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개국의 예언서, <도선비기>는 정말 실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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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도선국사 영정(보물 1506호)
1. <고려사>, 도선이 왕건에게 비기를 전했다?
"세상의 소리가 들리는가?
무슨 소리인가?
울음소리인가? 웃음소리인가?
무엇을 보았는가?
내가 준 <도선비기>는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책이 아니야.
그대는 그 책을 봐야 하고
나는 그대에게 그 책을 전해줘야 해.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야."
- 드라마 <태조 왕건>
893년.
왕건은 도선에게
<도선비기>를 전수받았다고 전한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야.
<도선비기>를 펼쳐봐.
보이는가?
보이는가?"
- 드라마 <태조 왕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한 왕건.
이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도선국사입니다.
<고려사> 첫머리에 보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게 된 내력에 대해 적고 있는데,
여기에 도선국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에게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알려주었다고 하는데요,
'내년에 귀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그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고 지으시오.'
이렇게 왕건의 탄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하는 책을 전해주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왕건이 17세 때
도선은 직접 송악으로 와서 왕건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출사치진(出師置陣)'
- 군대를 출동하고 진을 치는 법,
'지리천시지법(地利天時之法)'
-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
'망질산천감통보우지법(望秩山川感通保佑之法)
- 산천의 형세를 바라보고 또 그것을 이용하는 법'
이런 내용을 본다면
도선은 왕건의 출생부터 교육까지
전 과정을 도맡았던 스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되도록 도와준 은인인 셈이죠.
왕건의 출생과 성장을 적은
이 <고려사>의 기록은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또 왕건과 도선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 오늘 궁금증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옥룡사 부도지,
천년 전 잠든 도선을 만나다!
전남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백기산 자락.
도선국사가 살던 절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지만
이 일대가 바로 도선이 창건한 옥룡사가 있던 자리다.
옥룡사터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던 옥룡사는
1878년 화재로 폐사된 이후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여기가 중앙이 되고 도선국사가 계셨고
사방 각처에 쭉 암자가 있던 터가 있어요."
- 최갑순(67세), 옥룡면 추산리
1998년.
순천대 발굴팀이 조사한 결과
부도터가 발견되었다.
부도지.
부도터 한가운데는
정남향으로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탑이 있었다.
그리고 이 부도 아래서 묘가 발견되었다.
돌로 된 관 속에는 인골이 물에 잠겨있었다.
석관, 세로 95cm, 가로 54cm
죽은 사람을 안치하기엔 작은 크기다.
그렇다면 석관의 주인은 어떻게 묻힌 것일까?
"석관의 길이가 불과 95cm인데요,
사람이 죽어 그대로 묻는 것을 '신전장(伸展葬)'이라고 하는데
보통 1미터 50cm~2미터 됩니다.
그런데 1미터도 안 되는 95cm인 것은,
분명히 가매장을 해서 육탈 시킨 후
뼈만 추려서 갖다넣는 2차장,
즉 '쇄골장'을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 최인석 교수(순천대 고고미술사학과)
2차장을 지내고
부도를 설치하는 것은
유골의 주인이 명망 높은 고승이었다는 증거다.
인골에 대해 연구하는 박선주 교수(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뼈의 크기에 따라 성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물을 빼달라고 그랬죠.
사지뼈라든지, 골반의 특징으로 봐서 이분은 남성이고,
또 나이는 아래턱이라든지, 사지뼈 부근에 골담 형성 과정이라든지 봤을 때
60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인골은 과연 도선의 것일까?
도선의 생애를 기록한 비는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규장각>에는
목판본으로 된 도선의 비문이 전해지고 있다.
도선이 입적한 해는 898년,
그의 나이 72세,
무덤의 주인과 비슷한 나이로 추정된다.
무덤의 주인이 도선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부도터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이것은 부도의 탑신석편인데, 사천왕상 조각입니다.
오른손에 칼을 잡고 있는 양상인데
이 양식으로 봐서 통일신라 후기
즉, 9세기에 유행한 양식을 보여주는 부도편입니다."
