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라김씨왕조사
1대 미추왕(味鄒王) ---미추이사금 : 신라왕 13대
시조 대보공 알지의 7세손인 미추이사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신라김씨 왕조의 시작이다. 어머니는 이찬 갈문왕(葛文王)의 따님 박씨이고, 비는 조비왕의 따님 광명부인 석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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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 원년 12월에 즉위하여 금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금성은 경주부의 남쪽사리(四里)에 있으니, 시조왕41년에 축성한 바 아직도 남아 있음. (궁궐은 낭산으로서 주산을 삼고 선도산(仙桃山)으로서 안산을 삼았음). 3월에 궁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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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봄 2월에 국조(박혁거세)의 사당에 친히 제향을 올리고 대사(大赦)하였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구도를 추봉하여 갈문왕을 삼았다. (갈문왕이란 신라때 추존왕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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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정월에 동쪽으로 순행하여 해남을 바라보았고 황산 양산에 순행하여 고령자 및 극빈자를 찾아 구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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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에 여러 신하를 남당에 회합시켜 정사와 형벌의 득실을 친히 묻고 또 사신을 보내어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각처에 가서 순문(巡問)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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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에 영을 내려 무릇 농사에 방해되는 일은 일체 제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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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2월에 신료들이 궁실의 개축을 청하거늘 임금께서 백성의 수거로움을 중난하게 여겨 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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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에 한발이 심하거늘 죄수들의 억울한 정상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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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2월에 사당에 참배하고 양산에 서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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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2월에 국내의 여러 성을 순무하고 10월에 임금이 훙하시거늘 대릉(미추왕릉)에 장례를 하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175호
시 대 - 서기 284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황남동 89-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 정면적 - 61,413m²
경주시내 평지고분군에 있으며 현재 신라 사적공원인 대릉원(大陵苑) 안에 위치하여 있다. 주변에 대형분이 밀집하여 있으며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그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지름 56.7m, 높이 12.4m로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나 모두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또 능 전방 가까운 곳에 왕을 제사하기 위한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조선 정조 18년(179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 262-284)은 일명 미조(未照)이사금이며 성은 김씨이고,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으로 갈문왕(葛文王) 구도(仇道)의 아들이다.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고 왕비는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니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미추왕릉이 흥륜사(興輪寺) 쪽에 있다고 하여 경주시내 평지고분군 가운데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한편 미추왕릉에는 죽엽군(竹葉軍) 전설이 전하고 있다. 미추의 다음인 유리왕(儒理王) 14년(297)에 이서국(伊西國)이 금성(金城)을 침공하므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와 아군과 함께 적을 격파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이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만 댓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선왕의 음조인 것을 알고 이에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 또는 竹長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죽엽군(竹葉軍) 고사
신라 제14대 유례왕때에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 오거늘 우리 군사가 대항할 수 없었는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와서 협조했으니, 모두 귀에 댓잎을 걸고 있었으며 힘을 합하여 적을 돌파하였다.
군사가 물러간 후 돌아간 곳을 알지 못했고 다만 댓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었으니, 이에 왕이 음으로 도와 전공이 있었음을 알고 인하여 죽현릉이라 이름했으며 또 죽장릉이라고 이름하였다.
고종 25년 무자에 비석을 세웠으니, 전면에 신라 미추왕릉이라 새겼으며 신라 두글자는 전자(篆字)로 새겼고 다른 능소도 이를 모방했는데 다만 왕호에 따라 새겼다.
신라 시조왕(성은 박씨요 혁거세니 원년 갑자는 한선제오봉(漢宣帝五鳳) 원년이 됨)으로부터 남해왕을 거쳐 유리왕에 이르러 탈해왕(성은 석씨)에 전위하였다.
탈해왕은 파사성(성은 박씨)에 전위하였고 지마왕과 일성왕을 거쳐 아달라왕에 이르러 벌휴왕(성은 석씨)에 전위하였으며 내해왕과 조비왕을 거쳐 점해왕에 이르러 미추왕에게 전위하였다.미추왕은 유례왕(성은 석씨)에게 전위하였고 기림왕을 거쳐 흘해왕에 이르러 내물왕에게 전위하였다.
2대 내물왕(奈勿王) ---내물이사금 : 신라왕 17대
이름은 내물이니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요 갈문왕 구도(仇道)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고, 김씨로서는 제2대왕이다. 비는 보반(保反)부인 김씨이니, 일설에는 내례길포(內禮吉怖)로서 미추왕의 따님이라고도 한다. 홀해왕이 훙하고 아들이 없으매 내물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병진 원년 (진 영화 12년 서기 356년) 4월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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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봄에 사신을 보내어 환과고독(鰥寡呱獨)을 위문하고 각기 미곡 3곡(곡)을 내려주었으며 효성과 우애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자는 벼슬 한 계급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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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2월에 시조묘에 친히 제향을 올리니, 사당 위에 붉은 구름이 감돌고 묘정에는 신작(神雀)이 모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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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4월에 왜병이 대거하여 쳐들어오거늘 풀로서 허수아비 수천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손에 들려 토함산 아래에 줄지워 세웠으며 용사 1천명을 매복시키었다가 왜병을 쳐서 몰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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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양마(良馬) 2필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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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에 흉년이 들어 창고를 열고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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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에 백제 독산성주가 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오니, 임금께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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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7월에 북쪽 변방 하슬라 (강능)에 한발이 심하고 황충(蝗蟲)이 일어나 백성이 굶주리거늘 죄수를 놓아주고 1년에 조(祖)와 조(調)<백성에게 조세를 부과하던 제도>를 면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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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2월에 임금이 훙하고 아들이 어리거늘 나라 사람들이 실성왕을 세워 왕위에 계승하게 했으니, 키가 칠척이요 총명하여 모든 일에 통달하고 식견이 심원하였다. 내물왕은 참성대 서남방 <지금 교촌이니 본전에서 동쪽으로 백무(百武)쯤 떨어져 있음>에 장사하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8호
시 대 - 서기 40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교동 14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사적 제161호에
경주 반월성(半月城) 북서쪽 계림(鷄林)에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2m, 높이 5.3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는 달리 호석에 자연석 받침돌을 받쳐 놓은 것으로 신라 횡혈식(橫穴式) 석실분(石室墳)의 호석(護石)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고분의 봉분 규모도 적석목곽분보다는 횡혈식 석실분에 알맞은 것으로 평지고분(平地古墳)이지만 매장주체(埋葬主體)는 횡혈식 석실일 가능성이 많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는데 후대에 설치된 것이다. 한편 이 고분 주위로는 평면 장방형으로 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고분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은 성이 김(金)씨이고, 아버지는 말구각간(末仇角干)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 비(妃)는 김(金)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다. 신라에서 김씨로서는 미추이사금에 이은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지만 이후의 신라왕들이 내물의 후손으로 신라 김씨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신라는 이 왕 때에 이르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낙동강 동쪽을 아우르는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의 장지(葬地)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능(陵)이 점성대(占星臺, 즉 瞻星臺) 서남에 있다고 하여 현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나 내물왕은 후세의 큰 추앙을 받은 실질적인 김씨왕조의 창시자로서 그 능 규모 또한 컸을 것이고, 재위시기로 보아 적석목곽분이어야 할 것인데, 현재의 능은 규모가 작은 석실분(石室墳) 형식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내물왕릉을 신라 최대의 적석목곽분인 대릉원(大陵苑)의 황남대총(皇南大塚)으로 비정하는 학계의 견해도 있으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존중하면서 내물왕계 계승의식을 표방한 신라 하대 왕실의 수축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3대 실성왕(實聖王)---실성이사금 : 신라왕 18대
알지의 예손인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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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년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401년에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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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왕이 승하하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추대됨. 즉위 즉시 일본과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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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년 명활성(明活城:慶州)에서 왜병을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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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및 고구려에 내물왕의 아들(미사흔/복호)을 볼모로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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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417년) 5월 돌아가시다.
