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慶州金氏

경순왕 초상화

淸潭 2009. 11. 25. 10:08
Summer | 조회 56 | 09.11.22 11:08 http://cafe.daum.net/musicgarden/5dNw/1768 

 

Summer는 이 왕의 後孫이다. 

청담은 계림군파 입니다. 

 

경순왕 능비 비각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景順王 능 비문(총탄자국이 있음)

 

- 경순왕의 능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의 능으로  신라 992년간 신라의

  종말을 고한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서기 935년 12월에 고려 왕건에게 양국(손국)한

  왕으로 서기 978년 음력 4월4일에 승하 하시자 고려 경종왕(3년)이  대왕의 례을

  갖춰 능을 조성하였다 한다   

 

대왕은 897년에 태어나셔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수 82세로 돌아가시니 문성왕의 6대 손이요,이찬 효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따님 계아태후이고 비는 죽방부인 박씨와 왕건의 따님이자 계비인 낙랑공주 왕씨이다.

927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 56대 왕으로 즉위하여 9년간 국난을 겪었다. 가뜩이나 국력이 쇠약한데다 경애왕은 비빈 및 종친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놀고 있을 때 견훤이 침입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했다. 경순왕은 선왕의 시신을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고 그 뒤 935년까지 통치하는 사이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고 침공과 약탈이 날로 심해지자 군신회의를 열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면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양국하는 길 밖에 없다하여 양위하였다.

신라 제 53대 신덕왕,제 54대 경명왕,제 55대 경애왕은 박씨이고 신라의 마지막 56대 왕이 경순왕이고 경순왕이 신라김씨의 중시조이다.경순왕은 나날이 침탈하는 견훤의 반란을 막으면서 한편 고려 태조와 삽혈동맹( 血同盟)을 맺으며 구국을 위한 고려 태조와의 상대곡진정례(相對曲盡情禮)를 임해전(臨海殿)에서 갖는 등 실로 영일(寧日)이 없었다.

그래도 경순대왕은 9년간 왕위에 계시면서 군신회의를 열고 왕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내렸으니,"나라가 고약(孤弱)하고 위험함이 이와 같아서 형세는 능히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또한 약하지도 못하므로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간과 뇌를 흩여 땅에 물들게 함은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로다."하고는 김봉휴룰 시켜 고려 태조에게 양국(讓國)하겠다는 국서를 보내니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을 하직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며 마의초식(麻衣草食)으로 생을 마치었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청강어태조(請降於太祖)'나 삼국유사의 '귀명태조(歸命太祖)'라는 '강' 자와 '귀' 자의 의미를 일부 사학자들이 잘못 알고 "고려태조에게 자진 항복했다"느니 "귀순" "귀부"라고 했는데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잘못 읽고 또는 문자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항복이란 자의든 타의든 간에 대적하여 싸울 때 비로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귀순이나 귀부도 적대관계로부터 일어나는 행위이다. 고려 태조와 신라는 적대관계에 있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위에서 보듯이 고려태조는 통호신라(通好新羅)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므로 사기나 유사에서 한결같이 "경순왕이 귀명(歸命)한 것은 비록 마지 못해 한 것 같이 보이나 이는 또한 가상할 일이다. 만약 경순왕이 싸우며 왕위를 지키려고 태조와 겨루다가 힘이 굴하고 세가 궁하게 되었다면 반드시 그 종족은 뒤엎어 지고 무고한 백성들은 비참한 해를 입었을 것인데 고명(告命)을 기다리지 않고 부구(府庫)를 봉하고 군과 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넘겨 주었으니 그는 조정에 공이 있었고 백성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다. 옛날에 오,월(吳,越)의 땅을 들어 송(宋)에게 바친 것을 소자참은 충신이라 하였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더 지나침이 있는 것이다. 태조는 비번이 많고 그 자손이 번성하여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에 올랐거니와 그 뒤 왕통을 계승한 사람이 모두 그 자손들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의 깊음이 아니겠는가?"라고 경순대왕을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학자들은 손국(遜國)이란 어휘를 썼다. 양위(讓位)나 선위(禪位)는 임금자리를 물려 줌을 말하는데 역사상 자의로 양위한 일이 없고 강압에 의해 왕위를 빼았겼으니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그랬고 조선조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그러했다.
그러나 '손위(遜位)'는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왕위를 물려 줌'을 말하고 더구나 '손국(遜國)'이란 '자기를 낮추고 겸허한 마음으로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나라를 통치력이 있는 사람에게 넘겨 주는 일'인데 경순대왕은 그 어려은 결단을 내려 후세의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조의 군신(君臣)과 학자들은 경순왕에 대하여 "사가는 항복자를 쓰지 않고 양자를 썼다."(史氏不書降字而書讓)라고 하여 존숭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경순대왕은 항복이 아니고 백성을 위하여 고려에 나라를 합친 것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써 성은 김, 이름은 부이다.
문성왕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군신회의를 소집, 고려에 귀부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로부터 유화궁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에 있다.

