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말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을까?
오랜 세월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금강산.
시와 노래로만 접했던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이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금강산엔 아직 우리에게 공개되지 않은 곳이 있다.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
그곳엔 천년전의 유적이 숨쉬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의 유적이 그것이다.
용마석.
마의태자묘.
신라가 망하자 홀로 금강산에 들어가 풀을 베어 먹었다는 비운의 왕자.
과연 마의태자는 그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았을까?
"왕건, 견훤, 궁예.
후삼국시대를 풍미했던 주역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인데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인물이 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
이광수의 소설에도 등장했던 이 마의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는 비운의 왕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마의태자의 최후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던 그대로일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의태자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유일합니다.
"왕이 고려에 항복을 하자
태자는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다리 밑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먹으면서 생을 마쳤다."
- <삼국사기>
"태자는 통곡을 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에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삼베옷을 입고 나물을 뜯으면서 생을 마쳤다."
- <삼국유사>
이 두가지 기록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들어가 허무하게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 책을 한 번 보십시오.
이것은 최남선이 금강산을 한 번 둘러보고 쓴 <금강예찬>이라는 책인데,
"태자의 유적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깊은 산속에 들어온 그에게 성(城)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진 금강산에 남아있는 유적이
마의태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금강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마의태자의 유적이 발견되어서 관심을 모았습니다.
마의태자는 과연 어디서 어떻게 최후를 맞은 걸까요?
역사스페셜,
오늘은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라고도 할 수 있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대해 풀어보겠습니다."
2. 강원도 인제,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과 유적들!~
마의태자의 유적이 발견된 곳은 강원도 인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의태자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어
이것이 신라 천년사직의 최후의 유적지임을 알리고 있다.
마의태자(麻衣太子) 유적지비
실재 마을엔 마의태자에 대한 여러 전설들이 남아있다.
인제군 상량면엔 마을 들판에 넓은 바위 하나가 덩그마니 놓여져 있다.
두 개의 돌이 포개져 있는 바위의 이름은 옥새바위.
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겨뒀다는 바위다.
"돌 자체가 옥새바위로 이름이 난거죠.
그리고 여기는 백사까지 있다고 소문이 나고
늘 뱀은 항상 이 주위를 돌고..."
- 윤홍규(마을주민)
마의태자가 숨겨놓은 옥쇄를 지키기 위해
늘 뱀이 바위 주변을 맴돌았다는 것이다.
옥새바위가 있는 상량면 옆
김부리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고개가 있다.
이름하여 수구네미.
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어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구네미를 넘으면 만나게 되는 김부리.
이곳에도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남아있다.
마을 중앙에 있는 대왕각은
시골 마을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부리의 대왕각은
신을 모시는 여느 성황당이나 산신각과 다르다.
대왕각 안에 모셔진 위패엔
'신라 경순대왕의 태자 김일', 바로 마의태자인 것이다.
'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
그런데 1940년 이전 위패에 있었던 글귀는
지금과는 달랐다.
'敬順大王一子之神位'
(경순대왕일자지신위)
김일이라는 이름이 빠져있었다.
그러나 분명 경순왕의 아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대왕각에서
일 년에 두 번 마의태자를 기리며 제사를 지낸다.
오랫동안 마을에서 전해온 일이다.
"왕이 이곳에 오셔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제사를 다 지내는거죠.
옛날부터 전해내려왔구요."
- 이근우(마을 주민)
사실 역사적 인물이
신격화 되어 모셔진 경우는 많다.
그러나 남이장군이나 최영장군 등
특정 신으로 모시는 것과,
영월 단종제처럼
마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모시는 것은
그 성격이 다르다.
바로 그 마을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한 마을에서 역사적 실존 인물이
민간 신앙의 대상신으로 모셔지는 경우는,
그 인물이 마을을 지나쳤다든가,
정치적 사건에 의해 그 마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든가,
사회적으로 좌절을 당한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영월의 단종 신앙입니다.
단종이 청룡포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
단종이 영월까지 갈 때 지나쳤던 마을에서
서낭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같은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마의태자도 마을에서 민간 신앙의 대상물로
모셔진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윤형준(인제군 문화재 전문위원)
대왕각의 존재.
그것은 마의태자가 잠시라도
이곳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마을엔 마의태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유적과 전설이 있다.
맹장군이 살았다는 맹개골.