- 최인석 교수(순천대 고고미술사학과)
도선이 살았던 통일 신라 말기 양식을 보이는 이 사천왕상 조각은
유골이 발견된 부도 자리에서 출토된 것이다.
통일 신라때 조성된 연곡사 부도에서도
비슷한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무덤안에선 줄무늬 기와도 출토되었다.
줄무늬 기와는 통일 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형태로
무덤의 주인이 통일 신라 시대 사람이란 증거다.
"석관을 드러내고 조사한 전 과정이라든가,
주변 토총 조사를 통해 봤을 때,
부도를 만들고 나서,
석관을 만들고 나서,
후대인들이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그런 증거들이 속속 나왔습니다.
만약 후대인들이 손을 댔다면
후대의 유물이 나왔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직 통일 신라 후기 기와편들만 출토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도선국사 부도를 만들 때
같이 석관을 만들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 최인석 교수(순천대 고고미술사학과)
사후에 가매장을 한 다음
나중에 뼈만 추려서 석관에 매장한 도선국사의 묘.
그 위에 부도를 세우고
부도를 보호하는 전각까지 만들었다.
선각국사 도선.
그는 이곳에서 바로 천 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도선에 대해 발굴된 확실한 유적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도 아래서 발견된 도선의 유골은
천년 전 도선의 존재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케 했습니다.
부도 옆에는 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도는
그동안 비문으로만 남아있던 도선의 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도선이 살았던 시대의 양식으로
도선의 비를 복원해봤습니다.
이 비에 적힌 내용을 보면은
맨 앞부분에는
도선의 출생과 승려가 되기까지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옥룡사에서 35년간 참선을 하면서 수도를 한 고승이다'
(宴座忘言三十五년)
그 다음에 보면 '음양지리(陰陽地利)'
그러니까 풍수지리를 배우고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을 한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의 뒷면에 보면은
이 비를 건립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天德二年奉宣(천덕이년봉선)'
그러니까 '1150년 고려 인종 때 국가에서 왕명을 받아 세웠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선비는
도선이 입적하고 250년 후에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 비에 적힌 내용은 도선에 대한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고,
또 국가에서 왕명을 받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불경이 아닌 참선으로,
선종과의 만남!
그렇다면 이 도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월출산 자락에 있는 성기동 유적지(전남 영암면 군서면 구림리).
백제의 왕인 박사와 함께
도선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의 바위 위에는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살던 집터'란 글이 새겨져 있다.
도선의 어머니는 꿈에 광채 나는 구슬을 삼키고 도선을 잉태했다고 전한다.
최씨원(崔氏園, 도선 어머니 생가)
"'옛날에는 최씨집이었는데 지금은 조씨집이 되었다'
이렇게 금석문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옛날부터 '성인이 태어나는 터'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성기동(聖基洞)'으로 관리해왔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성역으로 이렇게 보호했습니다."
- 이정훈 계장(영암군청 문화공보과)
원래 이곳은 마을이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성인이 태어난 곳이라서 신성시하며 보존하고 있다.
도선이 태어난 인근에 있는 월출산 도갑사(전남 영암).
도선이 개창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도갑사 <국사전>에는
도선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 그려진 영정을 최근에 모셔온 것이다.
15살에 출가한 도선은
처음엔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를 한다.
그러나 20살 되던 해,
도선은 승려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전남 곡성면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통일 신라 때 고승 혜철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곳에서 도선은 스승 혜철대사를 만나 새로운 가르침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무설설 무법법(無說說 無法法)'이라는 화두였다.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면
'정전백좌수(뜰 앞에 잣나무다)' 한다든지
'마른 똥막대기다' 한다든지
그런 화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설설 무법법'도 하나의 화두입니다.
그걸 알아차리면 견성성불 하는 것이죠."
- 일미, 태안사 큰스님
'말 없는 말,
법 없는 법'
'무설설 무법법'은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는
자연과 마음속에 근본 자리를 깨닫는 것이었다.