서기 402년 실성왕이 즉위하였다. 실성왕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별슬에 있던 대서지의 아들이다. 실성왕은 키가 7척5촌이나 되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 내물왕이 죽자 그 아들이 어리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왕으로 세웠다.
왕은 즉위하자 왜국과 화평을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왜국에 보냈다.
4년(서기 405년) 4월에 왜병이 침범하여 명활성(明活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갈 때,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쪽에서 왜병과 두 번 싸워 이기고, 왜병 3백여 명을 죽였다.
7년(서기 408년) 2월에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병장기와 군수품을 저축하여 신라를 침범하려고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왕은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왜인들을 쳐부수자고 하였다. 그러나 예불감 벼슬에 있는 미사흔은,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넓은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만약 우리 쪽이 이로우면 나아가서 적을 사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유인하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유인당하는 것은 가장 나쁘다는 교훈으로 가장 좋은 계책인가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옳다 하였다.
11년(서기 412년)에 내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서기 415년) 7월, 왕이 친히 혈성원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또 금성 남문에 나아가서 군사들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해 8월에 풍도에서 왜병과 싸워 이겼다.
16년(서기 417년) 5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國家形成史硏究(李鍾旭, 一潮閣, 1982)
新羅上代의 Dual Organization(金哲埈, 歷史學報 1952)
新羅奈勿王系의血緣意識(李基東, 歷史學報 53·54, 1972)
新羅國家形成過程의 硏究(文暻鉉, 大丘史學 6, 1973)
4대 눌지왕(訥祗王)---눌지마립간 : 신라왕 19대
내물왕의 아들. 비는 실성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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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복호를 데려오고 일본에 잡혀간 아우 미사흔을 데려오기 위하여 박제상을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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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438년)에 백성에게 우차(牛車)의 이용법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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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칠 때 원병을 보내어 백제와 공수동맹을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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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호자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
서기 417년에 눌지가 즉위하였는데, 왕호를 마립간(통치자라는 뜻)이라 하였다.
내물왕 37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후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었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몰래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어 고구려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사람에게 부탁하기를,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보거든 바로 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사람이 올 때 눌지를 시켜 맞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은 눌지의 용모와 기상이 밝고 귀하게 생겨 군자의 모습이 있슴을 보고,
"그대 나라의 임금이 나에게 그대를 해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가 없구나."
하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눌지는 이 일을 원망하여 마침내 실성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2년(서기 418년) 정월에 왕이 시조 묘를 찾아 제사를 드렸다. 이 해에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던 왕의 동생 복호가 박제상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는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미사흔(未斯欣)이 몰래 도망하여 돌아왔다.
8년(서기 424년) 2월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었다.
15년(서기 431년) 4월에 왜병이 동쪽 변방을 침범하여 명활성을 포위했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7월에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18년(서기 434년) 2월에 백제 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고, 9월에는 흰 매를 보냈다. 10월에 왕은 황금과 야명주를 백제에 보내어 답례하였다.
22년(서기 438년) 4월, 우두군(춘천 지방)에서 골짜기 물이 밀어닥쳐 민가 50여 채가 떠내려갔고, 왕성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떨어졌다. 이 해 백성들에게 우차(소달구지) 끄는 법을 가르쳤다.
24년(서기 440년) 왜인들이 남해변방을 침입하였다.
28년(서기 444년) 4월에 왜병이 10여 일간 왕성(금성)을 포위했다가 양식이 다하자 돌아갔다. 이 때 왕이 군사를 내어 이를 추격하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병가에서 말하기를 궁한 도적을 쫓지 말라 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적을 쫓지 마십시오."
그러나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기병 수천 명을 이끌고 독산 동쪽까지 따라가 적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장수와 군사의 반 이상이 죽게 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피하니, 적이 두 겹 세 겹 포위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안개가 자욱이 끼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본 적들은 신의 도움이 있다 하여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39년(서기 458년) 2월에 지진이 일어나 왕성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그 해 8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망부석(望夫石) 설화
신라 초기 내물왕이 즉위한지 36년 경인(庚寅, 390 A.D)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표로 왕자 한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므로, 셋째 아들 미해(美海)를 보냈더니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 눌지왕 때에 고구려가 화친한다는 이름 아래 왕자 보해(寶海)를 보내 달라고 하므로 부득이 하여 눈물을 머금고 보냈더니, 역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이에 눌지왕은 아우 둘을 남의 나라에 두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를 안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왕의 동생 미사흔 (未斯欣)을 데리러 간 박제상(朴堤上)이 왕자를 구출했지만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왜왕에게 환심을 산 후 미해를 신라로 귀국시킨 박제상은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왜왕이 박제상에게 미해를 빼돌린 이유를 묻자 제상은 자신은 신라의 신하지 왜왕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왜왕은 왜국의 신하라 한다면 상을 주겠다고 하자 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제상은 왜왕에게 다리 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는 형벌, 뜨거운 쇠 위에 세워놓은 형벌 등을 받고, 결국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 뒤에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령의 신모(神母)로 모시고, 이를 소재로 지은 노래가 '치술령곡'이다.[출전] '삼국사기' 권45, '삼국유사' 권1 '내물왕 김제상', '문헌비고', '동국통감', '일본서기' 등에 각각 실려 있으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5대 자비왕(慈悲王)---자비마립간 : 신라왕 20대
눌지왕의 장남. 비는 미사흔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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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459년)에 왜국 병선 백여척이 내침하여 월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퇴하여 수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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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들이 번번히 강역으로 침범함으로 연해변에 삼년성(三年城:報恩), 모로성(芼老城 471년)을 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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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474년) 고구려의 침공을 받고 백제와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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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2월 왕이 돌아가셨다.
서기 458년, 자비왕이 즉위하니 눌지왕의 큰아들이다.
2년(서기 459년) 4월에는 왜인이 병선 수백 척을 이끌고 동쪽을 습격하고, 이어서 월성(月城 지금의 반월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니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이 왕성을 잘 지켜서 적은 그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 때 왕이 군사를 이끌고 적을 추격하여 북으로 해구(海口 포항 부근)까지 쫓으니, 도망가던 적군 중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하는 자가 반이 넘었다.
6년(서기 463년) 2월에 왜병이 삽량성(자금의 양산)을 침범했다가 이기지 못하여 물러 가려고 하였다. 이 때 왕은 벌지와 덕지 두 장군에게 명하여 치게 하였다.