맹장군은 마의태자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맹장군은 마의태자를 수행해 이곳까지 와가지고
전설로는 신라 재건을 위해서 의병을 모으고,
양부라든지, 저 북면에 있는 한계리까지
군사 활동을 하고 군량을 모았다고 합니다."
- 이태두(한계초등학교 교장, 향토연구가)
'군량리'의 지명은
'신라 부흥을 위해 양식을 모아두었다'는 뜻으로 전해지며,
이곳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고토회복, 광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의태자의 국권회복의 의지와 노력이
다무리라는 지명을 낳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 새다무리 - 아래다무리 - 웃다무리 - 원갑둔리 - 수구네미 - 김부리
* 다물6교
"이 지역의 여러가지 전설과 지명 유래,
특히 맹장군에 대한 전설을 미루어볼 때에,
마의태자라는 분이 이 마을에 들어와서
신라를 위한 항거 운동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 이태두(한계초등학교 교장, 향토연구가)
인제군에는 마의태자에 대한 생생한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었다.
수구네미
옥토골
항병골
옥새바위
다무리
군량리
맹개골
"인제 지역에 있는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의태자는 금강산에서 풀을 뜯으면서 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신라 부흥 운동'을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특별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유난히 항거에 관련된 지명이 많을 뿐 아니라
매년 두차례씩 제사를 지낸다는 것도 분명 범상치 않습니다."
3. '김부대왕동',
경순왕은 왕건에 항복하러 갈 때 인제를 거쳤을까?~~
"그러나 이 인제 지역의 전설의 주인공이
처음부터 마의태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시대 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정산고>란 책에
눈에 띄는 기록이 있는데
"관동 인제현에 신라 경순왕이 살던 지역이 있어
그곳을 '김부대왕동'이라 명명하였다.
읍지에 많은 사적이 실려있는데
경순은 곧 신라의 항왕인 김부이다."
그리고 인제 지역에 김부리는
경순왕의 이름 김부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그 주인공은 경순왕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믿어왔습니다."
"옛날부터 거기는 명칭이 '김부대왕, 김부대왕' 불렀었어요.
저희들이 알기로는 경순대왕의 이름이 김부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붙여지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 이근우(마을 주민)
"어디 가십니까? 물으면,
김부왕 갑니다 했을 때,
모두들 여기가 김부왕이 계셨던 곳이구나 생각들 하고 있었지,
요즘 와가지고 마의태자라는 것을 알았지,
그전에는 전부 경순왕이 여기 와서 작고 하신 걸로 알고 있었어요."
- 윤홍규(마을주민)
"대왕각의 신위를 보면
그 주인공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입니다.
그러나 '김부대왕동'이란 지명은
경순왕일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과연 신라의 경순왕은 인제에 올 가능성이 있었던 걸까요?"
우선 경순왕이 왕위에 있었던 시기를 살펴보자.
당시 신라의 영역은
지금의 경상도 지역으로 좁혀져 있었다.
따라서 경순왕이 인제까지 올라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에 항복한 뒤에 경순왕의 행적은 어떤가?
<서울시스템>을 통해
<삼국사기>를 살펴봤다.
<삼국사기>엔 항복하던 날
경순왕의 모습이 자세히 남아있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에서 출발하여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에 이어져 길을 꽉 메웠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담을 두른 듯 하였다."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갔다.
경순왕은 고려의 수도 개성으로 향한 것이다.
개성에 도착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고려사>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태조 왕건은
경순왕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태자보다 높은 정승으로 봉하고
대궐 동쪽에 신랑궁을 마련해주었다.
개성에 정착하여 살게 한 것이다.
"김부를 정승으로 삼아 천석을 급여하고
신란궁을 주었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삼아주었다."
그런데 기록엔
과연 경순왕이 개성에 살았는지
의혹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다.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로 삼아 사심관으로 삼았다."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사심관 제도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두가지 취지가 있는데,
보다 근본적인 것은
중앙의 지방 통치를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방 출신의 관리들을 우대한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중앙과 지방의 조화, 균형을 위한 제도인데,
이게 시작된 건 경순왕이 개성에 왔을 때
처음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었거든요."
