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스님의 입적과 수녀님들의 문상

淸潭 2008. 2. 24. 21:53
 

스님의 입적과 수녀님들의 문상
 

조계사 극락전에 모셔진 빈소에 조문하는 수녀님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지난 11일 새벽 서울대병원에서 입적했다. 법장 스님의 열반 소식에 멕시코를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하여 천주교 서울대교구 등이 조의를 표했다는 보도를 여러 매체들에서 접할 수 있었다.

매체들의 보도들 중에는 이런 사진 기사도 있었다.

"법장스님 빈소 참배하는 가톨릭 수녀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이 11일 새벽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열반한 가운데, 11일 오후 서울 견지동 조계사 극락전에 마련된 빈소에 부천 성가병원 소속 수녀들이 고인의 영정에 예를 드리고 있다."

<연합뉴스>가 내보낸 사진 기사인데, 그 기사는 불교뿐만 아니라 천주교 관련 웹사이트의 게시판들을 장식했다. 천주교 관련 웹사이트의 게시판에서 그 기사를 접한 이들 중 상당수가 '댓글'이나 '꼬리글'로 조의를 표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 사진 기사는 아마도 꽤 많은 웹사이트들에 올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 사진을 다운받아 내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여러 번 음미하듯 보곤 했다. 볼수록 아름다운 장면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열반하신 불교 스님의 영정 앞에서 천주교 수녀들이 분향을 하고 예를 드리는 장면은 아름다움을 지나 거룩함의 한 표징일 것도 같았다.

그 사진을 보며 문득 이런 자문을 해보았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이런 장면을 아름다운 장면으로 볼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보편적인 상식이나 사고 체계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충분히 아름다운 장면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상이한 시각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와는 정반대로 그런 장면을 하나의 '작태'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죽은 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도, 천주교 수녀가 불교 스님의 열반에 문상을 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로 간주하고 '분노'를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웹상에서 무수히 접했고 접하며 살고 있다. 그것을 지금 당장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포털사이트 통합 검색창에 내 이름자를 쳐 넣고 검색을 누르면 웹상에 발표한 내 글들이 꽤 많은 이들의 카페나 블로그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글들 중에는 지난해 11월 <오마이뉴스>에 올린 <천주교 행사에 울려 퍼진 찬불가와 찬송가-태안천주교회 40주년, '종교의 벽' 허문 사랑의 하모니>란 글도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자기 카페와 블로그에 가져다 놓은 이들은 글에 소개된 천주교와 개신교와 불교가 함께 한 종교 화합의 모습을 일러 '작태'라고 일축하고 있다. 그러니까 종교 화합의 모습을 그들은 작태로 보면서 그 증거를, 자신들의 시각을 널리 알리기 위한 뜻으로 내 글을 가져다가 카페와 블로그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천주교 수녀들이 법장 스님의 열반에 문상을 하는 장면도 하나의 작태로만 보일 것이다. 하여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득해지는 심정이다. 종교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떻게도 허물 수 없는 큰 장벽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 슬픔을 갖지 않을 수 없다.

<2>

천주교 수녀님들의 법장 스님 문상 장면 사진을 보자니 한 가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지난 8월 '한국문인협회'에서 시행한 '해방60돌맞이 전국문학인대회'에 참가하는 일로 강원도 백담사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숙소를 나서면서부터 묵주를 쥐고 기도를 했다. 걸을 때도, 버스나 열차를 타고 갈 때도 줄곧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나의 오랜 생활 습관이기도 하고 '의지'이기도 하다. 그 날도 걸으면서, 또 버스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했고, 백담사 입구까지 태워다 주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다.

그때 문인 한 분이 내게 인사를 해 왔다. 모르는 분인데, 천주교 신자라고 했다. 같은 천주교 신자를 만나게 돼서 반갑다는 말을 했다. 60줄에 들어서신 분 같은데, 목에 건 표찰을 보니 한국문인협회 표찰 안에 시인임을 알리는 별도의 표지가 들어 있었다.

우리는 금세 '교우'라는 특유의 친근감을 공유하며 악수와 함께 통성명을 했다. 서로 세례명을 알리고 교적을 두고 있는 본당도 밝혔다. 기분이 좋았다. 내 묵주기도 덕택에 신자 문인을 또 한 분 만난 셈이었다.

그런 경험은 이미 여러 번이었다. 지난해 3월 '한국소설가협회' 행사로 금강산에 갔을 때도 나는 금강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에 지향을 두고 줄곧 묵주기도를 했다. 그 덕분에 전혀 천주교 신자인 줄 몰랐던 두 분의 교우 작가(한 분은 여성 작가)를 알게 되어 좀더 친근감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백담사 셔틀버스 승강장에서 처음 만난 그 교우 시인이 셔틀버스를 타기 직전에 내게 뜻밖의 말을 했다.

"이제 절에 가니까 묵주기도는 그만 하시지요."

"왜요?"

나는 뭔가를 짐작하면서도 의문을 표했다.

"절에 가면서 천주교 신자 표를 낸다는 게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어때서요? 신부님이 절에 가실 때는 로만 칼라를 벗고 가셔야 합니까? 또 스님이 성당에 오실 때는 승복을 벗고 오셔야 합니까?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전히 민망한 표정을 거두지 않는 그에게 나는 빙긋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셔틀버스 안에서 백담사에 도착할 때까지 묵주기도를 계속했다.

백담사에 도착하면서 기도를 마치고 묵주를 호주머니에 넣은 나는 백담사 경내를 찬찬히 고루 둘러보았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가서는 깊숙이 허리를 굽혀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 어느 사찰을 가서든 대웅전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것 또한 나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고 '의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백담사 경내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다시 셔틀버스를 타려고 승강장으로 이동을 할 때였다. 승강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예의 그 교우 시인을 다시 만났다.

서로 구경 잘했느냐는 인사를 나눈 다음이었다. 그 교우 시인이 또 뜻밖의 말을 했다.

"아까 우연히 보았는데, 대웅전 앞에서 절을 하시데요."

"그게 왜요?"

"천주교 신자가 불상 앞에서 절을 한다는 게 좀…."

나는 깊이 심호흡을 한 다음 말을 내었다.

"저는요, 매일같이 등산을 합니다. 제 고장에는 매일 오르기 적당한 백화산이라는 산이 있지요. 그 산에는 태을암이라는 절이 있는데, 저는 그 절의 대웅전 앞을 지날 때는 꼭꼭 부처님께 절을 합니다. 그것도 묵주기도를 하면서, 묵주를 손에 쥔 채로 말이죠. 그때마다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빙그레 미소를 지으실 거라는 생각을 하죠. 그러면 기분이 참 좋아져요. 그래서 또 한번 혼자 웃음을 짓게도 돼요. 이래저래 좋은 일 아닙니까?"

그래도 그 교우 시인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여전히 민망해 하는 표정이었다.

"저는요, 천주교 신자인 제가 사찰의 대웅전 앞을 지날 때는 그냥 지나지 않고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것, 그런 행위도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제 행동을 민망하게 여기지만 마시고,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나는 그와 헤어져 먼저 셔틀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묵주를 꺼내 들고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도 묵주를 손에 들고 성호를 긋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나는 묵주기도를 하면서 그 교우 시인을 떠올리곤 했다. 천주교 신자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명색이 시인이요 문인이라는 사람 중에도 그처럼 콱 막힌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적이 맥 풀리는 일이었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 교우 시인이 해방 60돌을 맞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해서도, 또 종교 화합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하시기를 바라는 색다른 지향도 지닌 채….

(050914 / 충남 태안 深梧)

지요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