*여기서 사심관제도란?*

  사심관이란 직책은 부호장 이하 관직에 관한 일들을 주관하는 자리이다. 사심관제도는 기존의 기인제도와 함께 고려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이다. 기인제도란 지방 아전들의 자제들을 서울에 와 있게 하여 이들을 통해 그 지방의 사정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이미 신라가 통일 이후에 실시한 바 있는 상수리제도와 유사한 제도다.
  사심관은 해당지역의 행정책임자로 촌의 행정을 맡아보는 행정관리들에 대한 임명은 물론 이들을 감찰, 향촌 행정에 실질적인 권위를 갖는다. 김부가 경주 사심관으로 임명된 것은 그가 신라국의 왕이었으며, 왕건과의 사돈관계임을 감안할 때 예우적 조치라고 풀이된다.


 

                              신라 경순왕릉(사적 244호)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을 벗어난 신라 왕릉이며, 그 것도 경주에서 천리가 넘는 경기도 연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순왕릉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나마 고려에서 왕의 예우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하니 망국의 왕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 경순왕릉 입구 원경

 ▲ 입구 우측의 어느 종중 묘단(?)

 ▲ 경순왕릉 입구 전경

수도권 거주자는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 몇 곳만 둘러 보러 가더라도 최소 1박 2일은 가져야 합니다. 대신에 경순왕릉은 수도권에 있어서 가기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경순왕릉 역시, 가기가 쉽지 않은 지역에 있습니다.

경순왕릉이 있는 곳은 아래의 지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남방한계선의 군사지역 안에 있어서 답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만, 2005년 연말부터 경순왕릉을 개방했습니다. 개방 초기에는 일일이 검문 검색을 하고 들여 보냈으나 최근에는 경순왕릉 입구 주변에 펜스를 설치하고 감시 카메라로 대체하여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 경순왕릉 원경

 ▲ 경순왕릉 우측에 위치한 비각과 수복방(?)

경순왕릉 권역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철책으로 둘려 있으며, 언덕 위의 초소에서는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능역 입구 우측에는 수복방(재실?) 같은 맞배지붕의 건물이 한 채 있는데 1986년에 지었다고 하며, 그 앞으로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 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작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6. 25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 도로변에 방치되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가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으며,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로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라고 합니다. 이 신도비는 1,000년이 넘은 당시의 비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경순왕릉 전경

 ▲ 경순왕릉

능역 아래는 넓은 사초지가 있으며, 작은 언덕 위에 경순왕릉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능역을 오르면 좌우로 망주석과 석양 한 쌍이, 중앙에는 망주석이 서 있습니다. 그나마 있는 석물인 석양은 앞 뒤로 여러 곳 깨져 있으며, 이 곳에 있는 능비와 석물들은 임진왜란 이후 1700년대 후반에 다시 왕릉의 위치를 찾으면서 조성된 석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신라 왕릉하면 큰 봉분이 연상됩니다만, 이 곳 경순왕릉은 조선조 왕릉의 봉분보다도 상당히 작습니다. 봉분 아래는 호석을 둘러 놓았으며, 바로 앞에 작은 능비에는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뒷면에는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가 음기되어 있습니다.

 ▲ 석양과 망주석

 ▲ 석양

 ▲ 장명등

경향신문에 게재된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기사(2007.03.02)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면...