- 홍승기 교수(서강대 사학과)
경순왕으로 비롯된 사심관 제도는
지역 연고자에게 해당 지역의 행정을 총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면 경주를 떠나 개성으로 간 경순왕이
다시 경주로 왔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심관은
원래가 중앙에 와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출신 지역을 총관장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상주하는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경순왕을 사심관으로 임명한 취지도
서울에 묶어둔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상황을 봤을 때 경순왕이 갖는 비중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인질이라는 측면도 그만큼 강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인이 원했다고 해도
경주에 내려갔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 홍승기 교수(서강대 사학과)
경순왕이 경주로 내려가지 않고
개성에 살았다는 것은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이 자기 나라를 떠나 타국에 살았다." - <삼국유사>
그리고 경순왕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도
개성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바로 왕릉의 위치 때문이다.
현재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에 있다.
신라의 왕들 중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묻힌 것이다.
그래선지 경순왕의 무덤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영조 때 발견되었답니다.
그 이전에는 실종을 당했다가
영조 때 경순왕이라고 발견해가지고
여기 비석들도 세우고 모셔졌답니다."
- 송대진(연천문화원 사무국장)
개성에서 불과 60리 떨어진 곳.
이는 경순왕의 최후가 개성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고려의 귀족들은 주로 개성을 중심으로 살고
또 죽음 다음에도 예외없이 개성이나 그 근처에 묻혔습니다.
경순왕은 고려 건국 당시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마 경순왕도 개성에 살다가
그 근처, 개성 주위에 묻힌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용선 교수(한림대 사학과)
그렇다면 이제 한가지 가능성만 남는다.
경주에서 항복하러 가는 길에 인제에 들린 것은 아닌가?
아시아문화연구소.
"경주에서 한강 유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신라에서는 세가지 중요한 교통로가 있습니다.
그게 어디냐면은 죽령을 통과하는 길과,
개립령을 통과하는 길,
그리고 추풍령을 통과하는 길입니다.
신라의 북진 정책 과정에서
이 세가지 길이 모두 이용되는데,
중원경(충주)이 설치된 이후에는
계립령의 경로가
가장 중요한 신라의 한강 유역 교통로가 되었습니다.
경순왕의 경우에도
이 중원경의 계립령을 통과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서영일 박사(경원대 아시아 문화연구소)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경순왕의 행렬은 30리에 달할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선
신라의 교통로 중 가장 큰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립령을 통과하는 길일 것이다.
경주에서 영천, 선산을 지나
계립령이 있는 문경과 충주를 지난다.
그리고 수로를 이용할 경우 양평을 지나고
육로를 이용할 경우 이천을 지나 개성으로 향한다.
경주에서 개성까지 경순왕이 지나는 길에
인제는 없었다.
4. 그럼 갑둔리 5층 석탑의 '깁부(富)'는 누구인가?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봤을 때
경순왕이 강원도 인제에 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특히 김부대왕동의 김부(富)와
경순왕의 김부(傅)는 한자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인제와 관련된 인물은 마의태자일까요?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습니다.
'김부대왕동'의 유례라고 하는 김부가 누구인지
아직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치로 보나 이름으로 봐도
김부대왕동과 대왕각은 분명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각의 김일(鎰)은 마의태자입니다.
'김부대왕동'의 이름과 전혀 다른 이름입니다.
김부(富)와 김일(鎰),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그런데 얼마전 인제 갑둔리에서
그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인제 갑둔리 어귀엔
5층석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석탑을 보게 된 것은
불과 얼마전, 그 이전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이 탑을 발견하기 전에
학생들로부터
탑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탑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 탑골이 어디냐 하고
학생들하고 같이 왔을 때
이 골짜기를 탑골이라고 한다,
그럼 탑골이면 이곳에 탑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가정을 하고 이곳을 탐사하게 되었습니다."
- 이태두(한계초등교장, 향토연구가)
학생들과 탑골을 조사해본 결과
예상대로 탑의 조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우선 그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모았다.
그리고 하나씩 끼워맞춰 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이 탑의 옥개 부분이 몇 개 흩어져 있었고
이 탑의 면석이 이끼가 잔뜩 낀 채 널러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명문이 제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그걸 연구한 결과
이 유물이 아주 가치있는 유물이다 알게 되었습니다."
- 이태두(한계초등교장, 향토연구가)
탑 기단부에 새겨져 있는 명문은 다음과 같다.
