을 끝없이 피력했다. 동대문경찰서 수사주임은 "민폐를 끼치지 않고도 최저생활을 할 수 있게 보장해 주면"하고 바랐고 중부경찰서 순경은 "이 고달픈 검정제복을 벗기에 미련이 없는 새 직장이 나서기를" 희망했다. 당시 ‘민폐’란 경찰 사회에서 '약간의 뇌물'을 의미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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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 이름) 여교사는 "봉급만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대전시청 행정주사(주무관)는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연금수당이나 가족수당을 주면 좋겠다."고 했다.
한 유명 작곡가도 "만날 작곡만 할 게 아니라 나도 사장자리 하나 땄으면 싶다"고 해 돈 벌어 먹고살기가 만만치 않음을 은연중 내비쳤다.
단성사 선정부장은 "돈이나 실컷 벌어 2층 집을 짓고 싶다"고 했고 택시운전사는 우동 속 흑진주 발견을 염원했다.
재미있는 것은 인기를 끌던 가수 최희준·현미 씨가 "살을 좀 빼고 싶다"는 소망을 공개리에 피력한 것.
한 사람은 "뚱뚱해 보행이 곤란할 정도"라고 했고 다른 이는 "지금 16관이 나가는데 1관 반 쯤 빼야겠다."는 계획을 공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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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엔 여류 유명 인사들의 새해소망이 눈길을 끌었다.
이희호 여성문제연구회장은 "지난해 절실히 느낀 게
직장여성의 무력하고 처량한 신세였다."며
직업여성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줄 상담소를 열고 싶다고 밝혔다.
작가 최정희 씨는 "정동 아파트 6층에 살며 걸어올라 다니는데
엘리베이터가 생기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꿈을 신문에 실었다.
또 홍신영 간호협회장은 "대중음식점 웨이트리스가
간호원(당시 명칭) 캡을 쓴 걸 더러 보는데 올해엔
요식업자들을 설득해 꼭 그걸 벗기고 싶다"고 별렀다.
황온순 한국보육원장은 "1만2천명에 이르는 전쟁고아가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다"며 "제발 각 가정의 양자 양녀로
들어가기를 기원"했다. | |
살림살이 나아진 70년대, 건강·여가생활에도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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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에 들어서며 사람들의 소망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먹고 살기가 다소 안정되어서인지 업무 관련 소망이 늘었다. 또 건강을 생각하고 여가생활에 눈을 돌렸으며 재충전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얘기가 나왔고 책을 더 많이 읽겠다는 사람도 적잖았다. 물론, 형편이 나아졌다곤 해도 서민들은 여전히 어려운 살림살이에 볕이 들기를 고대했다.
71년 영화배우 윤정희 씨는 "지난해 저질영화 시비로 인 불명예를 씻고 건전하고 밝은 향토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연극배우 김동원 씨는 장충동에 신축중인 국립극장이 빨리 완공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로 미루어 국립극장 공사가 지지부진했으며 극장이 완공되면 그 자신이 첫 무대에 서겠다는 꿈을 세운 것으로 풀이됐다.
76년은 한국 스포츠가 올림픽 무대에서 첫 금메달을 따낸 해다. 주인공은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 그는 그해 첫날 몇 신문에 밝힌 소망을 통해 "올해는 한국 스포츠가 올림픽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따는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며 "그 주역을 내가 맡아 조국에 영광을 안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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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농구선수 박찬숙 씨는 "현재 키가 191cm인데 4cm만 더 커 동양 제1의 센터가 되고 싶다"고 했다.
키가 더 컸는지는 모르나 그는 동양 제1의 센터로 군림했다. 탁구선수 이에리사 씨는 어깨부상에서 회복해
여자단식에서 8연패 하기를 염원했고 프로복서 유제두 씨는 모든 게임을 KO로 이겨 타이틀을 방어하고 싶어 했다.
프로레슬러 김일 씨는 "문화체육관이 매일 만원이 될 정도로 프로레슬링에 관심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명 인사들은 대개 자기계발을 새해 소망으로 꼽았다. 김재규 건설장관, 김우중 대우 사장, 김준성 제일은행장,
김봉재 중소기협회장 등이 더 많은 독서를 새해 목표로 제시했다. 남덕우 부총리는 하루 2갑 피우는 담배를 줄여 건강을
살피겠다고 했고 영화감독 유현목 씨는 등산과 바다낚시에 빠져보겠다고 밝혔다.
서울의대 한용철 교수는 "전매청에서 의학계 권유를 받아들여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경고문을 붙이기를" 소망했다.
코미디언 구봉서 씨는 "거꾸로 매달려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며 무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임희춘 씨는 "열심히 웃기고 벌어 고아원 양로원을 돕겠다."고 밝혔다. 중앙관상대(기상청) 김동완 통보관은 "
하늘을 보고 걷는 버릇이 없어지기를" 바랐고 롯데 야구단 감독은 "인기도 없고 의욕도 상실한 성인야구에 신풍이 몰아치기를" 기원했다. | |
수많은 소망과 염원이 뭉쳐 이뤄진 오늘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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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통사람들의 소망은 더 절실했다.
한 어민은 "일반물가가 뛰는 것만큼 생선 값도 오르기를" 바랐고
은행원은 "찌든 월급봉투가 부풀던지, 아니면 정년퇴직
송별연을 받아보는 행운을 잡든지" 둘 중 하나를 소망했다.
택시 운전사는 생활보장을 위한 월급제를 희망했고
어느 음식점 주인은 "분식 날을 없애고 잡곡을 일정부분 섞게 하여 음식점마다 특색 있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우편집배원은 "우편번호와 주소를 정확히 써주고
고층건물에는 우편함을 모두 설치해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반면 전화교환수는 "시외전화 이용자들이 전화 걸기 전에
이용방법을 잘 알고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해 새집을 장만한 주부는 "은행 빚 갚기 위해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겠다."고 밝혔고 가톨릭 신부는 "모두가 인간 존엄성과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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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이 뭉치고 결실 맺어 오늘의 한국이 이루어진 것 아닐까. 한 사람에겐 작은 소망일지라도
그것이 나라의 힘, 인류의 발전 동력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21세기 두 번째 10년을 맞으며 또 얼마나 많은 소망이 나라 전체를
감싸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지난 신문에서 지난 이들의 소망을 읽는 것은 미래 후손들이 오늘 우리의 소망을 읽으며 느낄 것만큼이나
경이롭다. | |
- 글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