도선은 이곳에서 선종에 입문한 것이다.
그것은 불교 경전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오직 참선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어려운 경전이나 교리가 아니라,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선종이다.
선종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종교 운동이었다.
"참선을 도입하게 된 배경이
불교의 종교성으로써,
실천성이 없는 그 불교를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그것은 대단히 혁명적인 개혁입니다.
그것은 당시 교학승(교종)들이
이론에 치우쳐있고,
권위주의, 명예, 집단의식 이런 것에 빠져 있었을 때,
이런 것들을 타파하고
순수한 불교의 정신, 이론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의 모티브,
이것은 개혁도 보통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서윤길 교수(동국대 불교대학원장)
혜철선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도입해온 선승이었다.
그는 일찍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그곳에서 유명하고 있는 선종 불교를 접하게 된다.
그가 귀국하여 창건한 태안사는
우리나라 선종 불교가 태동한 중심지였다.
혜철을 비롯한
당나라 유학승을 중심으로
선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선종 9산 선문
"당시 신라 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교종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종을 대신해서 새로 일어난 선종은
중앙, 경주에 발 붙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지방에 거점을 마련해서
사찰을 짓고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까 지방의 유력자들, 호족이라고 하는데
그들과 밀착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선종은
중앙 경주에서가 아니고,
각 지역에서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꾸는 세력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홍승기 교수(서강대 사학과)
'무설설 무법법'의 깨달음을 얻은 도선은
15년간의 운수행각에 들어간다.
운수행각이란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는 선승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었다.
도선은 이 과정에서
신라말의 혼란스러운 사회 현실과 민심을
직접 보고 느끼는 계기가 됐다.
37살 되던 해,
도선은 옥룡사를 중창하고 35년간 머물면서
인근 광양과 구례에 4개의 절을 창건한다.
바로 독자적인 옥룡선문의 출발이었다.
옥룡사(玉龍寺), 미우사(米佑寺), 삼국사(三國寺), 도선사(道詵사), 운암사(雲岩사)
"도선국사가 선종 계통에서 사회적인 위치가 점점 높아가고
깨우침의 세계가 점점 깊어지면서 배우는 제자들이 모여들겠죠.
그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소,
오늘날로 치면 연구소, 학교라고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던 겁니다.
전에는 스승의 그늘을 못벗어났다면
옥룡사를 개창을 하면서
자기의 철학, 자기의 세계를 비로소 펼쳐나가는 시작이었다 볼수 있습니다."
- 홍승기 교수(서강대 사학과)
신라말 개혁 사상의 중심이었던 선종 불교.
도선은 그 중심의 맥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도선은 참선으로 깨달은 선승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수백명이나 되고
그가 창건한 절이 너댓개나 되는 걸로 봐서
당대에서 그의 명성은 대단했던 걸로 보입니다.
해서 도선은 입적후에 '선사'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도선은 고려 시대 더 높게 평가를 받습니다.
고려 현종은 도선을 선사에서 '대선사(大善師)'로 한단계 더 올립니다.
숙종은 '왕사(王師)',
인종은 '국사(國師)'로 추증을 합니다.
'국사'는 국가에서 승려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신라 시대 승려를
고려 시대 국사로 추증한 경우는
원효, 의상, 도선,
이렇게 세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도선은 사후
원효, 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고승이었습니다.
4. <도선비기>는 있었다!
- 송악길지설, 서경천도설!~
이 도선은 왜 고려 시대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추앙을 받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도선이 왕건에게 직접 주었다는 비기(秘記)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도선이 썼다는 이 비기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요?"
서울 영풍문고 역학 관련 코너.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풍수 관련 서적은 수십종.
그 중에는 도선이 직접 썼다는 책도 있다.
내용을 보면 도선이 직접 남긴 유작이라고 밝히고 있다.
도선 관련 책을 낸 한 저자를 찾았다.
