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신라인은 누구인가?
모든 의문은 비석에서 시작됐다.
통일신라인들이 남긴 문무왕릉비문엔 너무나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었다.
투후 김일제는 누구일까?
그리고 비문에서 신라의 태조라고 밝힌 星漢王(성한왕)은 누굴까?
왜 이들이 통일신라의 대업을 이루고 동해에 잠들어있는
문무왕의 비문에 있는 것일까?
대왕암 (감포)
경주에서 수천킬로 떨어진 중국땅,
우리는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문무왕비문의 투후 김일제를 다시 만났다.
중국 고대국가의 수도였던 섬서성 시안에는
그의 무덤도 있었다.
그는 실제로 존재했다.
투후 김일제와 김씨 왕조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왜 문무왕은 그의 비문에 김일제의 이름을 남겼을까?
신라인은 과연 누구인가?
역사의 진실에 가려진 베일!
마침내 우리는 신라의 뿌리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여행에 올랐다.
"1,300년전 신라인이 세운 문무왕 비문에 보면
우리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투후라는 낯선 사람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우리 역사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성한왕이 신라의 시조라는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사교과서를 보겠습니다.
"신라의 건국은 사로국에 살던 6촌의 촌장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박혁거세를 추대하여 왕으로 받들면서 시작된 것이다.
신라는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박, 석, 김 세 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차지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문무왕 비문은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사실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둘> 문무왕비문의 탁본,
'투후'는 누구인가?
우리의 추적은 경주에서 시작됐다.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는 도시 그 자체가 시간의 블랙박스다.
신라시대로 안내하는 수많은 유적들.
우리를 경주로 이끈 것은 역사속에 지워지고 잊혀진
신라 김씨왕족의 비밀을 간직해온 비석이었다.
경주박물관에 마련된 비석전시실.
거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문무왕비(682년 건립)를 만났다.
1,300여 년의 풍파를 겪은 비석은 깨지고 패어진 채 밑부분만 남았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 도서관.
수소문 끝에 우리는 문무왕 비문의 탁본을 소장한 곳을 찾아갔다.
문무왕릉비 탁본(일제시대 1939년 경성제대 구입)
카메라 앞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희귀본 탁본은
비문의 상단과 하단을 모두 본떠놓은 탁본이다.
우리가 찾던 글자는 비문 상단부분에 들어있었다.
'투후'
우리 역사속에 나오지 않는
문무왕 비문의 '투후'는 도대체 그 정체가 뭘까?
중국의 고대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
여기에 우리가 찾는 투후가 실려있었다.
'투후 김일제'
우리는 비로소 '투후'가
'김일제(金日제)'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일제는 누굴까?
그는 왜 신라 문무왕의 비문에 돌연 등장한 것일까?
우린 그의 자취를 쫓아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 서북쪽에 위치한 감숙성 무위시.
지금은 중국의 어느 도시처럼 음악에 맞춰 아침운동을 하는 곳이지만
원래 이곳은 흉노족의 땅이다.
인민공원 한가운데 남아있는 흉노족의 흔적, 마답비연상(馬踏飛燕像)
날으는 제비를 발로 밟을 만큼 빨리 달린다는 흉노의 마답비연.
마답비연을 등지고 서 있는 또 다른 흉노 석상.
놀랍게도 주인공은 김일제다.
석상 앞에 서는 순간
문무왕 비문의 김일제가 보다 실체를 가진 인물로 다가왔다.
"흉노의 후손인 김일제입니다.
마왕신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입니다.
김일제가 관노로
한나라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황제가 김일제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왕신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김일제는 한나라 때,
마왕신으로 이름을 날린 흉노족 출신의 마부로 알려져 있다.
무위촌 외곽에
김일제의 후손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다고 해서 찾아나섰다.
마을이름은 김가장(金家장)
'김씨들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투후 김일제에 대해 취재를 한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추수를 하던 바쁜 일손을 멈추고 달려와 주었다.
마을에는 김씨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800여 호 중에 김씨가 600여 명에 달한다.
이곳의 김씨족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이라고 한다.
유목생활을 하며 떠돌던 김일제의 후손들.
원나라가 들어선 13세기 무렵,
김가장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김가장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김일제의 후손들.
우리는 머나먼 중국땅 김가장 사람들의 모습에서
문무왕 비문에 암호처럼 적혀있던 김일제를 만날 수 있었다.