普薩戒第子仇上主 (보살계제자구상주)
金富壽命長存家 (김부수명장존가)
五層石塔成永充供 (오층석탑성영충공)
養太平十六年丙子八月日 (양태평16년병자8월일)
명문 중엔 김부리라는 지명과 똑같은
김부라는 한자가 보였다.
지명의 유례를 밝힐 수 있는 단서였다.
"보살계 제자였던 제자 구가
상주인 김부의 수명이 장수하고, 그 집안이 잘 되기를,
여기 존(存)자는 있을 존자지만 '집안이 잘 보존된다'는 뜻도 있거든요,
그러기 위해 오층석탑을 조성 했다"
- 최복규 교수(강원대 사학과)
김부라는 사람을 위해 세워진 탑.
그렇다면 김부는 언제 사람일까?
"통일신라의 탑은
형태가 밑으로 내려갈수록 좀 퍼져 있거든요.
그런데 이 탑은 올라가는 선이 가파르게 올라가지요.
1층 기단부와 5층 기단부의 경사각이 날카롭게 올라가거든요.
이런 양식은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 최복규 교수(강원대 사학과)
보다 정확한 연대는 명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태평 16년'은 요나라 연호로
1036년, 고려 정종 2년이다.
신라가 망하고 100여 년이 흐른 뒤다.
따라서 김부는 고려 초기에 존재했던 인물인 것이다.
탑을 조성하고 이름까지 새길 정도라면
제법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사>에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여기 나오는 김부가 모두 여섯분으로,
이분들은 다 명종 이후의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김부탑의 김부와는 다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후대 사람들입니다."
- 박성수(前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고려사>에 새겨진 김부라는 사람들은
인제 갑둔리 오층석탑에 새겨진 김부보다 후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고려사>로는 김부의 정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김부를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운 시기와
마의태자가 살던 시기가 가깝다는 것이다.
"저희 시조가 마의태자인데,
여기 '일(鎰)'자가 들어가는 태자공이시고,
자는 겸용이라 그럽니다."
- 김창원
마의태자 김일과 석탑에 새겨진 김부.
혹시 두 이름 사이에 김부의 정체를 밝힐 단서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당시 표기법이었던 향찰을 이용해
김부와 김일, 두 이름을 살펴보기 위해
신라 향찰을 연구하는 양희철 교수를 찾았다.
"언뜻 보면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향찰에서 표기하는 어휘를 생각하면
김일의 鎰자는 이 글자입니다.
그리고 김부리의 富자는 이 글자입니다.
鎰(중량일) = 溢(넘칠일) = 益(더할익)
鎰 = 益 = 富(부유할부)
'鎰'자는 도량형에서 24냥이다, 금이다,
이 때만 쓰이고 다른 곳에는 안쓰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鎰'자하고 '益'자하고 같이 쓰입니다.
'鎰'자하고 '益'자하고 뜻이 같으면
이 '益'자는 '富'자하고도 그대로 같이 쓰입니다.
'넉넉하다' '많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鎰'자하고 '富'자하고는 뜻으로 보면은
무관한 글자가 아니라 거의 같은 글자입니다.
같은 말을 표기를 다르게 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양희철 교수(청주대 국문과)
향찰 표기법을 따르면
益과 富는 '넉넉하다'는 뜻을 가진 한자로
같이 쓰인다.
따라서 넉넉하다는 뜻을 가진 鎰도 富와 같이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김부는 바로 김일인 것이다.
김부(富) = 김일(鎰)
삼국사기엔 이런 사례들이 여러 차례 보이는 데 그 중 지명으로는
'머리'란 뜻의 수(首)와 두(頭)가 함께 씌여
우수주를 우두주라고도 하고,
우수주(牛首州) = 우두주(牛頭州)
고을 또는 '마을'이라는 뜻의
리(里)와 항(巷)이 함께 씌여
월명리(月明里) = 월명항(月明巷).
사람 이름에도 부(夫)와 종(宗),
이 두글자는 음은 틀리지만 그 뜻은 똑같이 '마루'다.
따라서 이사부와 태종, 거칠부와 황종은 동일인이 되는 것이다.
