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로맨스라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신분을 뛰어 넘는 이들의 사랑얘기는 오랜 세월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회자돼 왔으며, 시와 소설은 물론 학술 논문에도 곧잘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의 사랑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원효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향토설화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남대 인문학부(철학전공) 최유진 교수는 최근 한국불교학회가 발간한 「한국불교학」 제55집에서 ‘신라에 있어서 불교와 국가-원효를 중심으로’란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서울대에서 원효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원효사상연구』(경남대, 1998) 등을 저술한 ‘원효 전문가’ 최 교수는 원효와 관련된 여러 문헌 검토를 비롯해 출신성분, 원효의 정치사상, 원효와 왕실과의 관계 등 다각적인 고찰을 통해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결혼하지 않았음을 치밀하게 규명했다.
최 교수는 먼저 요석공주 얘기가 유일하게 나타나는 『삼국유사』의 신빙성에 대해 주목했다. 일연 스님은 당시 전하던 『향전』의 내용을 『삼국유사』에 그대로 옮겨 적고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는 것. 논문에 따르면 『삼국유사』 「자장정율」에서처럼 일연 스님 스스로 향전의 기록을 부정했듯 향전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설화적으로 각색된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또 원효에 대한 가장 정확한 자료로 손꼽히는 ‘서당화상비’(9세기초 건립)와 『송고승전』(988년 출간)에도 요석공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원효가 정말 공주와 결혼했다면 이는 엄격한 골품제도의 틀을 깨는 엄청난 사건으로 원효의 전기에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특히 ‘서당화상비’에는 원효가 거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요석공주에 대한 얘기가 없다는 점과 『삼국사기』「설총」전에도 설총의 어머니가 공주였다는 기록이 없는 점도 원효와 요석의 관계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반증한다. 따라서 일연 스님이 설화적 요소가 많은 『향전』의 기록을 채록한 것은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원효의 위대함을 나타내주는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최 교수는 골품제라는 측면에서 원효와 요석공주의 결혼이 가능한 지에 대해서도 검토했다. “골품제하에서는 같은 신분의 사람들끼리 혼인을 하였다”(이종욱) “신라왕실의 여자들은 아래 골품제와는 결혼하지 않았다.”(이기동) “육두품은 아예 진골과의 결혼대상에서 제외된 신분층이었다.”(이기백)라는 저명한 신라사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한 최 교수는 “육두품 내지 오두품에 불과한 원효가 태종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설화의 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10등급 안팎에 불과했던 원효의 아들 설총과 그의 손자 설중업의 낮은 관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만약 요석공주의 아들이나 손자라면 이보다 훨씬 높아야 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또 원효가 당시 백고좌회에도 초대받지 못할 정도로 불교계의 비주류로 철저한 대중불교의 실천자였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원효가 왕과 대중 앞에서 『금강삼매경론』을 강의한 것이 왕실과 관계된 것으로 유일하게 나타나지만, 이 또한 『금강삼매경론』이 원효의 후반기 저술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사건을 요석공주와의 결혼으로 연결 짓기는 어렵다는 것. 원효에 대한 당시 불교계의 반감이 적지 않았고 불교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왕실이 당시 불교계를 등지면서까지 공주와 원효의 결혼을 적극 추진했겠냐는 지적이다.
특히 요석공주와의 결혼설은 “왕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잘못을 하면 그 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보았던 원효의 국왕관에도 어긋날뿐더러 실제 원효의 삶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도 민중과 더불어 살며 그들을 교화했던 모습이라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무렵 원효대사의 부인이 공주였다는 설화가 있었을 것”이라며 “원효의 부인이 보통 사람보다는 공주라고 하는 것이 위대한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으로 이 같은 설화가 만들어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031호 [2010년 01월 11일 1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