<셋> 문무왕비문의 복원 작업
- 1961년 탁본과 <해동금석원>,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해동비고>
"우리는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투후라는 인물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투후라는 말은 중국의 김일제라는 실존인물을 가르키는 말이었던겁니다.
그런데 왜 신라 사람도 아닌 중국 한나라 사람을 이 문무왕 비문에 실었던 걸까요?
게다가 김일제는 한나라에서 말을 키우는 마부였는데다가, 한족도 아닌 흉노족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무왕 비문에 흉노족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전문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경주 배반동 신문왕릉.
문무왕 비문은 기적처럼 우연히 발견됐다.
경주의 한 왕릉 근처에서 밭갈이를 하던 농부의 눈에 예사롭지 않는 것이 들어왔다.
흙더미를 파내자 밭에서 두동강난 비석이 불거져 나왔다.
그것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문무왕 비석이다.
그후로 200여 년 가까이 방치되었던 문무왕 비석이
다시 우리곁으로 돌아온 것은 1961년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비석은 하단 부분만이었다.
글자는 830여 자.
그나마 깍이고 패여 판독하기가 어렵다.
문무왕릉비 - 1961년 경주시 동부동 민가 근처 발견, 남아있는 명문 글자 830자.
문무왕비문 복원을 연구해온 경북대 사학과 이영호교수.
그는 금석학 복원 연구의 뛰어난 전문가다.
비문의 전문을 살려내기 위해서
먼저 문무왕비문이 실려있는 모든 문헌 자료를 조사했다.
이영호교수가 찾은 또 하나의 복원 자료는
중국의 금석학자가 문무왕비문의 탁본 자료를 분석하고 판독해놓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이다.
비문의 원문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미스터리 퍼즐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이영호교수는 <해동금석원>의 내용을
서울대 비문 탁본과 비교하며 검증해나갔다.
문무왕비문 - 서울대 탁본
글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비문의 정확한 행과 열을 맞추는 과정은 까다로웠다.
훼손된 글자는 그대로 남겨놓았다.
"이 탁본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중국학자의 <해동금석원>의 내용을 검증할 수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글자의 배열이 정확한지, 글자의 판독이 정확한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문 복원을 시작한 지 일주일.
높이 166미터, 폭 94센치미터의 문무왕비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소실된 글자를 제외하고 앞뒤면에 복원된 글자는 2,600여 자.
비문의 첫행엔
문무왕비문을 지은 사람의 관직이 국학소경(國學少卿)이라고 밝히고 있다.
투후가 등장하는 부분은
비문 전문 5행으로 신라 김씨왕족의 뿌리를 밝힌 부분이었다.
'투후 십오대조성한왕(十五代祖星漢王)'
비문의 중하단엔 문무왕의 즉위와 관련된 내용 실려있었다.
'대왕 용삭원년(大王 龍朔元年)'
비문의 뒷면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업적과 유언.
'백대지현왕(百代之賢王)'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눌유(韓訥儒)라는 사람이 비문을 지었다고 확인되었다.
우리가 추적하는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뿌리를 밝히는 것과 연관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런데 우리보다 200년이나 앞서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를 추적한 고문서가 발견되었다.
<海東碑故(해동비고)>
"여기 <해동비고>에 '문무왕릉비'에 대한 추사(김정희)의 연구논문이 들어있죠.
해동비고 안에는 일곱 개의 비석에 대한 연구논문이 있습니다."
- 박철상, 아마추어 고서적 연구가
김일제와 신라 김씨와의 관계를 연구하던
김정희도 깊은 고민에 빠졌던 흔적이 역력하다.
"신라인이 김일제의 후손임을 밝혔나? 의문이 든다."
<넷> 그럼 15대조 성한왕은 또 누구인가?
우리는 비문을 다시 살피던 중 또 다른 놀라운 인물을 발견했다.
'성한왕(15대조)'가 김일제에 연이어 등장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 기록에 없는 성한왕이
김인문(문무왕 동생)의 묘비에도 적혀 있다.
'太祖漢王(태조한왕)'
시조가 '한왕'이라고 밝히는 것인데 '성한왕'을 말하는 것일까?
"묘비는 어떻든지 많은 사실을 쓰기 때문에 간략히 축소하거든요.
한왕(漢王)이라고 하는 건
즉, 성한왕(星漢王)의 약자라고 봅니다.
그래서 문무왕의 성한왕이나,
그 형제인 김인문의 묘비나,
둘다 시조는 공유했다고 봅니다."