이사부(異斯夫) = 태종(苔宗)
거칠부(居柒夫) = 황종(荒宗)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자 할 때도
같은 뜻의 한자를 이용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거득령공'은
자신의 이름을 숨기기 위해 '단오'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거득령공(車得令公) = 단오(端午)
수레 수릿날
"은닉 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때,
이런 은닉성은 신라의 다른 문헌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한 이야기입니다만,
거득령공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서울 오면 나를 찾아오라,
내 이름은 단오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랬을 때 토고가 서울에 와서 찾다가 찾지 못하게 되는데,
한 노인이 이 이야기를 듣더니 내가 해결해주겠다 합니다,
그게 바로 누구냐면 거득령공이다 합니다,
그리고 그걸 풀어주는 이야기를 하는데,
단오는
세속에서 이야기하는 5월 5일 단오다,
수릿날이다,
거득령공의 거(車)가 수레 아니냐,
이렇게 직접 이야기 하지않고
돌려서 자기를 은닉하며 말하는 측면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김부리에서 '부자부(富)'자를 쓴 게,
김일의 '鎰'자하고 상당히 연관성이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 양희철(청주대 국문과)
이렇게 갑둔리 오층석탑의 김부라는 이름은
마의태자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당시 표기법 향찰이라든가,
또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싶을 때
같은 뜻의 한자를 혼용해서 썼는 예를 볼 때,
김부는 김일, 즉 마의태자일 가능성이 높은겁니다.
그렇다면 인제와 마의태자는 관련이 있는 겁니다."
5. 마의태자의 행적은 신라 부흥 운동의 의지!
마의태자는 왜 인제에 머문 걸까요?
우린 여기서 마의태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삼국사기>를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되어있습니다.
개골산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다시피 금강산의 다른 이름,
마의태자가 있는 인제에서 금강산은 그리 멀지 않는 곳입니다.
금강산, 경주, 인제.
이 세 지역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요?
이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마의태자가 경주에서 금강산을 가는 길을 알아봐야겠습니다.
그 당시 경주에서 금강산을 가는 가장 손쉽고 빠른 길은
동해안을 따라 쭉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의태자는 이 길을 따라 가지 않았습니다."
마의태자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 곳곳엔
마의태자의 전설과 유적이 남아있어 추정해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충주다.
월악산 자락에 자리한 대원사 미륵사지는
마의태자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전설상으로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여기에 머물면서
여기다가 이 사찰을 직접 지었다고 합니다."
- 길경택(충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미륵사지가 바라보이는 맞은편에 또 하나의 절이 있다.
덕주사.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창건했다는 절이다.
특히 이곳엔 덕주공주가 조성했다는 마애석불이 전해지고 있다.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덕주사를 창건하고
그리고 상덕주사에 저 마애불을 덕주공주가 직접 조성했다는 이런 전설이 있는거죠.
덕주사 마애불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남쪽이고
대원사지 미륵불이 바라보는 방향은 북향이고,
이러다보니까 두 불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남매간에 눈길을 주고받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돼죠."
- 길경택(충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충주에 이어 원주,
그리고 양평에도 마의태자의 전설이 있다.
양평에 유명 사찰인 용문사.
그런데 이곳엔 불상이나 다른 사찰 건축물보다
더 많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곳이 있다.
유명세를 치루고 있는 건 다름아닌 사찰안에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다.
수백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의 유례에 마의태자의 전설이 있다.
"이 나무가 심어지게 된 동기가 있어요.
신라때 마의태자께서 금강산 유람을 가시던 도중에
용문사를 들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에서 뿌리를 내려 여태까지 번성하고 있다는 전설입니다."
- 준원(용문사 주지)
인제로 넘어가는 마지막 관문 홍천에도 마의태자의 전설이 남아있다.
"한 500미터 직선으로 올라가면 거기 지왕동이라고 있어요.
지왕동은 왕이 지나갔다고 하여 지왕동이고,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큰턱골에 절터가 있었고
조금 더 가면 절의 암자가 있었죠.
거기서 서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왕터라고 하여
거기 왕이 머물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 김영달(강원 홍천 주민)
지왕골과 왕터는 인제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그렇다면 이제 신라의 교통로와 마의태자의 길을 접목시킨다면
마의태자의 행적을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의태자와 관련있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 중
가장 중요한 곳은 계립령과 양평, 그 다음에 한계령쪽 한계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럼 결국 마의태자가 동해안 교통로를 사용하지 않고
내륙지방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지형도와 교통로를 두고 봤을 때,
경주에서 계립령까지 이른 다음에,
계립령에서 충주를 거쳐,
수로로 양평 지역에 이른 것 같습니다.