"임진애란의 와중에서 능의 존재가 실전(失傳)됐다가 조선 영조 때 후손에 의해 겨우 되살아났다. 이후 왕릉급의 대우를 받아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다시 존재를 잃어갔다. 일제가 향사(享祀)제도를 폐지한 탓이었다. 그리고 8·15해방과 분단,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똘똘한’ 군인 덕에 극적으로 부활한다. 1973년 1월 육군 25사단 관할 중대장이던 여길도 대위는 무덤 주위에서 총탄에 맞은 명문비석을 확인하고는 무릎을 친다. 바로 ‘신라경순왕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여대위는 즉각 상부에 보고했고, 이 소식은 경주 김씨 대종회로 통보됐다. 두번씩이나 사라졌던 ‘신라 마지막 임금’이 국가사적(1976년 지정)으로 환생한 것이다. - 중략 -

김용석 경주김씨계보연구회 연구실장에 따르면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 김씨의 분파가 450여개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약 90%가 경순왕의 후손이란다. - 중략 -

“신의 선조인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에서 그 지석 및 신도비가 나왔으니….”(조선왕조실록) 1746년 10월14일이었다. 경순왕의 후손인 김응호가 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된 조상의 무덤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비지(碑誌)의 인본(印本)을 확인해보니 경순왕릉이 틀림없다”면서 다시 무덤을 조성했다.

그런데 왜 경순왕은 경주가 아니라 고랑포구가 눈 앞에 보이는 야트마한 산에 묻혔을까. 속전인 계림문헌록을 보자. “왕의 훙거소식(978년 4월4일)을 듣고 신라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뤄 경주로 능지를 잡았다. 유거민들 전원이 등에 양식과 침구일체를 지고 다 따라 나서자 송도가 텅빌 정도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긴급군신회의를 연 뒤 구실을 찾는다.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고려로서는 참으로 ‘절묘한 구실’을 찾은 것이다. ‘왕의 대우’를 보장하는 대가로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은 것이다. 왕의 장례를 옛 신라 도읍인 경주에서 치를 경우 그곳 민심의 향배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하나 지금은 남방한계선과 불과 50여m 떨어진 궁벽한 곳이지만 지금의 잣대로 경순왕릉과, 그 코앞에 있는 고랑포 포구를 평가하면 안된다.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는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일제 때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을 정도다. 고려초에도 고랑포의 위상은 대단했을 것이다. 왕건이 항복한 경순왕을 맞이한 곳이 바로 고랑포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경순)왕이 백관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했다.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이 30여리를 이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두른 듯했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위로하고….”

30여리에 달하는 그 대규모 인원이 임진강을 도하해서 개경까지 가려면 이곳 밖에는 통로가 없었다. 또하나 전설에 따르면 향수병에 걸린 경순왕이 고향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이름붙은 도라산(都羅山)이 이곳과 멀지 않다. 경순왕은 고향땅을 향해 건너는 황포돛배를 바라보며, 지금도 향수를 달래고 있을 터이다."

 ▲ 경순왕릉 후경

 ▲ 경순왕 신도비 전경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金), 휘(諱)는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이창(伊滄) 효종(孝宗)의 자이며 모는 헌강왕(憲康王)의 여 계아태후(桂俄太后)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의 재위시기는 나말(羅末) 전란시대로 영토는 왕건과 견훤에게 대부분 빼앗기고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였다.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자 마침내 군신회의를 열고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표하자 군신들간에 찬반론이 있었으나 결국 시랑 김봉휴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전하게 하였다.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그리고 나서 왕은 신하를 거느리고 서울(慶州)을 떠나 고려 태조가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태조는 궁동의 갑제일구를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그 아내를 삼게 하고 정승공(政丞公)을 봉하여 선일천석(線一千石)을 내리고 시종원장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경주(慶州)라 고쳐 공의 식읍으로 하고 또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

공이 고려 경종 3년(978) 4월 4일 별세하자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서 장례를 모시고 능을 조영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 영조때에 찾게 되었는데 신라 왕릉 중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이다. 능의 시설은 봉분 곡장 능비 장명등 망주석이 있고 봉분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경순왕릉 위치도

   경순왕릉은 바로 이 위에 ↑                                      소재지 : 경기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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