- 문경현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
두 비문에서 밝힌 신라의 성한왕은 누굴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시조는 나정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다.
실제로 신화로만 알고 있었던 나정이 발굴되기도 했다.
나정(사적 제 245호, 박혁거세 탄생지)
혹시 박혁거세가 성한왕일까?
하지만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김알지(金閼智)를 말하는 걸까?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시조 김알지는
경주의 계림(사적 제19호)숲에서 탄생했다.
조선 순조 때 세운 계림비각엔 그 탄생설화가 적혀 있는데,
여기에도 '알지'만 있을 뿐 '성한왕'은 없다.
신라 김씨왕 족보에는
문무왕비문이 시조로 내세운 성한왕이 나와 있는걸까?
때마침 가을 시제를 앞두고
김씨 왕족의 후손들이 경주 숭혜전에 모여있었다.
문무왕비문에 성한왕이 시조로 나온다고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던 족보를 꺼내왔다.
족보에도 신라 김씨왕족의 시조는 분명히 김알지다.
우리는 족보에 실린 문무왕의 선대조를 모두 확인했다.
그러나 성한왕은 어디에도 없었다.
문무왕비문에서 내세운 15대조 성한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알지...미추왕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왕 진덕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현재 저희 족보에 성한왕이라고 하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제가 들어본 일도 전혀 없습니다."
- 김병호, 숭혜전 참봉
<다섯> 문무왕비문은 어디에 있었을까?
- 대왕암? 이견정? 감은사? 사천왕사?...
"자, 이제 우리는 투후에 이어 또 한사람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책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비문에 등장하는 이 성한왕이
완전히 허구의 인물 같다 보이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비문>에도
'태조한왕'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비문에
'성한왕 십오대조'라고 새겨놓았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모를 뿐,
비문을 새길 당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무왕비문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우린 문무왕의 묘가 있는 대왕암부터 살펴봤다.
대왕암은 바다 한가운데 암초다.
비석을 세울만한 장소가 아니다.
문무왕의 수중장사를 전하는 <삼국유사>에도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은 없다.
대왕암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이견정(利見亭)이 있다.
이견정 역시 문무왕의 죽음과 관련된 유적이다.
바다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어
이곳에서 후손들이 선왕을 기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견정 근처에서도 비석을 세운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감포에서 가까운 감은사에 문무왕비문을 세운 건 아닐까?
발굴 결과
감은사지의 기념할만한 유물은 3층석탑 2기와 대웅전터다.
당시 감은사지엔 문무왕과 관련된 독특한 터가 발굴되었다.
장대석을 쌓아올린 석축에서 발견된 구멍이 바다와 연결되는 구조였다.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서
아들 신문왕이 용이 되신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절 감은사에서
용이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고 쉴 수 있도록 만든 구조라고 전해온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우리는 발굴보고서까지 샅샅히 뒤졌다.
하지만 문무왕 비석 받침대와 일치하는 비석은 나오지 않았다.
또 하나의 후보지는 경주 낭산(狼山)이다.
남산의 서쪽 기슭에서 발견된 능지탑(陵旨塔) 유적은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곳이다.
남아있는 탑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탑신 기단부에 조각된 무늬는
무덤 가장자리에 두른 호석을 연상케 한다.
일반 절집의 탑과는 확실히 다르다.
"발굴해보니까 여기서 불을 놓은 흔적이 발견되고
그에 따라서 이곳을 문무왕 화장터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고복우 사무총장, 경주문화원
발굴 당시 화장터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불에 탄 소조불상까지 나와
화장터에서 불교행사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나오는
'庫門外庭(고문외정)'이 바로 이 지역이다.
그렇다면 낭산자락 어딘가에 문무왕비석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낭산의 선덕여왕릉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문무왕과 인연이 깊은 사천왕사터가 나온다.
현재 학계에선
이곳 사천왕사터를 유력한 후보지로 보고 있다.
우린 추사 김정희의 기록을 다시 살펴봤다.
김정희 역시 비석을 '선덕왕릉 아래, 신문왕 앞에서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비(문무왕비)는 동강난 채 유실되고, 귀부(비석 받침대)만 남아 있다'
발굴 조사가 한창인 사천왕사터 현장.
김정희가 말한 터와 거의 일치한다.
우리는 사천왕사에서 실제로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대를 찾았다.
사천왕사지 거북모양 귀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거북등 문양도 예사롭지 않았다.
사천왕사에 거북이 놓인 방향은 정확하게 능지탑쪽이었다.