양평에서 다시 홍천을 거쳐
인제로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서영일 박사(경원대 아시아 문화연구소)
이렇게 마의태자는 동해안 길을 두고
내륙의 산길을 선택한 것이다.
경주 -> 영천 -> 선산 -> 상주 -> 문경 -> 충주, 원주 -> 양평 - > 홍천 -> 인제
그런데 마의태자가 간 길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충주와 원주는
통일 신라 시대 각각 중원경과 북원경이라 불리던
신라 제 2의 수도였다.
그리고 마의태자가 지나간 곳은 모두 천혜의 요새들이다.
충주 대원사 미륵사지와 덕주사도
덕주산성 안에 둘러싸여 있어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이 되는 곳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송계계곡을 감싸고 있는 산성이고
월악산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이중, 삼중, 사중의 산성이 쌓여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덕주사쪽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는 상당히 요새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 길경택(충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마의태자가 신라의 천혜의 요새, 주요 도시들만 선택해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의 거점이 되었던 도시들을 거치면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어떤 관리라든가,
뜻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하면서 간 것이 아닌가,
마의태자가 간 곳이
대체로 아마 신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 충주, 원주 아닙니까,
아마 거기에 있던 신라의 구세력들을 같이 합류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신형석 교수(이화여대 사학과)
경주에서 인제까지 마의태자가 선택했던 길엔
신라 부흥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의태자는 인제에서 실제로 부흥 운동을 한 걸까요?
<삼국사기>에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김부가 고려에 항복을 결정하자,
태자가 이에 반발하면서,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충신과 의사를 구하여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하다가 힘을 다할 때 말 것이지,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천 년 사직을
쉽사리 남에게 내어주겠습니까?"
그러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태자는 통곡을 하며 물러섰다고 한다."
그러니 마의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의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을 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태자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쉽사리 금강산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했을까요?
더군다나 당시 신라에는 경순왕의 항복 결정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당대 유학자인 최치원도
해인사에 들어가 평생 은둔 생활을 했으며,
<고려사>에는
신라가 패망하고 200년이 흐른 뒤에도
신라 부흥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자,
최충현이
신라 부흥에 관한 소문이 각지로 퍼져나가니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끈질지게 신라 부흥 운동은 지속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시 마의태자는 신라 부흥 운동에 대한 꿈을 꾸었을 법도 한데
당시 인제는 어떤 지역이었을까요?
강원 인제읍.
신라말 인제는 일찌기 고려에 복속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인제는 고려보다는 신라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신라가 북진을 하면서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이 이 영동 지방입니다.
기록에 나와 있듯이 이사부라는 인물이
삼척을 거쳐 강릉까지 진출하고 원주에 이르게 되는데요,
6세기 이곳의 유물, 유적을 보면 완전히 신라판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영동 지방은 영남 지방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내지에 속했습니다."
- 서영일 박사
더구나 인제는 군사요충지로 외부 세력에 맞서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한계산성이다.
한계령 고개에 있는 이 산성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뒤로는 높은 산이 있고 앞으론 계곡이 흐르고 있어
방어하기에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산성은 마의태자가 있던 고려 초기에도 있었을까?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축성 기법을 통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한계산성을 보면은
이중으로 쌓인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줄은 이미 무너져 있고
다른 줄도 많이 무너져 있지만
그 둘을 연결해보면 일부 잔존해있는 성벽들이 있거든요.
후대 것은 고려 고종때 다시 쌓아서 만든 성벽으로
서기 1,200년대 다시조성을 했거든요, 대몽 항쟁을 하기 위해서요.
그러나 그 앞에 쌓았던 산성은 그 수법으로 봐서
삼국 시대나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이 됩니다.
그래서 이 한계산성이
삼국 시대 이래 고려 말기까지 축성되고
여러번 수리되어 사용되었던 산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최복규 교수(강원대 사학과)
삼국 시대부터 이 한계산성은 존재해왔던 것이다.
마의태자가 인제로 향했던 고려초에도 산성은 이 자리에 있었다.
산성에는 실제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하는 흔적이 있다.
산성 꼭대기에는 천제단이 있는데
적이 쳐들어올 때마다 안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천제단 기둥엔 명문이 남아있다.
