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조계종

[이것이 한국 불교 최초] 64. 편액(扁額)

淸潭 2009. 11. 24. 18:50

[이것이 한국 불교 최초] 64. 편액(扁額)
고려 공민왕 친필 부석사 ‘무량수전’이 최고
기사등록일 [2009년 11월 24일 14:43 화요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걸린 고려 공민왕 친필 ‘無量壽殿’ 편액.

편액(扁額)은 흔히 건물의 얼굴로 불린다. 그래서 옛부터 당대를 대표하는 명필이나, 임금 등 고위직에 이른 권력가가 직접 쓴 글씨를 판각해서 걸어왔다. 사람이 얼굴 단장에 신경을 쓰듯, 건물을 대표하는 얼굴이니 그정도의 정성을 들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듯도 하다.

편액은 중국 진(秦)나라 때 건물의 명칭을 표시한 것을 서서(署書)라고 풀이한데서 유래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사찰 건물에서부터 쓰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그 쓰임새가 널리 퍼져나갔다.

사찰의 편액은 그만큼 역사가 오래되고 깊은 사연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종류와 서체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오랜 역사를 지닌 편액이 내 걸린 건물이 국보나 보물로 대접(?)을 받는 데 비하면 말 그대로 홀대를 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체 중 최고는 마곡사 대웅보전

그렇다면 사찰 건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사찰 편액 중 최초의 것은 어떤 것일까.
답을 먼저 말하자면 ‘알 수 없음’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사찰 전각에 내 걸린 편액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현존하는 사찰 편액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물의 글씨로 확인되는 것은 신라 명필 김생(711~791)의 필적으로 알려진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낙관도 없고 마곡사 사기에도 기록되지 않았으나,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도 김생의 필적이라고 확인했으므로 그의 글씨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더구나 이 사찰에서 소장했던 김생 필적의 금니와 은니로 된 묘법연화경이 있어서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1300년이 흘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대웅보전 편액이 신라시대에 내걸은 것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관련 분야를 연구해온 연구자들은 후대에 다시 새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김생의 글씨로 추정하는 또 하나의 편액이 전남 강진 백련사 대웅전 안에 있는 만덕산 백련사 편액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서체가 김생의 것일 뿐, 실제 그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편액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사찰 건물에 편액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를 높이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실제 당시 글로 써서 남긴 편액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 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시대에 지어졌다.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불에 탄 이후 다시 지었다. 이 무량수전에 걸린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이 바로 고려 공민왕이 쓴 어필(御筆)이다. 이 편액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략으로 인해 안동으로 피난해 있을 당시에 안동에서 가까운 영주 부석사를 찾아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다시는 이러한 침입이 없도록 막아줄 것을 기원하는 한편 부석사의 무량수를 비는 뜻’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금의 글에 낙관이 없었던 관례에 따라 이 편액에도 낙관은 없으나, 어필을 상징하는 금자(金字)로 되어있다.

공민왕이 개성으로 귀경한 것이 1363년 무렵이고, 무량수전이 1376년에 중건된 것으로 미뤄볼 때 편액은 이전에 걸려 있던 것을 건물 중수 후에 다시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편액은 대략 650여 년 동안 한 자리에 걸려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실제 현존 사찰 편액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 세조(재위 1455~1468)의 친필 편액이 공주 마곡사 영산전에 남아 있다. ‘영산전(靈山殿)’ 편액에는 세조대왕어필(世祖大王御筆)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이 편액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세조가 마곡사를 찾은 이유는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시습은 조정에서 벌어지는 정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출가해 마곡사에 머물고 있었고, 세조는 그런 김시습을 만나 다시 조정으로 불러 올릴 생각에 마곡사까지 행차를 했다가 이 편액을 쓰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어 구례 화엄사 일주문 편액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는 조선 인조 14년(1636)에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이 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편액에 ‘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의창군광서(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고 명기돼 있는데, 명나라 연호를 딴 ‘황명숭정구년’은 조선 인조 14년에 해당한다.