비석을 꽂았던 받침대도 독특하게 2단으로 되었다.
우리는 이 귀부의 비석 부분 길이와 폭을 재서
문무왕 하단석과 맞춰보기로 했다.
홈의 가로 길이는 약 90센치미터, 세로는 20센치미터다.
문무왕비문의 하단석과 크기가 거의 일치한다.
1,300년전 문무왕비문은
사천왕사지 거북받침대에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
신라의 김씨왕족은 왜 사천왕사에 문무왕의 비석을 세운 걸까?
사천왕사는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창건한 절이다.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전(綠釉塼)
사천왕사에서 발견된 녹유전 불상은
이곳이 호국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50만 당나라군의 침입을 물리친 설화가 전해지는 사천왕사는
신라가 당과 맞서 싸울 때 호국의지를 담았던 절이다.
<여섯> 투후 김일제는 흉노족의 태자였다!!!~
그런 사천왕사라면 문무왕비문속에 성한왕도
통일신라인들에게 특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통일신라인들은 성한왕을 신라의 시조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경주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한 또 다른 비석에서 그 단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흥덕대왕 비편
문무왕으로부터 100년뒤에 세워진
흥덕왕릉에서 발견된 비석이다.
흥덕왕은 신라 제 42대왕이다.
동강난 조각으로 발견된 비편에서도
'태조성한'이란 글자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다른 조각에선 '이십사대손(24대손)'이란 명문이 확인됐다.
비문속의 성한왕은
문무왕의 9대손인 흥덕왕에서는 24대조가 된다.
이는 문무왕을 기점으로 통일신라 김씨왕족이
성한왕을 신라의 시조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까?
"문무왕의 비문에도 암호같은 숫자가 이어져 있습니다.
문무왕과 성한왕은 15대라는 숫자가,
그리고 성한왕과 투후 김일제 사이에는 7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성한왕 15대, 7 투후'
과연 태조 성한왕과 투후 김일제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우린 다시 김일제의 행적을 쫓아가 보기로 했다.
중국 섬서성 시안 홍양현.
옥수수밭 사이로 솟아있는 무덤이 있었다.
이 무덤이 투후 김일제의 묘라고 소개한다.
섬서성 유적 안내책자에도 투후의 무덤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무덤의 남쪽 정면에 있기 마련인 묘비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배나무밭에서 김일제의 묘비를 찾았다.
묘비가 배밭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원래 이 일대가 김일제의 묘역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김일제(B.C. 134 ~ 86) 묘비, 전한(前漢)시대.
관광 유적지 소개에도 나오는 묘임에도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해놓은 것 같았다.
잡풀이 무성한 봉분위로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었다.
도굴꾼의 손을 탄 흔적이었다.
김일제의 무덤 건너편엔 잘 정비된 무덤이 있다.
한무제의 무릉(武陵)이다.
무릉의 높이는 무려 46미터이다.
한나라의 7대 황제인 무제는,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중국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중화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중국인들이 가장 애정을 갖는 황제다.
"한무제는 한나라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황제입니다."
- 묘 관리인
무릉 유적엔
한나라 때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이 함께 묻혀있는데
김일제의 무덤은 그 중 하나다.
한 무제(B.C. 156~37)의 무릉에 어떻게 흉노 출신 김일제가 함께 묻혀 있는걸까?
문무왕비문에 등장하는 투후 김일제와 한나라 무제는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우리는 중국의 소수민족사를 연구하는 전문대를 찾아갔다.
섬서성 사범대학 주위주 교수는
<한서>에 김일제전이 수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반고의 <한서(漢書)>입니다.
<한서>에 김일제에 관한 전기가 들어있죠.
<한서>의 김일제 전기의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김일제의 자(字)는 '옹숙'이고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 주위주 교수(서북민족연구중심 주임)
<한서> '김일제전'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기록이 실려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흉노족의 태자였다.
"김일제는 본래 흉노 우지의 휴도왕의 태자였습니다.
휴도왕은 감숙성 무위의 서북지역을 다스리던 왕이었습니다."
- 주위주 교수(서북민족연구중심 주임)
감숙성 무위시 일대가
흉노왕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의 영토였다.
북방을 호령했던 흉노왕의 기마군단은
한나라를 위협했던 막강한 세력이었다.
감숙성 무위 연지산.
한혈마와 함께 자란 흉노의 태자 김일제는 이곳 연지산 자락에서
정복전쟁에 나선 한 무제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끌려간 김일제는 한나라에서 말을 키우는 노예생활을 했다.