이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미리 길목에 숨어 있다가, 돌아가는 왜병을 습격하야 크게 이겼다. 왕은 왜병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므로 바닷가에 두 개의 성을 쌓게 하고, 7월에는 병사들의 열병식을 하였다.
11년(서기 468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
17년(서기 474년) 일모성(一牟城), 사시성(沙尸城), 광석성(廣石城), 답달성 (沓達城), 구례성(仇禮城), 좌라성(坐羅城)을 축조했다.
7월 고구려 거련왕이 백제를 침공하니 백제왕 경이 왕자 문주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니 군사를 내어 구원하였다.
19년(서기 476년) 6월에 왜인이 동쪽으로 침범하였다. 왕은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이를 쳐부수고, 적군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기도 하였다.
22년(서기 479년) 2월 3일 왕이 돌아갔다.
6대 소지왕(炤智王)---소지마립간 : 신라왕 21대
자비왕의 장남. 비는 김내숙의 딸. 일설에는 보습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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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년 말갈이 북방을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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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년 고구려를 침입. 7성을 공취.
백제와의 화평을 위하여 이벌찬의 딸을 백제왕에게 헌납. -
487년 처음으로 각 지방에서 우편역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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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년 시장을 처음으로 개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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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11월에 돌아가셨다.
소지왕은 신라 제21대 왕으로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겸손하고 어질어 백성들이 잘 따른 덕있는 왕이었다.
소지왕은 487년 각 지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도로인 관도를 개척하였다.
또한 490년 도읍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키기도 하였다. 소지왕의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아버지인 자비왕 때의 경주의 방리제 확정과 함께 부족적 성격이 남아 있던 6부체제를 개편하여 보다 강화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이었다. 소지왕은 또한 각 지방을 차례로 순행하여 병사와 백성들을 위문하고 재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지역의 주민들을 찾아가 고통을 함께 나누는 한편, 유랑하는 백성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해 민심 수습에 힘썼다. 이러한 소지왕의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아울러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지왕 때 고구려는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에 대해 소지왕은 나제동맹에 따라 백제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대항하였다. 소지왕은 또 백제 동성왕의 결혼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지의 딸을 백제왕실에 시집보냄으로써 백제와 결혼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여 더욱 굳건한 공수동맹을 맺었다. 여기에는 당시 가야도 합세했다. 소지왕 즉위 3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청송 부근에서 7개성을 공격하자 신라는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을 동원해 강릉 부근에서 1천여명을 참살했고, 즉위 16년에는 문경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고구려군사를 백제 동성왕의 지원을 받아 격퇴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소지왕 즉위 17년 18년 19년에도 지속적으로 쳐들어왔다.
7대 지증왕(智證王) : 신라왕 22대
이름은 지대로(지대로) 혹은 지도로(지도로)라 하며 또 지철로(지철로)라고도 하고, 64세에 왕위에 올랐다. 습보의 아들이요, 내물왕의 증손이며 어머니는 오생부인 김씨니 눌지와의 따님이다. 비는 모량부마을 상공의 딸 박씨이다. 신장이 8척이 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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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 3년 (齊 中興 2년 서기 502년) 3월에 순장(殉葬:이에 앞서 국왕의 장사에는 남녀 각 5인으로서 순장하였음)을 금지하였고 신궁에 친히 제향에 올랐다. 3월에 여러 고을의 군주에게 나누어 분부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했고 전답의 경작에 비로서 소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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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국호를 신라로 통일 호칭하였고, 왕의 호칭도 왕(王)자로 통일하고 처음으로 시호제를 썼다.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로 나라의 이름이 정해지지 아니하여 혹은 사라(斯羅)라 이르고 혹은 사로(斯虜)라 이르며 혹은 신라라고 이르는데 신등의 생각에는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롭다는 뜻이옵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옵니다. 그러므로 국호를 신라로 하는 것이 옳겠나이다. 또한 살피옵건데 예로부터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모두 제 또는 왕이라고 칭하옵니다. 우리 시조의 나라를 세움으로부터 지금까지 22세를 전해오는데 다만 방언을 일컬음 뿐이요 존호는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 국왕으로서 존호를 올리옵니다.”하니, 임금께서 이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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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4월에 상복법(喪服法)을 마련하여 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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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2월에 임금께서 나라가운데서 주/군/현을 친히 정하고 실직주:[삼척]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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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에 봄부터 여름까지 가뭄이 계속하여 백성이 굶주리거늘 창곡을 풀어 진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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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에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실리고 우산국[울릉도]을 위혁하니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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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정년에 작은 서울을 아시촌에 설치하고 7월에 육부의 주민을 옮겨 채웠다. 이달에 임금이 훙하였다. 시호를 지중으로 올리고 법흥왕이 즉위하니 신장이 7척이요 관후하여 사람을 경애하였다.
지증왕은 신라 제22대 왕으로 이름은 지도로 혹은 지철로 이다. 재종형인 소지왕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늙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 데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왕이 되었지만 지증왕은 신라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는 503년 그 동안 성행하던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려 노동력의 상실을 경계하였고 각 주와 군에 명하여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농사를 지을 때는 소를 이용하는 우경법을 보급하는 등 농업생산력 향사에 힘썼다. 지증왕 무렵부터 확대 보급되면서 당연히 수리사업도 활발해졌다.
지증왕은 노동력도 중요시 생각해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들에게는 포상을 하기도 하였다. 쌍둥이를 낳은 사람에게도 포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처음에 결혼을 하기 힘들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말로는 지증왕의 음경이 너무 컸다고 한다. 그의 음경의 길이가 무려 1자5치 (약45cm)였다. 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부감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각 지방에 사람을 보내어 자기의 음경에 맞는 여자를 구하려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신하들이 신부감을 구하려 가다가 우연히 모량부라는 마을에 도착했다가 큰 개 두 마리가 북크기의 똥덩어리를 같이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본 신하들은 저 정도의 똥을 눈 사람이라면 분명히 모든 것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하들은 마을로 내려가 그 똥의 주인이 누구인지 수소문했다. 그것은 모량부 상공이라는 자의 딸이 눈 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서 보니 처녀의 키가 7자 5치 (약 2m20cm) 나 되었다. 신하들은 빨리 이 사실을 지증왕에게 알리고 처녀를 데리고 입궁했다. 그리고 지증왕과 맞추어 보니 딱 맞아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일련의 정치적 개혁도 시도하였다. 그는 즉위 4년인 503년에 이제까지 다양하게 사용되던 사라, 사로, 신라 등의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중국식 명칭인 '신라국왕'으로 바꿨다. 지증왕은 신라의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한 왕이었다. 지증왕이 이때 확정한 신라라는 이름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지증왕은 즉위 6년에 국내의 지방을 주, 군, 현으로 나누어 조직하였다. 지방제도로서 주군현제도의 확립은 고구려, 백제, 가야 등과 전쟁에서 획득한 점령지의 원활한 통치와 영토의 확장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새롭게 신라 영토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차원에서 일사분란하게 감독하여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지증왕이 같은 해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신라 최초의 군주로 임명한 것도 다 이런 목적에서이다. 지증왕이 확립한 군주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지녔으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중간통치기구로서 기능하는 외직이었다. 군사기구와 행정기구를 겸한 이 군주제도는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관산성 전투의 승패를 가른 김무력도 바로 신주 군주였다.