너무 희미해져 그 의미를 해석하긴 어렵지만
산성이 이용되었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흔적이다.
삼국 시대 이래 이 지역은 줄곧 방어기지였던 것이다.
"신라 부흥 운동의 거점이 과연 이곳이었겠느냐 하는 것은,
이 지역 일대에서 항명 운동 구전이 생생하게 전하는 것을 볼 때에
이 지역이 거점이 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지 않느냐 생각됩니다."
- 최근영(前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정보실장)
그런데 인제 지역에서 방어 기지 역할을 한 것은 한계산성만이 아니다.
산성 곳곳에선 기와가 발견되는데
이와 똑같은 기와가 나타나는 곳이 있다.
백담사의 전신인 한계사지가 그곳이다.
우선 한계사가 한계산성처럼
고려 초기에 이 자리에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석탑을 조사해봤다.
"바로 8세기 초부터 9세기 중엽까지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탑인데요,
3층 석탑인데,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하고 비슷한 양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탑만 가지고도 통일 신라 시대의 탑이며, 그 절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최복규 교수(강원대 사학과)
고려초, 인제엔 한계산성과 한계사지가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선 같은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우리가 절 하면 부처님을 봉안하고
일반 신자들이 와서 공불을 드리고
스님들은 여기서 공양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한계사지는
이러한 일반적인 절의 기능은 물론이고,
나아가 국방의 기능,
산성의 전초 기지와 같은 기능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최복규 교수(강원대 사학과)
또한 저항 세력이 정착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기좋은 환경이다.
지금 김부리는
군사 지역으로 지정되어 해져 사람들이 모두 떠났지만
인제 일대는
산간 지역이면서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사람이 살기좋은 곳이었다.
실제 이곳 김부리 일대만 해도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부평초등학교
"여기는 학생들에 의해서
고려 초기부터 조선조 후기까지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그릇과 유물들을 수집해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집해둔 유물들은 제법 많은 양이었다.
유물 중엔 고려 시대 최고품인 청자접시도 보이고
각종 서민들이 썼을 법한 그릇과 단지들이 있다.
"마의태자는 역시 그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서
적절한 농토가 있어야 되겠고,
깊은 산속이어야 되겠고,
사람이 좀 많아 군사력이 되겠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강원도 일대를 전전하다가 이곳에..."
- 박성수 (前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이렇게 사람이 살기좋은 곳일 뿐아니라
군사적인 요충지인 인제 지역은,
마의태자를 비롯한 신라 세력이 정착을 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지역이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보면 말이죠,
마의태자가 아버님께 대든 것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마의태자 혼자 한 게 아닙니다.
경순왕의 항복 결정에 반대한 주전파가 대단히 많았어요.
그래서 마의태자가
주전파를 배경으로 해서 부흥 운동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학자들이 그렇게 거의 주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말을 못한 것이죠.
그러나 이 지역에서 한계산성은
마의태자가 저항을 해온 곳이다
이렇게 쭉 그렇게 구전되어왔습니다.
그렇다면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쭉 직행하지 않고
인제에 왔다가, 설악산에 왔다가, 그리고 금강산으로 갔거나..."
- 박성수 (前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6. 만주 대륙으로 뻗어나간 신라 부흥 의지!
금나라 시조 승려 금준은 신라인!
"인제는 고려에 대응해 저항을 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마의태자의 운명과 함께 멸망을 하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갔다가 전해 들은
이 <송막기문(宋漠記聞)>에는
금나라 시조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 형태였을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그 추장이 신라인이 될텐데
그렇다면 신라 부흥의 꿈은 좌절된 것이 아니라
만주 대륙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될텐데 과연 그럴까요?
중국과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여러 기록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의 또 다른 기록들을 찾아보기 위해
명지 대학의 김위현 교수를 찾았다.
"금나라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고,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는데..."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에도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밝히고 있다.
"금의 시조 이름은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미 60여 세였다.
그때 완안부에 60세가 시집 안 간 처녀가 있어 결혼했다."
- <금사>
그런데 <금사>와 <송막기문>의 기록엔
한가지 차이점이 있다.
<송막기문>은 시조가 신라인이라고 적고 있고
<금사>는 고려인이라고 적고 있다.
과연 고려인일까? 신라인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시조 함보가
금나라에 들어간 연대를 확인해봐야 한다.