파란만장한 김일제의 삶은
무제를 암살하려는 세력을 진압하면서 극적으로 바뀐다.
그 공으로 제후국의 왕에 임명되었는데, 그 직책이 바로 '투후'였다.
"투후라는 작위는 한무제가 죽기 전에 내린 것입니다.
망하루가 한무제를 죽이려 했을 때
한무제를 구해 준 공로를 높이 사 작위를 내린 것이죠."
- 주위주 교수
<일곱> 김일제, 김알지, 모두 금과 관련있다!~
- 김씨성, 돈황굴 황금신상(금인), 연지산 왕비족 알씨(금), 알타이산(금산)...
흉노족 태자 출신은 김일제는
한나라에서도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직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우리는 <한서> '김일제전'에서
문무왕비문의 비밀을 풀어줄 놀라운 단서를 찾아내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김씨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므로, 金氏(김씨)성을 하사했다."
신라 김씨 왕족에서도 금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계림세묘.
<삼국사기>는
김알지부터 신라 김씨왕족이 김씨성을 썼다고 한다.
김알지 위패에 적힌 '계림'은
그의 탄생신화가 전해오는 숲이다.
김알지 탄생지에 조성된 계림비(순조3년, 1803년)는
조선시대 사람들도 김알지 신화를 사실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황금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었다.
그 밑에서 흰닭이 울고 있어 금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그 안에서 나왔다.
그 아이가 바로 알지였다."
(王夜聞 金城 西 始林 樹間 有鶴鳴聲
: 왕야문 김성 서 시림 수간 유학명성
有金色小독(=櫃:궤) 掛樹枝 白鶴鳴於其下 有小男兒在其中
: 유김색소독 괘수지 백학명어기하 유소남아재기중
乃名 閼智 以其出於金독 姓金氏
: 내명 알지 이기출어김독 성김씨.)
- <삼국사기>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알지'의 성을 '김씨'라 했다는 것이다.
신라 김씨왕족의 기원을 문화인류학적으로 연구하는 김병모 교수.
그는 김알지 신화가 북방 알타이 신화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확신한다.
"유목민은 전통적으로 자기네 조상은
하늘에 계신 절대자가
지상에 있는 여인에게 생명을 보낼 때,
새를 통해서 보낸다고 믿는
민속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새가 아이를 낳는 여인에게 직접 생명을 줄 수 없으니까,
아주 상징적으로 그 여인이 기도하고 있는 높은 나무,
그 높은 나무위에 새가 휙 날아와서 턱 앉는단 말이죠.
그리고 나무밑에 기도하고 있던 여인이 잉태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낳은 아이라야만 유목민의 지도자가 된다,
이런 알타이 신화입니다."
- 김병모 명예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인류학 전공, 알타이현지 연구)
알타이는 유라시아의 중심에 있다.
유라시아의 광활한 초원지대가 알타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알타이산맥.
흉노족을 비롯해 유라시아의 유목민족의 발원지로 알려진
알타이산도 금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알타이산은 한자로 금산(金山)이라고 쓴다.
흉노족 김일제와 신라의 김일제는
금으로 연결되어 있다.
금궤에서 나온 알지는 신라 김씨왕족의 시조가 되고,
금인(金人)을 모시는 흉노의 아들 김일제는 중국 최초의 김씨 시조가 된다.
그렇다면 김일제가 김씨성을 쓰게 된 금인(金人)은 무엇일까?
섬서성 운양현 감천산은
흉노족이 금인을 모시고 천제를 올리던 지성소가 있던 곳이다.
흉노를 무찌르고 금인을 빼앗은 한무제는
이곳에 감천궁을 지었다.
감천궁 유적(한무제가 흉노의 금인을 뺏고 만든 유적)
우린 모래사막 한가운데 지어진 돈황 막고굴에서
금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323호 석굴벽화 감실 안에 모셔진 황금신상이
한무제가 빼앗아간 금인이었다.
"이 제천금인이 바로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의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대상이었죠.
그래서 제천금인(金人)의 '금'을 일제에게 성으로 하사한 것입니다."
- 주위주 교수(서북민족연구중심 주임)
지금도 황금은
북방 기마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 감숙성 서부 기련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만년설이 쌓인 기련산 일대도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다스렸던 영토였다.
기년산에서 흘려내린 눈녹은 물은 화서회랑을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었다.