도선풍수학회를 이끌고 있는 저자는
선대부터 내려오는 필사본을 내놓았다.
도선국사 친필은 아니지만
필사로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
<무감편> <구천현묘비서> - 도선 유작 필사전래본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이니까 몇 백년 되었는지 저도 잘 몰라요.
도선의 풍수에 관한 이론을 조금씩 적은 책들이 조금씩 있어요.
그러나 그것들은 '뙈기문서' 즉, 조각조각 붙여놓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구요,
<무감편>하고 <구천현묘비서>가
유일하게 지금 우리에게 발견된 체계화된 저서라 할 수 있죠."
- 정관도(<도선국사 풍수문답> <구천현묘비서 내의경>의 저자)
이 책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오대산 상원암 빈 암자에서
천장을 수리하다 우연히 발견했다고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오백여 년전의 일이다.
이 책을 발견한 사람은
책 내용이 소중해서 세상에 전한다고 책 말미에 밝히고 있다.
도선 관련 책을 펴낸 또 다른 저자 이운정씨(<요해 도선비기> 저자).
"제가 이 책을 구한 것은 우리 스승님이 당시 70이셨어요.
돌아가시기전에 제게 평생을 공부한 유작인데 너에게 주노라 하시면서 주셨는데,
'현묘경'에다가,
그 다음에 '십조통맥',
그 다음에 '옥룡자유상록'이라든가 이런 관계되는 책하고,
그 다음에 '범수비결'에 적용하는 스승님 나름대로 번역한 책이 있었어요.
그것을 제게 남겨주셨어요."
이들이 펴낸 책들은 과연 도선이 남긴 유작들일까?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유작은 없다.
도선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양은용 교수.
그는 도선의 비기가 거론되는 시점에 주목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도선이 썼다는 책이름이 곳곳에 기록되어있다.
<옥룡기(玉龍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도선비기(道詵秘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도선밀기(道詵密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그런데 이런 책들은
고려 중기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중기는
거란족의 침입이라든지,
이자겸의 난,
무신난이라든지,
묘청의 난이라든지,
이러한 사회 불안과 혼란이 가중되면서
초기부터 전해내려온 도선 관련 비기들이
나중에는 예언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대부분의 책들이 가탁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초기에는 안나타나는데 중기 이후부터 나타나니까요."
- 양은용 교수(원광대 동양학 대학원장)
거의 대부분이
후대인들이 부풀리거나 과장해서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다는 <도선비기>.
그러나 <고려사>에는
비기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고려 숙종때 김위제는
수도를 옮기자는 상소를 하면서
도선의 비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가 고려가 건국되고
160년이 지나면 한양에 도읍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고려에는 3경이 있는데
160년이 지나면 한양으로 옮길 것이다."
- <고려사> 열전 김위제 전
"<고려사>에 인용되는
<도선비기> 관련 일관되게 나타내는 내용은
개성의 지세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지기쇄왕'
어느 시기가 되면 지기가 약해지고,
다시 또 강해진다는 내용으로 풍수지리설이죠.
한두 권이 아니고
여러 권에서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은,
<도선비기>속에는
'개성이 명당이냐 아니냐',
'이게 언제까지 명당이냐'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 양은용 교수(원광대 동양학 대학원장)
고려의 도읍이었던 송악.
고려 개국 당시
송악이 최고의 명당이라는
송악길지설은 도읍을 정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고려 궁궐이었던 만월대.
풍수지리상 금돼지가 누워있는 형국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명당 자리였다.
이런 명당터에
왕건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때 나온 지도를 가지고 한 번 보겠습니다.
만월대가 명당으로써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본다면
뒤에 송악산이 주산이 됩니다.
송악산에서 오른쪽으로 감아 뻗어가는 자리가 백호 자리가 되구요,
그리고 왼편으로 감고 있는 줄기가 청룡에 해당됩니다.
백호에서 흘러내린 맥이 앞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안산이 되구요,
그리고 바깥으로 만월대 앞을 길게 감고 있는 안산이 전부 조산이 됩니다.