지증왕은 또한 동북 방면의 국경에 12개의 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였으며, 즉위 13년인 512년에는 이사부를 시켜우산국을 정복하였다. 또한 남쪽으로 손을 뻗어 신라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여 그곳 백성을 행정적으로 회유하기도 하였다. 지증왕은 이 밖에도 도성 동쪽에 시장을 설치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78세의 나이로 죽었는 데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에서 시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지증왕이 처음이었다
8대 법흥왕(法興王) : 신라왕 23대
휘는 원종(原宗) 지중왕의 아들. 비는 보도부인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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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하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교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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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년 처음으로 병부(병부)를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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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년 율령 반포.백관의 공복(공복)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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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여 살생을 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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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국왕 김구해(金仇亥) 투항하여 가락국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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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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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7월에 돌아가시니 애공사북봉(哀公寺北峰)에 장사하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176호
시 대 - 서기 540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효현동 63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72,817m²
경주의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의 소나무 숲 속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물이 없으나, 봉분 아래에 자연석의 일각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이것은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로, 선도산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구조의 호석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호석 구조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며,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橫穴式) 석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은 본명이 원종(原宗)이며, 아버지는 지증왕,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이다. 재위기간인 서기 520년에 관리들의 복장(公服)을 법률로 정했고, 521년에는 중국 양(梁)나라와 통교했으며,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금관국(金官國, 本伽倻)을 점령하였다. 특히 528년에는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여 신라 호국불교의 기틀을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재위 27년만에 왕이 죽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애공사 북쪽에 법흥왕릉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법흥왕릉 남쪽에 신라 하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를 애공사지탑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법흥왕릉은 이 능이 아니라 선도산 동쪽 기슭 무열왕릉 뒤편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9대 진흥왕(眞興王) : 신라왕 24대
휘는 삼맥종(三麥宗) 법흥왕의 아우이고,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으로 신라가 종전에 미약했던 시기를 벗어나 팽창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적 시대로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영왕(英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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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년 이사부(이사부)에게 내외병마를 맡기고 백제와 화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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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5년 이사부에게 국사를 편찬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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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치고,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제작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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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한강유역의 땅을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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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3년 한강 하류지역에서 백제를 몰아냄으로써, 한강유역을 완전 점령, 중국과 통하는 해상을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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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4년 백제 성왕이 침공해온 것을 격퇴. 성왕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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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2년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가야지방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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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유역에서 강력한 군단을 주둔케하고 북한산,창녕,황초령,마운령 등에 순수비를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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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년(576년) 돌아가시니 시호는 진흥이고 석명은 법운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77호
시 대 - 서기 576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37,993m²
경주의 서악 선도산(仙桃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에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 서북쪽에 위치한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20m, 높이 5.8m이다.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 몇 개만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橫穴式) 석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은 본명이 삼맥종(纂麥宗, 또는 深麥夫)이며,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로서 왕비는 사도부인 박씨이다. 진흥왕(眞興王)은 신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록되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할 정도로 불교에 의지하였다. 재위기간인 서기 544년에 흥륜사(興輪寺)를, 553년에는 황룡사(皇龍寺)를 창건하였다. 또한 551년에는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지대를 점령하여 그곳에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고 555년에 북한산을 순시한 후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건립하였다. 연호도 551년에 개국(開國), 568년에 대창(大昌), 572년에 홍제(鴻濟)라 바꾸면서 신라의 독자성을 표시하였다. 또한 576년에는 화랑(花郞)의 전신인 원화(源花)를 만들어 화랑으로 계승하게 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6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에 장사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진흥왕릉은 법흥왕릉과 함께 애공사 북봉에 있었다는 것인데, 현재 전하고 있는 법흥왕릉과 진흥왕릉은 선도산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편에 2km 이상 떨어져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능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서는 규모도 너무 작은 편이다. 따라서 진흥왕릉은 이 능이 아니라 무열왕릉 뒤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위에서 두 번째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10대 진지왕(眞智王) : 신라왕 25대
휘는 사륜(舍輪), 진흥왕의 차자. 비는 지도부인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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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등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돌보게 하였으나 치정 4년동안 나라가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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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리 서성을 쌓고 백제의 침공을 맞았으나 이찬 세종으로 정벌하여 3700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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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나라에 사신을보내어 화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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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7월 돌아가시니 영경사 북쪽에 장사하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178호
시 대 - 서기 579년, 85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사적 제 177호에 포함됨
경주의 서악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6m, 높이 5.5m 규모이다.
봉분(封墳)의 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지왕(眞智王)은 신라 제25대로 중고시기의 왕이고
문성왕(文聖王)은 제 46대로, 하대의 왕으로
두 왕은 계보도 다르고 재위시기에도 3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는데 그 왕릉들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규모 또한 왕릉으로 보기엔 작은 편이다.
진지왕(재위 576-579)은 본명이 김사윤(金舍輪, 혹은 金輪)으로 진흥왕(眞興王)의 둘째아들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재위기간이 짧아 치적은 거의 없으나 중국의 진(陳)나라와 통교한 기사가 확인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59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지왕릉이 애공사(哀公寺) 북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능 아래편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그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왕은 무열왕의 조부로서 무열왕릉 뒤편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중 위에서 3번째 고분을 그의 능으로, 그리고 그 아래 4번째 고분을 그의 아들이자 무열왕의 아버지인 문흥대왕(文興大王, 龍春-추존〕의 능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11대 진평왕(眞平王) : 신라왕 26대
휘는 백정(白淨) 진흥왕 태자였던 동륜의 아들, 모는 만호부인 김씨. 비는 마야부인 김씨. 후비는 승만부인 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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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나라와 친교를 맺어 지명, 원광, 담육을 수나라에 파견, 수학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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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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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성(남산성)을 개축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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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가 내려와서 옥대(玉帶)를 전하였다.(신라삼보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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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년 1월 돌아가시니 지금의 보문동 608의 사적 180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0호
시 대 - 서기 63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보문동 608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43,722m²
경주 시가지 동쪽 보문동의 평지 가운데에 있다. 동쪽으로는 명활산(明活山), 서쪽으로는 낭산(狼山)을 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문사지(普門寺址)가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36.4m, 높이 7.9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호석(護石)의 받침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몇 개 보일 뿐 별다른 장식물은 없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은 본명이 백정(伯淨:白淨)이고,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며, 왕비는 마야(摩耶)부인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어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이 수(隋)·진(陳) 등에 왕래하였고, 수가 망한 이후에는 당(唐)과 교류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즉 이때를 기점으로 삼국전쟁 시기에 당과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확고히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진흥을 위해 힘썼으며, 수도 방위대책의 일환으로 591년에 남산성(南山城), 593년에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축조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32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한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규모로 보아 이 고분이 왕릉급인 것은 분명하다.