의창군은 화엄사 ‘대웅전(大雄殿)’ 편액도 썼고, 이 편액은 많은 복사판이 만들어져 전국 여러 사찰에 걸려 있다. 특히 오랜 세월 사찰편액을 연구해온 김일두는 ‘한국사찰의 편액에 관한 연구’에서 “조계사, 진관사, 선학원, 수덕사, 내장사, 완주 송광사, 쌍계사 등의 대웅전 현판이 화엄사 대웅전 현판의 복각”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복각판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임금들의 친필 편액은 전국 사찰 곳곳에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더욱 많아 경기도 고양 한미산 흥국사에는 조선 21대 왕 영조(재위 1724~1776)가 쓴 ‘약사전(藥師殿)’ 편액이 있고,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表忠祠)’ 편액은 정조(재위 1776~1800)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흥국사 공북루는 이순신 작

또 팔공산 파계사에 있는 ‘천향각(天香閣)’ 편액도 정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고, 승주 선암사에는 순조(재위 1800~1834)의 친필 ‘대복전(大福田)’ 편액과 ‘천(天)’자와 ‘인(人)’자 편액이 있어 ‘하늘과 이 세상 사람의 대복전’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해인사에는 헌종이 쓴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와 ‘길상(吉祥)’이라는 편액이 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의 글이 담긴 편액도 상당수 존재한다. 통도사의 일주문 ‘영취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편액과 대웅전 법당의 외부 네 면에 걸려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대방광전(大方廣殿)’, ‘원통소(圓通所)’ 편액이 모두 대원군이 쓴 것이다. 또 화엄사 탑전에 있는 작은 편액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서울 돈암동 삼각산 흥천사의 ‘흥천사(興天寺)’, ‘옥정루(玉井樓)’, ‘서선실(西禪室)’과 삼각산 화계사의 ‘화계사(華溪寺)’, ‘명부전(冥府殿)’ 등의 편액도 대원군이 직접 쓴 글씨다.

이외 일부 사찰에서 조선시대 명필 정도전이나 한석봉의 글씨라고 하는 편액을 내걸고 있기는 하나 실제 그들의 친필로 확인된 것은 없다. 따라서 그 조성 시기 또한 정확하지 않다.

사찰 편액 중 특별한 경우 인연을 갖고 만들어진 것도 적지 않다. 우선 이순신 장군이 쓴 여수 흥국사 봉황루 안쪽의 ‘공북루(拱北樓)’는 가로 280㎝, 세로 120㎝로 크기가 웅장하다. 이 현판에는 ‘계사동(癸巳冬) 수군절도사서(水軍節度使書)’라는 글이 있어,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에 이순신이 쓴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이순신은 흥국사 승려 약 3백 명을 거느리고 왜적과 싸우다가 많은 전몰자가 생긴 것을 슬퍼하며 봉황루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사죄의 절을 올린 다음 이 현판의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명필 추사 김정희의 사찰 편액도 적지 않은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서울 봉은사 화엄경판 수장고인 경판전에 걸린 ‘판전(版殿)’이다. 판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돼 있다. 판전에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서 과(果)는 추사가 과천에 살 때 사용하던 아호인 노과(老果)를 말하는 것이며 이 편액은 그가 죽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쓴 사찰 편액은 이외에도 많으나 봉은사와 영천 은해사에 걸린 ‘대웅전(大雄殿)’ 편액만이 직접 쓴 것이고, 다른 사찰에 걸린 추사의 대웅전 편액은 모두 모각한 것이다.

스님들이 직접 쓴 편액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부석사에 있는 ‘부석사안양루중창기(浮石寺安養樓重創記)’라는 제(題)의 초서(草書) 현판(懸板)이다. 목판이 너무 오래돼 다 판독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끝 부분에 사명광한기(四溟狂漢記)라고 쓴 부분은 판독이 가능해 사명당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한글 편액 최초는 봉선사 큰법당

그리고 근현대 고승들이 직접 쓴 편액으로는 만공 스님이 수덕사에 남긴 것을 비롯해 동산 스님의 범어사 ‘금강계단’ 편액, 구산 스님의 통도사 ‘적멸보궁’, 경봉 스님의 통도사 ‘비로암’ 등이 있다.

이어 1970년에 처음으로 한글 편액이 등장했다.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 대웅전은 역경사업에 크게 관심을 기울여온 운허 스님이 1970년 법당을 재건하고 ‘큰법당’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또 주련 역시 우리말로 알기 쉽게 풀어써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찰의 모습을 느끼게 했다. 편액이 건물의 얼굴이라는 점은 한문을 한글로 바꿔 달은 데서 느끼는 색다름에서도 잘 나타난다. 봉선사의 ‘큰법당’ 편액은 경북 선산 출신의 서예가 운봉(雲峯) 금인석(琴仁錫)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서울 칠보사 ‘큰법당’ 편액은 석주 스님이 직접 써서 내 걸었다. 당시 석주 스님은 “사찰의 편액도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로 바꾸어야 할 것이고, 주련도 우리말로 풀이하여 써야 할 것”이라며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한글편액과 현판으로 점차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찰 편액은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나, 오랜 세월 전각의 얼굴 역할을 해온 편액에 대한 관심과 대우는 여전히 소홀하기만 하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1024호 [2009년 11월 24일 1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