따라서 만월대는 특히 산으로 쭉 겹겹히 둘러싸여 있고,
그 사이 사이로 산에서 흘러내린 물길들이 모여서
만월대 앞으로 흘려가고 있는 그런 터로 볼 수 있습니다."
- 성동환 교수(경산대 풍수지리학과)
송악이 명당으로 꼽히는 것은
풍수지리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 송악은
군사,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손색없는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송악은
우리나라 중앙에 있으면서
약간 서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경주하고 비교해봤을 때
경주는 동쪽에 지형적으로 보면 상당히 높으면서
오른쪽에 치우쳐있는데 반해서,
송악(개성)의 경우에는
대내적으로 봤을 때도 한반도의 중앙에 있으면서
대외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봤을 때도
상당히 중심이 되는 그런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성동환 교수(경산대 풍수지리학과)
고려 개국 당시 최고의 명당에 세워진 만월대.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외적의 침입과 무신난 등으로
고려 왕조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바로 이 때부터
'송악은 지기가 다했으니 도읍을 옮기자'는 여론이 조성된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도선을 내세운 각종 비기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도선이 지었다고 하는 책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책들을 보면 국도, 도읍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명당의 규모에 대한 책들이 상당히 많을 걸로 봐서
현존하는 책들이 없긴 하지만,
당시 도선이 생각했던 도읍으로써의 입지,
한반도 전체를 거시적으로 살펴 어디가 도읍으로 적절하다
라는 이야기를 남겼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 성동환 교수(경산대 풍수지리학과)
그 내용은 베일에 가려 있지만
<도선비기>는 실제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선의 풍수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을 뿐아니라
국가 정책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 왕실에서도
도선의 이름이나 비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될 정도였음이
<고려사>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서경(평양)으로 천도하자고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묘청도
자신이 도선의 맥을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신들이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하는 사례가 계속 나타납니다.
이들도 <도선비기>를 계속 언급합니다.
<도선비기>에 그렇게 씌여있다는 것이죠
<도선비기>는
전쟁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최영 장군은
전쟁을 하기 전에 왕이 법회를 열면
적이 싸움도 하지않고 스스로 항복한다는 말을 듣고 따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나라 풍속을 따르지 않고 않고
우리의 풍속을 지키자는 정책 결정에도
<도선비기>가 거론될 정도였습니다.
점차 <도선비기>는
도선의 의사와는 달리
현실에 필요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용되기도 하고 더해지기도 한 것입니다.
<도선비기>의 원형을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습니다.
5. 도선의 땅에 대한 믿음, 사랑,
독창적인 풍수 - 비보 사상!
그렇다면 도선의 풍수 사상은 어떤 것일까요?"
도선이 35년간 머물렀다는
전남 광양시 옥룡면 옥룡사는 백기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풍수의 대가였던 도선이 살았던 땅은 과연 어떤 땅일까?
"흔히 우리가 도선국사가 계셨다 하면
대단한 명당터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는 여느 사찰처럼 아주 평범한 입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경력이 좁은 결점도 있고 몇 가지 터에서 문제점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들어오는 입구 부분을 보면 낮아서 꺼져보이는 결점이 있어요.
그리고 여기가 좌청룡에 해당되는데 약간 허약한 이런 결점도 보이고 있습니다."
- 최원석(성신여대 지리학과 강사)
옥룡사 입구는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있다.
땅이 푹 꺼져있어
풍수상으론 치명적인 약점이다.
바로 여기에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어있는
총 면적 7㏊에 6000여그루의
수백년된 고목들이 터널을 이루는 동백나무숲이 있다.
옥룡사 입구에 낮게 꺼져 있는 부분을
인위적으로 보완한 것이다.
"도선국사는
저렇게 꺼져있는 부분을
명당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명당으로 꾸미고 있는 형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저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입니다.