12대 선덕여왕(善德女王) : 신라왕 27대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의 맏딸로서, 모는 마야부인, 성품이 관인(寬仁)하고, 사리에 밝아 진평대왕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화백회의에서 왕위에 옹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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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5년에 당나라로부터 ‘주국 낙랑공 신라왕(柱國樂浪公新羅王)’에 책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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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4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 분황사(芬皇寺)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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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2년 의자왕 침공에 40여 성을 빼앗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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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가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러 갔다가 오히려 갇힌 몸이 되었는데 김유신이 결사대를 보내 구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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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에서 문화를 수입하고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등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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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년 1월 돌아가시니 지금의 보문동 79-2 사적 182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2호
시 대 - 서기 64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 79-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사적 제163호에 포함
경주 시가지 동쪽에 있는 낭산(狼山)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3.6m, 높이 6.8m이다. 봉분 밑에는 30-60cm크기의 깬돌 2, 3단으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그 외부에 호석의 높이만한 크기의 돌을 기대어 받쳐놓아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호석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나 난간 구조물은 보이지 않고, 기타 장식물도 배치되지 않았다. 전면에 보이는 석상(石像)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은 본명이 덕만(德曼)이며 진평왕(眞平王)의 장녀로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에는 당(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정에 힘썼다. 634년에 연호(年號)를 인평(仁平)으로 고쳤으며, 자장법사(慈藏法師)의 청에 의해 645년에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세우고, 분황사(芬皇寺)와 첨성대(瞻星臺)를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다. 또한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47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낭산에 장사지냈다고 한다.선덕여왕은 지기삼사(知幾三事)로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으로 죽을 날을 미리 예언하고 자신이 죽으면 이천 가운데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그곳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하였다. 예언한 날에 왕이 돌아가자 예언대로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문무왕 때에 이르러 능 아래쪽에 사천왕사를 지으니 불경에 사천왕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 것과 일치되어 왕의 영성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3대 진덕여왕(眞德女王) : 신라왕 28대
휘는 승만(勝曼) 진평왕의 모제(母弟)인 갈문왕 국반의 따님. 왕은 용모와 자질이 아름답고 키가 7척이고 손은 무릎밑까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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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년 김춘추를 당으로 보내어 원병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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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년 관제를 당나라 형식으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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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등 명장으로 하여금 국력을 신장케 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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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년 정월 1일에 왕은 조원전(朝元殿)에 나와 신년하례를 받았다.(신년하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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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3월 돌아가시니 지금의 견곡면 오류리산48 사적 24호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24호
시 대 - 서기 654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산48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9,498m²
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4.4m, 높이 4m이다. 봉토 밑에는 판석(板石)으로 병풍 모양의 호석(護石)을 돌렸다. 호석의 면석 사이 탱석(撑石)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다른 왕릉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비교해 볼 때 조각수법이 뒤지고 있다. 면석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된 갑석(甲石)을 올려놓았으나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장대석이 아닌 것도 있다. 호석 밖으로는 판석을 깔고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으나 지금은 그 부재(部材)가 거의 다 없어졌다. 이외에는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와서 축대와 통로를 만들었다.
신라 제28대 진덕왕(眞德王, 재위 647-654)은 본명이 김승만(金勝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마지막 성골(聖骨) 출신 왕으로 재위기간에 당과 적극 외교를 펴고,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54년 3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의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를 추정되는데, 이 왕릉의 위치와는 정반대이다. 왕릉 형식 또한 성덕왕대(聖德王代) 이후에 유행한 발달된 형식이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수법은 신라 왕릉의 십이지신상 중에서도 가장 늦은 것이어서, 그 위치와 함께 진덕여왕의 능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14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신라왕 29대
휘는 춘추(春秋)요 수(壽)는 59세였다.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이요 진지왕이 손이며 모는 진평왕의 따님인 천명부인(天明夫人) 金氏요,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 金氏요 이름은 문희(文姬)이니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따님이다.
어려서부터 의표(儀表)가 영위(英偉)하고 제세(濟世)의 웅지가 있어 신라 중흥의 군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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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하자 돌아가신 아버지 용춘을 추봉(追封)하여 문흥왕(文興王)을 삼았고 어머니 김씨를 추봉하여 문정태후(文貞太后)를 삼았으며 죄수를 크게 석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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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이방부(理方府)에 분부를 내려 율령 60여조를 소상히 침작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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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로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북쪽 변경을 침략하거늘 임금께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
원자(元子) 법민(法敏)을 세워 태자를 삼았고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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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3월에 당나라에서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수륙군 13만명을 이끌고 백제를 징벌하거늘 임금께서 유신(庾信)등으로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에 남천장에 당도했다. 이때 황산벌 싸움이 가장 치열했는데 김유신장군이 7월 9일에 진격하니 백제의 계백장군이 마주 와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반굴,관창등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7월에 당라 연합군이 백제의 도성을 애워싸거늘 백제의 임금 의자왕이 좌우를 이끌고 밤에 도망하여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의자왕의 아들 융(隆)이 먼저 항복하였고 의자왕도 태자와 웅진의 방영군(方領軍)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를 파하매 훈공을 논하여 상사(賞賜)에 차등이 있었고 백제에 항복한 사람들은 모두 그 재능에 의하여 벼슬에 임용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소정방에게 말하기를,
“어찌 인하여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는가?”하니 정방이 대답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며 아랫사람이 윗사람 섬기기를 부형과 같이 하니, 도모(圖謨)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8년에 당나라에서 또 소정방을 보내어 수륙 35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징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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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때 비로서 중국의 의관과 아홀(牙笏)을 썼는데 이는 자장법사가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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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임금이 돌아가시니, 무열(武烈)이라 시호하고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니 풍채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으며 선왕을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20호
시 대 - 서기 661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면적 - 14,169m²
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仙挑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부분에 일렬로 5기의 대형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원형의 봉토분(圓形 封土墳)으로 주위 둘레 110m에 높이가 11m이며, 매장주체(埋葬主體)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의 언저리에는 호석(護石)을 받치는 자연석 받침돌들이 나와 있다.
전방 동북쪽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능비(陵碑)가 있는데 현재는 비신(碑身)을 잃고, 귀부(龜趺)와 이수만 남아 있다. 귀부는 장방형의 대석(臺石) 위에 거북 모양이 올려진 것으로,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은 사실적이며, 등의 전면에는 귀갑문(龜甲文)을 시문하고 그 주위엔 비운문(飛雲文)을 돌렸다. 이수는 좌우에 3룡식 6룡을 표현하고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이수 전면 중앙에는 전서로서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양각되어 있는데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속에 의하면 김인문(金仁問)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능은 신라고분 중에서 피장자(被葬者)가 확실한 능묘 중의 하나이다.
이 왕릉의 주인공인 신라 제29대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은 본명이 김춘추(金春秋)이고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며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왕비는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선덕여왕(眞德女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眞骨) 출신 왕으로서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서기 660년 6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태종무열(太宗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데 영경사 자리가 어딘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능 동쪽에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이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의 방향과 일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수의 비문을 고려할 때 그 후방의 묘가 무열왕릉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5대 문무대왕(文武大王) : 신라왕 30대
휘는 법민(法敏)이니 태종무열왕의 태자요 모는 문명(文明)이고, 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 김씨이다. 왕은 자표(姿表)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고, 삼국을 통일하고 당을 몰아내어 물리친 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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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원년(660년)에 당고종과 함께 군사를 들어 고구려 정벌에 협조하게 하니 7월에 김유신으로부터 대장군을 삼고 부(部)를 13도 총관(總管)으로 나누어 임금께서 몸소 거느리고 시이곡(始餌谷)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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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백제의 유민이 옹산성에 웅거했다 하여 임금께서 먼저 사신을 보내 회유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으므로 유신이 옹산성을 애워싸고 먼저 대책(大柵)을 불살라 수천명을 베인대 드디어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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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정월에 당나라 사신이 군량미를 요청하므로 임금께서 유신 등 아홉 장군에게 분부를 내려 수레 2천여량에 백미 4천석과 조(租) 2만2천여석을 실려 보냈는데 풍설과 추위가 심하여 인마에 동사가 많았다. 그해 2월 군량을 인도하니 소정방은 크게 기뻐하다가 군량미만 얻어가지고 싸움을 하지않고 돌아가 버렸다.