물과 풀을 찾아 떠돌던 유목민에게 이곳은 하늘이 내린 낙원이었다.
연지, 곤지의 원료인 홍남화의 자생지로 알려진 연지산(燕支山)은
흉노의 왕비를 배출하던 산실이다.
흉노의 왕비는 이곳 연지산의 알씨에서 간택했는데,
알씨는 금이라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김일제의 어머니 이름은
신라 김알지와 발음이 비슷한 알씨(閼氏)다.
"알지를 금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 오늘날 알타이산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도시 이름이 알타이(아르타이)입니다.
알타이 옆에 흘러가는 강 이름은 아르치스, 즉 아르치까지가 어간이거든요.
그 아르치가 결국 왕비를 뜻하는 알씨까지 갔단 말이죠.
그래서 아르치, 알치, 옌즈, 한국에 와서는 '알지' 이렇게 연결됩니다."
- 김병모 박사(한양대 명예교수)
<여덟> 흉노와 신라 김씨왕족의 무덤!
-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
신라의 김씨왕들이 묻힌 경주 대릉원.
이곳 신라의 왕릉에서는 화려한 금관이 쏟아져 나왔는데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물이다.
그 중에 하나인 이것은 대릉원 서봉총(瑞鳳塚)에서 출토된 것이다.
우리는 서봉총 금관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금관의 꼭대기에
봉황으로 추정되는 세마리의 새가 조각되어 있었다.
그런데 흉노족의 무덤에서 발굴된 흉노금관(내몽골 아로시등 출토)에도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100킬로 외곽 노이울라지역에서
우린 또 다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흉노족 지배층의 무덤 유적이다.
노인울라 고분군
발굴된 흉노족의 무덤에선 시신을 안치한 다음,
그 위에 돌을 쌓고,
봉분을 만든 구조다.
"여기 있는 돌들이 상당히 크지만
대부분 이 흉노귀족의 무덤 속에서 나왔습니다.
돌을 써서 무덤의 상태를 보호했던 거 같습니다."
- 바트볼드 연구원, 몽골 고고학 연구소
흉노족 무덤이 발굴된 터에서는
무덤에서 나온 돌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경주시 황오동(쪽샘지구)
발굴조사가 한참인 신라인 무덤에서도 수많은 돌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 호석이 하나 들어와 있는 고분 하나구요,
이것이 또 하나 들어가 있는 고분 하나,
그래서 두 개가 이렇게 만났습니다."
- 지병목 소장, 경주문화재연구소
쌍분을 이루고 있는 무덤방 바닥은 물론
시신을 안치한 관 위로 다시 돌을 쌓은 후에
흙으로 거대한 봉분을 만든 구조였다.
이른바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이다.
적석목곽분은 세월이 흘러 나무가 썩으면
그 위에 있는 흙은 내려앉지만
돌이 무덤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흉노족과 같은 적석목곽분을 가진 무덤은
신라 김씨왕족의 무덤뿐이다.
<아홉> 왜 신라무덤에서 기마인물형 토기가 나왔을까?
대릉원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
왜 신라 김씨왕족의 무덤에서 흉노족 모습을 한 기마인물이 나온 것일까?
"알타이 지방하고 신라 왕족과는
무엇인가 정신적으로 깊이 끊을 수 없는 정신적인 맥을 형성하고 있다."
- 김병모 명예교수
그렇다면 날카로운 이 기마무사는 누굴까?
문무왕비문의 성한왕과 흉노족 김일제를 이어주는 얼굴일까?
문무왕비문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신라의 성한왕과 흉노족 김일제.
어쩌면 오늘의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라 김일제와 흉노 김일제를 잇는 존재가 성한왕인지도 모른다.
통일신라인이 남긴 문무왕비문이 이 모든 의문을 풀어줄 블랙박스다.
"우리는 문무왕비문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 비문이 문헌 기록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신라 건국의 비밀을 안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라 김씨왕족의 뿌리는 이미 그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겨져 왔습니다.
이미 200년전 조선의 실학자(추사 김정희)들도
신라의 김씨왕족이 흉노의 김일제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을 정도입니다.
자, 그럼 이 모든 의문은 비문의 두사람에게 모아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도 두사람에게 집중됩니다.
신라 김씨왕족과 김일제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입니다.
과연 성한왕은 누굴까요?
그는 흉노 김일제의 후손일까요?
다음 시간 이 미스터리를 계속 추적해보겠습니다."
- 한상권의 역사추적을 보고(늘 평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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