"여진추장은 완안씨로 신라인으로 불렀다."
"함보가 아구타의 7대조입니다.
대개 한 세대를 30년을 잡습니다.
그래서 7대 내지 6대로 봐야 합니다.
왜냐면 함보가 들어갈 때 이미 60세였거든요.
그럼 180년 내지 200년 됩니다.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할 무렵이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 사람, 고려 사람이라고 보는 게 틀림없지 않나 싶습니다."
- 김위현 교수(명지대 사학과)
시조 함보는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7대조다.
그런데 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한 것이 1,115년,
한 세대를 30년을 계산해 거슬러 올라가면
함보가 금나라로 들어간 연대가 나온다.
바로 900년대 초,
고려(918년)가 건국되고,
신라가 항복(935년)하고,
후백제 멸망(936년)하여,
다시 후삼국이 통일되는 격변기였다.
이때 고려인으로도 불리고, 신라인으로도 불렸다면
그는 '고려에서 간 신라인'일 것이다.
실제 <만주원류고>에는
시조가 신라인임을 밝히고 있다.
"신라의 시조가
자기 나라 성을 따서
국호를 금이라 했다."
- <만주원류고>
1대 7대
ㅣ
함보(시조) - 오로 - 발해 - 수가 - 석로 - 오고네 - 핵리발 - 아골타(금 건국, 1,115년)
피자숙
영가
그렇다면 금나라로 간 신라인은 누구인가?
<고려사>에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평주의 중 금준이 여진에 들어가 살았는데
이가 금의 시조다.
혹은 김극수가 여진 여자와 결혼해
고을태사를 낳고
고을이 활라태사를 낳았다."
신라의 시조는
금준 혹은 김극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기록에 나오는 함보,
기록마다 이름이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신라때도 집에서 부르는 이름외에,
자가 있고, 호가 있고, 아명이 있고,
또 이제 관명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이름이 여러 개 있을 수 있구요,
평주의 중 금준이라고 했으니 법명일겁니다.
이름이 여러 개 있다는 게 이상할 게 없구요,
금나라의 7대조라면 한사람이 되어야죠,
그렇다면 동일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 김위현 교수
따라서 금나라의 시조는 평주의 승려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
황해도의 평주는
통일 신라 시대에 중요한 지역이였다.
또한 신라말엔
상당수 왕족이나 귀족이 속세를 떠났다.
마의태자 동생도 절에 들어갔으며,
최치원도 해인사로 들어갔다.
따라서 평주의 승려도
경순왕의 항복에 불만을 가진 자일 수 있다.
"나라 이름도 금나라로 했고,
여러 정황으로 봐서
신라 경순왕의 계열,
또는 저항 세력이,
그쪽으로 가서
신라 재건 운동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죠."
- 신형식 교수(이화여대 사학과)
이렇게 만주 대륙으로 올라간 평주의 금준은
부족의 지도자가 되는데,
<금사>엔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두 부족간에는 오랫동안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함보가 지금으로 치면 법규 조항을 만들어
부족간의 싸움을 끝맺게 했다는 것이다.
그 후 함보는 신망을 얻어
여진족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 부 사람이 일찌기 다른 부족의 사람을 죽였던 바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 사이엔 싸움이 벌어져 능히 화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시조(함보)는 스스로 나아가
한사람을 죽인 것으로 싸움이 풀리지 않으니
한사람만 베는데 그치면 부대내에서 물건으로 보상하리라"
- <금사>
"금나라도 따지면
우리나라와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주에 있는 신라 왕족들의 높은 수준의 문화들이
만주 너머의 야만적인 부족에게 상당히 어필하지 않았나 생각듭니다."
- 신형식 교수(이화여대 사학과)
이렇게 김극수는 시조가 되었고
그 후 200여 년이 흐른 후
그 후손이 금나라를 세웠다.
훗날 금나라 건국의 발판이 된 건
바로 신라 재건의 의지였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로 고려에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던 마의태자.
그래선지 마의태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두세줄의 기록이 전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의태자의 최후의 행적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제에 남아있는 유물이나 기록을 통해
쓰러진 나라를 재건하려고 했던 마의태자의 의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꺼지지 않는 의지가 있었기에
만주 대륙으로 이어져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마의태자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승자의 기록으로 숨겨진
신라인들의 부흥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눈길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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