[삼국사기]에는 나.당연합군의 통수장군임에도 소정방에 대한 비굴한 점을 여러 번 기록하고 있다. -
4년 정월에 부인으로 하여금 또한 중국의 의상을 착용하게 하였다. 상고하건데 진덕왕 3년에 비로서 중국의 의상을 착용하게 하였고 이제 부인들도 또한 중국의 의상을 입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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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2월에 임금께서 고구려를 섬멸하고자 하여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10월에 당고종이 이적(李勣)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니, 고구려의 중신연정토(淵淨土)가 12성 7백63호 3천 5백43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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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9월에 당나라 군사가 우리 군사와 연합하여 평양성을 쳐서 함락하매 고구려왕 고장이 항복하거늘 이적이 고장(고장) 및 왕자 복남(복남)덕남(덕남)과 대신 등 20만명을 대리고 당나라로 돌아가니,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10월에 유신으로서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았고 식읍 5백호를 하사했으며 여(여)와 장(장)을 내려주었고 궁전(궁전)에 올라도 추장(추장)하지 않게 하였다. 인문은 대각간(大角干)을 삼았고 식읍 5백호를 하사했으며 그 나머지 장사들은 훈공을 논하는데 차등이 있었다. -
11월에 임금께서 환국하여
고구려의 부로(부로) 7천�으로 조묘에 고(고)하기를 “삼가 선조의 뜻을 받들어 당나라와 함께 외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물으니 원흉이 죄를 자복하여 국사가 안정되옵기에 감히 구하옵니다.”하고 드디어 왕사에 죽은 자들에게 비단을 주되 차등이 있었다. -
10년7월에 당나라 도독(도독)이 장수를 보내어 우리 허실을 엿보거늘 임금께서 그 꾀를 알고 여러 장수를 보내어 백제를 토벌하게 하였으니, 품일(품일)은 63성을 취하고 천존(천존)은7성을 취했으며 문영(문영)은 12성을 취하였다. 8월에 임금께서 안승을 책봉하여 고구려의 왕을 삼았다. 백제땅으로 신라군을 치러왔던 당나라 행군총관 설인귀가 ‘무기를 걷우라’는 글 점휴납우(占休納祐)에 대해 싸움의 근원은 당권에 있다는 답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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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7년(676년)까지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와 대소 수십회가 넘는 싸움끝에 소부리주(所夫里州) 싸움을 이김으로써 끝났다. 문무왕이 당병을 물리치는 전쟁동안 한편으로는 사신을 자주 당에 파견하여 당고종을 달래며, 국내에서는 진두지휘하여 당나라 군사를 섬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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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에 북원(北原)에 작은 서울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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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에 사신을보내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 궁궐을 중수하고 동궁을 창조했으며 비로서 여러 궁문의 액호(額號)를 정하였고 남산성(南山城)을 증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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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7월 1일에는 임금이 돌아가시거늘 시호를 문무(文武)로 올리고 신문왕이 즉위했으며 유조(遺詔)에 의하여 선왕을 동해의 어귀 큰 바위 위에 장례를 하였다.
또 이르기를, “숨을 거둔 후 10일에 문득 고문(庫文)의 외정(外庭)에서 서역국(西域國)의 예식에 의하여 화장했다.”고하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158호
시 대 - 서기 681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해중
지 정 일 - 1967년 7월 24일
지정 면적 - 123,951m²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수중릉(水中陵)으로 동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에 있다. 봉길리(奉吉里) 앞 바다 물속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대왕 바위(大王岩)라고 불러왔다. 대왕암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로 들어오고 서쪽수로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모양의 화강암석으로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유골을 안치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왕암에서 중앙의 장골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수로를 설치한 것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의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즉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탑의 경우나 백제의 미륵사탑 하부에 4방으로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이 대왕암에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은 본명이 법민(法敏)이고 무열왕의 맏아들로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81년 7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 밖에서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를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이 용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대석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고 금당(金堂)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뚫어 동해의 조수(潮水)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는 동해의 용이 된 부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인근 해변에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이 이곳에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한 곳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문무왕이 왜침을 진압하고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동해의 "용"이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고 2년에 완공하였는데 금당 섬돌밑에 동쪽으로 향한 큰 구멍이 나 있으니 곧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면서 맴돌다 가도록 꾸민 것이다. 이는 대왕의 유조로 유골을 모셔 둔 곳으로 이름을 대왕암이라 했고 절 이름은 감은사이다. 뒤에 용이 실제로 나타나 보였으니 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16대 신문왕(神文王) : 신라왕 31대
휘는 정명(政明), 문무왕의 장자. 비는 김씨 흠운의 딸 신목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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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2년(개요 2년) 국학(國學)을 설립, 인재교육에 힘씀. 감은사의 공역이 끝났고, ‘만파식적(萬波息笛)’의 고사와 이견대의 유래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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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6년 백제의 옛땅에 주군(州郡)을 설치하는 등 국내 주,군을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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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9년 녹읍(祿邑)을 폐지하였으며,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축조하여 국방을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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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0년 삼변 수당을 두어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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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당과의 사신교류를 빈번히 하였으며 문화융성을 도모하여 설총,강수같은 대학자를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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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년 7월에 돌아가시니 지금의 배반동 사적 제181호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1호
시 대 - 서기 688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453-1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 정면적 - 35,283m²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동쪽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29.3m, 높이 7.6m인 이 왕릉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모습이다. 봉토(封土)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들을 5단 정도 돌려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은 호석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호석구조는 무열왕릉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다.