들어오는 입구를 숲을 조성해서
보완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게 하는 기능을 맡게 하고 있고,
좌청룡에 해당하는 허약한 부분도
숲을 조성해서 지기를 돈독해하는,
비보적인 방책을 써서 보완하게 하는
그런 도선국사의 사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최원석(성신여대 지리학과 강사)
고려말 승려 굉연(宏演)이 쓴
<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에는
도선의 풍수 사상을 비보로 쓰고 있다.
"사람이 만약 병이 있어 급하면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질을 해서 병을 낫게 한다."
땅을 고쳐 비보로 쓴다는 도선의 사상.
그것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이치와 같은 것이었다.
"산천의 병도 마찬가지니
내가 점 찍은 곳에 절이나 불상, 탑 또는 부도를 세우면
사람에게 침과 뜸을 뜨는 것과 같으니
이를 비보라 한다."
- <고려국사도선전>
"풍수적으로 완벽한 터를 찾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터가 너무 드센 곳이라든지,
너무 허약해서 비어있다든지 해서
실제 그 장소에 갔을 때 결점이 되는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는데,
그런 결점이 있는 땅도 버리지 않고 써야 할 경우에
여러가지 보완적인 조치를 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통틀어서 비보라고 할 수 있겠죠."
- 성동환 교수(경산대 풍수지리학과)
비보는
도선 풍수 사상의 핵심이었다.
새로운 명당을 찾기보다는
땅의 부족한 부분을 고쳐서 명당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 가운데 한곳이라는
전남 순천시 조계산 선암사.
선암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이래
도선이 중창을 한 절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선암사를 중창하면서 그린 중창도.
<선암사 중창도>
선암사는
풍수 사상에 의해
철저히 좌청룡, 우백호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하 명당 선암사에도
결점을 보완한 비보의 흔적이 보인다.
선암사 북쪽에 있는 각황전 철불.
불상에 도금을 해서 지금은 금불이지만
원래는 철불이다.
이 철불은
도선이 선암사를 비보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그 때 당시 도선국사가 북쪽이 허해서
그 기를 눌려야겠다는 뜻에서 조성해서 모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지암 스님(선암사 태고종 종무원 부원장)
비보의 또 다른 흔적은
절 입구의 강선루(降仙樓)에서도 볼 수 있다.
선암사를 감아 흐르는 개울이 양쪽으로 갈라진 이곳은
풍수상 기가 빠져나가는 곳이다.
이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누각을 세워 비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선암사는
상당히 명당 사찰이라고 이야기되고 있고,
사실 그러한데,
상당히 넓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결점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부분을 비보하는 사례가 되겠습니다."
- 최원석(성신여대 지리학과 강사)
비보는
당시 명당 풍수와는 다른
도선의 독창적인 풍수 사상이다.
도선국사 영정(선암사 소장본)
도선은 왜 비보 풍수를 주장했을까?
지리산에서 흘려내린 전남 구례군 섬진강.
도선은 이곳에서
지리산의 위인으로부터 풍수를 배웠다고 전한다.
도선은 모래로
산천 순역의 형세를 파악하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산과 강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면
사람들이 재해없이 살 수 있는 순(順)의 형세다.
그러나 산과 강이 서로 등지고 흐르면
이것이 자연재해나 홍수가 많아 사람들에게 해를 미친다.
이것이 역(逆)의 형세다.
도선은 이렇게 산천 순역을 배우면서
삼국도(三國圖)를 그렸다고 전한다.
도선은 한정된 지역이 아니라,
삼국, 즉 우리나라 전체를 염두에 뒀던 것이다.
"모래로 삼한의 순역형세를 그렸다.(山川順逆之勢 三國圖)"
- <도선비문>
"도선은 산과 강의 전체적인 순역 그림을 그린거죠.
우리 한국의 전체 산천 순역의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디가 가장 순한 곳이냐, 어디가 가장 역한 곳이냐,
만약 개성을 중심으로 본다면
어디가 가장 순하고 역한 곳이냐를 보고
그 산과 강을 비보를 한거죠."
- 최원석(성신여대 지리학과 강사)
도선이 살았던
신라말 혼란기.
그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순역의 개념으로 보고 비보했던 것이다.
전국 산천을 순례하면서 국토와 민심을 파악하던 그는
사람들에게 땅에 대한 믿음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도선의 비보 사상은
사람들에게 살고 있는 땅을 새롭게 보고
좋은 곳으로 가꾸려는 실천 방법이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도선이 창건한 절이 무려 3,800개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당시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에 비보를 많이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여길 보시죠.
'전미(全美)',
전체가 아름다워야 한다,
이것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명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최고의 땅만을 골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 풍수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도선이 만든 풍수는 독창적인 것이었습니다.
'비보(裨補)', 좋게 고치고 도와준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풍수는
중국 풍수처럼 명당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명당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롭지 않습니까?
땅이 넓은 중국에서는
명당을 찾아쓰면 되지만,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찾아 고쳐쓰는 것이 현실적으로 효율적이라는 것을
도선은 간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도선의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고려를 통일 할 때 활용한 사람이 바로 왕건이었습니다.
6. 도선과 왕건을 이어준 사람들
- 최지몽, 형미선사, 경보대사!
도선이 비보 사상.
어떻게 해서 왕건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고려 왕조의 창업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사>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편>.
그 첫편엔 도선이 왕건의 출생과 그 창업 과정을 예언했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선은 왕건을 직접 만나 통일의 비법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건의 출생과 관련해 사학계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내용이 설화적이고 신비로운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도선은 기본적으로 선승입니다.
선승은 공부한 후에
전국 산천을 떠돌아다니면서 수련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되어있습니다(운수행각).
그러기 때문에 도선이 개성을 방문할 기회는 충분하지 않나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태어나기도 전에 후삼국 통일을 예언했다든가,
또 비기까지 전해줬다든가 하는 것은 의문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아직 후삼국 세력이 갖춰지지도 않았고
호족이라고 하는 지방 세력이 꽤 많았는데
유독 왕건을 지목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 홍승기 교수(서강대 사학과)
도선이 생존했을 시기에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는 평범한 호족 세력에 불과했다.
왕건이 본격적으로 삼국 통일에 나선 것은
도선이 죽고난 다음의 일이다.
그런데 <고려사>엔 왜 이런 기록이 나오는 것일까?
"왕실의 존엄함을 높이기 위해서
그것을 미화하고 과장되게 부풀리는 경향이 많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인데요,
그러나 도선이 왕건에게 준 영향은 컸고,
또 어떻게 이야기하면 왕건이 도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측면이 많습니다만,
왜냐면 통일 전쟁 과정에서
도선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인용한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러한 사실이 많기 때문에
후대에 도선과 왕건의 관계를 좀 부풀려서 서술한 부분이 많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홍승기 교수(서강대 사학과)
그렇다면 도선의 사상은 어떻게 왕건에게 전해졌을까?
도선이 태어났다고 하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
도선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곳이었다.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의 몸으로 도선을 낳고 버렸다는 국사암.
비둘기들이 와서 도선을 감싸자
도선의 어머니가 다시 아이를 데려가 키웠다고 한다.
그후 이 바위엔 신령한 기운이 있다고 해서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바위에 구멍을 냈다.
"이 자리를 국사를 낳은 자리라 해서 국사암이라 부르고,
전체 마을을 '구림'이라고 부른 이유가
'비둘기구(鳩)'자 '수풀림(林)'자를 따서 부르고 있습니다."
- 박정웅(영암군 문화재 전문위원)
국사암 옆에는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최지몽의 생가가 있다.
최지몽의 후손들은
지금도 족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최지몽 생가
낭주 최씨 족보
'남해 영암인'
도선이 입적한 지 십 년후에 태어나는 최지몽(崔知夢).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그는 도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고려 태사공 최지몽.
그는 열여덟살에 왕건에게 발탁되어
통일의 과정에서 왕건을 도운 일등 공신이었다.