호석 받침돌 가운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문(門)'이라고 음각(陰刻)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호석 밖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은 보이지 않으며, 그외 석사자(石獅子)·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의 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왕릉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왕릉의 동쪽에는 석상(石像)이 있는데 성덕왕릉의 석상에 비해 비교적 얕고, 석재도 고르지 못하여 원래의 석상인지 의심스럽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본명이 정명(政明 혹은 明之)이며,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큰 아들이다. 재위기간 동안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685년에 9주(九州)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능은 낭산의 남쪽 방향에 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있다고 한 효소왕릉(孝昭王陵)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이 능은 효소왕릉이며, 신문왕릉은 낭산 동쪽인 황복사지(皇福寺址) 아래에 십이지석이 남아 있는 폐왕릉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7대 효소왕(孝昭王) : 신라왕 32대
휘는 이홍(理洪), 신문왕의 태자 비는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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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2년(원년) 처음으로 의학을 설치. 고승 도증이 당으로부터 돌아와 천문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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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4년 송악성과 우금성을 쌓았으며, 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의 시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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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 7월에 돌아가시니 지금의 조양동 산 8의 사적 제184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4호
시 대 - 서기 70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15,385m²
성덕왕릉 서쪽에 인접하여 구릉상에 있으며 주위에 송림이 울창하다.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10.3m, 높이 4.3m이다. 봉분의 밑에는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이 몇 개 보이고,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은 본명이 이홍(理洪, 理恭)이고 신문왕(神文王)의 태자이다. 재위시기는 삼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번영을 향하던 때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02년에 왕이 죽자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효소왕릉은 망덕사지(望德寺址)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약 8km 거리에 해당하여 너무 차이가 난다. 그래서 효소왕릉(孝昭王陵)을 이 능이 아니라 망덕사지 바로 동쪽에 있는 현 신문왕릉(神文王陵)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18대 성덕왕(聖德王) : 신라왕 33대
휘는 륭기(隆基) 효소왕의 아우, 비는 무정왕후김씨 원태의 딸 성정왕후, 차비는 소덕왕후김씨 순원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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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하자 대사령을 내리고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려주고, 여러 주군의 1년 조세를 면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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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8년 처음으로 누각(漏刻:물시계)를 만들었으며, 문화사업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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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1년 일본 병선 3백척이 바다 건너서 동쪽 변방에 쳐 들어 왔으나 왕은 장병을 보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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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2년 발해를 정복코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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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년에 돌아가시니 성덕이라고 시호하였다. 지금의 조양동 사적 제28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28호
시 대 - 서기 73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11,174m²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 방향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송림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성덕왕(聖德王)의 형인 효소왕(孝昭王)의 능으로 전해지는 고분이 있다. 이 왕릉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신라 최초로 완비된 왕릉제도를 갖추고 있다. 능 하부에 두른 호석(護石)은 신문왕릉(神文王陵)의 호석 구조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식으로 높이 90cm 정도의 판석(板石)을 면석(面石)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면석들 사이에는 탱주(撑柱)를 끼워 고정시켰고 탱주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받침돌을 세워 보강하였다. 이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는 둥근 형태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배치되었는데, 모두 방형기단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나 심하게 파손당하였다. 호석 밖으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회랑 밖으로 석주를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난간의 석주에는 상하 2개소의 관석(貫石)을 끼우기 위한 원공(圓孔)이 있으나 관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능 앞에는 안상문(眼象紋)이 새겨진 석상(石床)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2구, 무인석(武人石) 2구를 마주 대하게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파손이 심하여 무신석 1구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 1구밖에 남지 않았다. 무인석은 방형기단(方形基壇) 위에 올려져 있으며, 의장용 갑옷인 양당계를 착용하고 양손으로 칼을 짚고 있는 모습이다. 능 뒤쪽 좌우에 1구씩, 그리고 능 전면 석인들 앞 좌우에 1구씩 모두 4구의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자세, 안면, 체모(體毛) 등이 매우 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능 전면 좌측에 능비(陵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비신(碑身)과 이수가 없어지고, 목이 부러진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귀부는 비교적 웅대한 편이나 몸체가 납작하고 귀갑문(龜甲文)의 조각도 힘차지 못하다. 능비(陵碑) 주위의 조사에서 약간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으나 판독된 명문은 '무(武)'와 '적(跡)' 두 자뿐이다.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1-737)은 본명이 김륭기(金隆基)이고, 신문왕(神文王)의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동생이다. 당(唐)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으며, 능의 석조물 배치양식도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덕왕의 재위기간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37년 2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차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현재 왕릉 북쪽에는 이차사로 추정되는 사지가 있고, 넘어진 석탑이 전하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만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 보존되어 있다.
19대 효성왕(孝成王) : 신라왕 34대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제2자 비는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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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1년 대신(大臣) 정종(貞宗)과 사인(思仁)에게 명하여 노병(弩兵)을 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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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진찬 영종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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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왕이 돌아가시자 사후(死後)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태자 중경(重慶)이 717년에 죽었으므로 72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성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계비(繼妃)인 소덕왕후(炤德王后)이고, 비는 739년에 맞아들인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혜명(惠明)이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司正府)의 승(丞)과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의 승을 모두 좌(佐)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丞)]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 3월에 이찬 정종(貞宗)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 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阿飡) 의충(義忠)을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信忠)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王弟)인 헌영(憲英-뒤의 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波珍飡)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邢璹)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玄宗)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도덕경 老子道德經》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永宗)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族黨)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中代)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전제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思仁)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閱兵)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20대 경덕왕(景德王) : 신라왕 35대
휘는 헌영(憲英), 효성왕의 친동생, 비는 의충의 딸 만월부인 김씨. 효성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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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년에 일본국에서 사신이 왔으나 받지 않았고, 12년에도 왔다가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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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가 극성기를 달한 때로 제반 제도, 관직을 개편하였다. (9주 5소경 117군 293현)을 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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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1년 김대성이 다보탑,석가탑을 증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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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9년 의학을 전공하는 학자를 선임하고 율령박사 2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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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덕왕 신종(일명, 에밀레종)을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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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년 6월 왕이 돌아가시니 지금의 내남면 사적 제23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23호
시 대 - 서기 765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 8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9,498m²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상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약 22m, 높이 약 6m이며, 능 하부에는 판석조 호석(板石造 護石)이 돌려졌다.
호석은 목조건축물의 석조기단(石造基壇)과 같은 형태로, 가장 아래에 지대석(地臺石)이 있고, 그 위에 높이 89cm, 너비 120cm의 면석(面石)이 놓였다. 면석 사이에는 뿌리가 고분 안으로 길게 뻗어 면석과 봉분을 지탱하기 위한 탱석(撑石)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앞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나와 있다. 탱석에는 두 칸을 건너서 하나씩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다. 면석과 탱석 위에는 갑석이 놓여 있다. 호석에서 1.3m 밖으로는 높이 175cm의 석주 40여개를 세워 돌난간을 둘렀는데, 지금 석주는 거의 다 남아 있으나 기둥 사이에 끼웠던 난간의 돌살대는 거의 없어졌다. 호석과 난간석주 사이 바닥에는 길이 110cm, 너비 약 45cm의 부채꼴 판석(板石)을 정연하게 깔았다. 능 앞에는 안상문(眼象紋)이 새겨진 높은 석상이 놓여 있으나,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석사(石獅)·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과 같은 석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은 성덕왕(聖德王)의 아들이며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경덕왕 때에는 신라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행정구역 개편, 직제개편 등을 단행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0》에 의하면 765년 6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봉오리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처음 경지사(頃只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양장곡(楊長谷) 가운데로 이장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전하는 경덕왕릉의 위치와 문헌기록의 일치여부는 알 수 없고, 또한 호석의 세부수법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수법을 신라 하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이 능이 경덕왕의 능인가를 의문시하는 견해도 있다.