<고려사>에는
최지몽이 학문에 밝았을 뿐아니라
특히 천문과 점술에 밝았다고 한다.
도선의 사상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유학과 역사를 널리 공부하였는데
특히 천문과 복점에 능했다."
그가 왕건에게 발탁된 것도
왕건이 삼한을 통일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태조 왕건이 불러 꿈을 점치게 하니
장차 삼한을 통일할 길조라 했다."
- <고려사> 열전 최지몽 전
"그는 영암 사람이고 관심 분야도 도선과 비슷한 점을 미뤄보건대
최지몽이 도선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왕건이 그를 정치 참모로 발탁했고,
최지몽은 그의 휘하에서
도선의 사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돕게 했다고 봅니다."
- 홍승기 교수(서강대 사학과)
전남 강진군 월출산 자락 무위사.
도선과 같은 영암 출신인
형미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당 유학생으로 이곳에서 명망이 높았던 형미선사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통일에 기여한 인물이다.
선각대사 형미선사비.
그의 비문엔 왕건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왕건이 나주 전투를 끝내고 돌아갈 때 초청되어 왕건을 도왔던 것이다.
"왕건이 나주를 항복시킨 후
특별히 부탁하여 함께 돌아왔다."
도선의 사상을 전했을 또 한사람은
동진대사 경보다.
그는 도선의 직계 제자면서 전남 구림 출신으로
도선 사후 옥룡사를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왕건의 사상을 직접 배운 경보도
왕건에게 초빙되어 송악으로 갔다고 전한다.
동진대사 경보비문(1712년 옥룡사 간행 목판본)
'김씨 구림'
'지검징부왕경(芝檢徵赴王京)
"왕건이 옥쇄를 찍은 교지를 보내
송악으로 초빙했다."
"최지몽, 형미, 경보, 이 세사람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도선과 왕건을 연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형미와 경보는
도선이 가지고 있는 사상 자체를 이어주는데 기여를 했다고 한다면은,
최지몽은
그 이론에도 정통했을 뿐더러
왕건이 그 사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도 기여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승기 교수(서강대 사학과)
왕건이 이들 영암 세력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나주를 공략할 때였다.
나주는
대당 교역로일 뿐아니라
후백제를 공략할 수 있는 한반도 최남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나주를 공략하면서 왕건은
이 지역 인물인 도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왕건이 전국 통일하는 과정속에서
마지막 공략한 것이 나주 지역입니다.
그러면서 그 지역 인물들이
대거 왕건의 왕실로 초빙됩니다.
그 지역에 선종이 발전했으니까
당연히 선승들 계통이 초빙되었겠죠.
그들이 와서 왕건의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속에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도선과 왕건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 서윤길 교수(동국대 불교대학원장)
왕건은 도선의 비보 사상을 어떻게 활용한 것일까?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 왕조를 알리기 위해 왕건이 직접 지은 사찰이다.
개태사엔 세 분의 미륵불이 모두 남쪽을 보고 서 있다.
왕건이 정복한 후백제를 포용하면서
불력으로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해 비보를 한 것이다.
"왕건의 입장에서는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세력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당시에 큰 영향을 미쳤던 불교 사상이나
땅을 통해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풍수적인 생각 이런 것들을 많이 필요로 했을 것 같은데,
도선의 비보 사상은
불교 사상과 풍수 사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왕건의 입장에서
도선의 사상이
통일 과정에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 성동환 교수(경산대 풍수지리학과)
혼란기,
민심을 모으고 국가를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던 도선의 비보 사상.
왕건은
도선의 비보 사상을 이용하여
고려 통일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풍수는
도선 이후
천 년 동안 우리 생활 깊숙히 자리잡아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풍수는
조상의 묘를 잘 써서 자손이 복을 받는 것으로 변해왔습니다.
도선의 풍수는 원래 이런 이기적인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도선이 살았던 시대 사람들은 불법과 또 땅에 힘에 의지하면서 믿고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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