21대 혜공왕(惠恭王) : 신라왕 36대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왕자, 모는 만월부인 비는 신보왕후 김씨, 차비는 김씨장군의 딸, 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앙후가 섭정하였는데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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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일길찬 대공형제가 모반하다가 토평(討平)되었다. 6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모반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11년에도 두번의 모반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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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五廟)를 세워 미추왕을 비롯 태종,무열,문무,성덕,경덕왕의 위패를 모시었고 봉덕사 종이 주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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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780년) 왕은 성색을 좋아하여 기강이 문란하니 모반하는 자가 많다가 왕과 왕비가 난병에게 해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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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왕의 10세손인 김양상(金良相)이 자립하여 왕 [宣德]이 됨.
22대 선덕왕(宣德王) : 신라왕 37대
휘는 양상(良相), 해찬 효방의 아들, 내물왕의 10세손, 모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 김씨,비는 구족부인 김씨, 양품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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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780년)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왕위에 오름.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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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왕이 손위하려하니 군신이 세번이나 상소하여 말리므로 손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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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정월 당나라 덕종이 지절사를 보내 왕을 ‘검교대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으로 책명하였다. 이 달 왕이 병으로 위석하여 왕위를 선양하고 13일에 돌아가시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다.
신라 제37대 왕. ?∼785(재위 780∼785). 성은 김씨. 이름은 양상(良相). 경덕왕 23년(764) 시중(侍中)에 임명되었고, 그 뒤 감찰기관인 숙정대(肅政臺)의 장관이 되었다. 혜공왕 10년(774)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776년에는 한화(漢化)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780년 왕당파이던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범하자, 상대등이던 양상은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선덕왕은 왕위에 오른 뒤 어룡성(御龍省)에 대한 개편을 실시하였으며, 패강진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781년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按撫)하였고, 782년 한주(漢州;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民戶)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783년에는 김체신(金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완료하였다. 패강진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의 덕종(德宗)이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檢校大尉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의 봉작을 주었다. 유언대로 불법에 따라 화장하고 뼈를 동해에 뿌렸다.
23대 원성왕(元聖王) : 신라왕 38대
휘는 경신(敬信)이니, 일길찬 효향의 아들로 내물왕 12세손이오 모는 계오부인 박씨니 창도의 딸이다. 비는 연화부인이라 하고 숙정부인이라고 하는데 김씨로 각간 신술의 따님이다. 혜공왕 말년에 역신반란을 평정한 공이 있엄 선덕왕때에 상대등으로 있었다가 선덕왕에 자손이 없어 군신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처음 군신들은 왕의 족자인 주원(周元)을 세우려 하였으나 군신회의때 큰 비가 있어 알천(閼川)의 물이 넘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군신들이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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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 원년(당정 원년 서기 785) 2월에 고조 법선을 현덕왕, 증조 이찬 의관을 신영왕, 부 일길찬 효양을 명덕왕이라 추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라 하였으며, 아들 인겸을 태자로 세우고, 성덕왕의 개성왕의 2묘를 헐고 시조대왕(미추왕), 태종대왕(무열왕), 문무대왕과 조부 흥평왕, 부친 명덕왕의 묘를지어 5묘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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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왕도의 백성이 굶주리어 3만3천2백40석의 곡식을 내어 구휼을 하고 10월에 또 3만 3천석을 내어 구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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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두었다. 서쪽 지방에 가뭄이 계속되어 황충이 일고 도적이 많이 생겨 관원을 보내어 사정을 살피고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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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8월에 태자 인겸이 죽고, 9년 8월에 왕자 의영으로 태자를 삼았으나, 10년 2월에 의영이 죽으니, 11년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으로 태자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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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금1천량을 내노으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기를 원하였으나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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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12월 돌아가시니 원성이라 시호를 올리고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으며 소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신라 제38대 왕. ?∼798(재위 785∼798).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세손으로 효양(孝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이고, 비(妃)는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淑貞夫人) 이다. 아들 인겸(仁謙)·의영(義英)·예영(禮英)과 딸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을 두었다. 혜공왕 16년(780) 김양상(金良相;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여 선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이기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즉위하자 아버지 효양은 명덕대왕(明德大王), 조부 위문(魏文)은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부 의관(義寬)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는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였다. 원성왕 1년(785)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고, 786년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다. 788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실력 위주로 관리를 임용하도록 하였다. 790년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또한 태자로 책봉된 인겸이 죽자 792년 의영을, 794년 인겸의 맏아들 준옹(俊邕;소성왕)을 연이어 태자로 책봉하여 왕과 태자가 중심이 된 근친왕족이 권력을 장악케 하였다. 불교에 관심이 많아 승관(僧官)을 두었고, 795년 봉은사(奉恩寺)를 지었다. 한편 790년에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발해(渤海)와 통교하였다.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24대 소성왕(昭聖王) : 신라왕 39대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손자, 비는 계화부인 김씨, 대아찬 숙명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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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지금의 진주), 노거현을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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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2년만에 별세하니 이 이후로 왕위 쟁탈전이 극심해짐. 이때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가 나타났고 폭풍이 불어 임해,인화의 두 문이 부서졌다고 함.
혹은 소성왕(昭成王)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준옹(俊邕).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仁謙, 惠忠太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 성목태후(聖穆太后)이다.
비(妃)는 계화부인(桂花夫人)으로 숙명(叔明)의 딸이다. 소성왕은 원성왕의 장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 궁중에서 자라면서 789년에 대아찬(大阿飡)을 제수받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790년에는 파진찬(波珍飡)을 제수받아 재상이 되었다.
791년 10월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듬해 8월에 병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태자에 책봉된 아버지가 일찍 죽고, 또 그에 뒤이어 태자가 된 숙부 의영(義英)이 또한 794년에 죽자 그가 795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798년 12월 29일 원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청주(菁州:지금의 진주)의 노거현(老居縣)을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재위 2년째인 800년 6월에 죽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번역문
소성왕(昭聖王)<혹은 소성(昭成)이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준옹(俊邕)으로 원성왕(元聖王)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왕비는 김씨 계화부인(桂花夫人)인데 대아찬 숙명(叔明)의 딸이다.
원성대왕 원년에 아들 인겸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7년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원성왕이 태자의 아들을 궁중에서 길렀다.
5년에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갔다 와서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고,
6년에는 파진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년에 시중이 되었고, 8년에는 병부령이 되었다.
11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문
昭聖或云昭成王立 諱俊邕 元聖王太子仁謙之子也 母金氏 妃金氏桂花夫人 大阿?叔明女也 元聖大王元年 封子仁謙爲太子 至七年卒 元聖養其子於宮中 五年 奉使大唐 受位大?阿 六年 以波珍?爲宰相 七年爲侍中 八年爲兵部1)令 十一年爲太子 及元聖薨繼位
25대 애장왕(哀莊王) : 신라왕 40대
휘는 청명(淸明), 소성왕의 태자, 모는 계화부인, 비는 박씨. 13세에 즉위하여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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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탐라국이 조공했고, 3년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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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일본과 수교를 맺고 사신을 파견함. 금3백량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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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7월 왕의 숙부 언승과 아우 이찬 제웅이 왕을 시해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청명(淸明)인데 뒤에 중희(重熙)라 개명하였다.
소성왕과 계화부인(桂花夫人)김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나 800년 6월 부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즉위초부터 왕은 작은아버지인 병부령(兵部令) 김언승(金彦昇:뒤의 憲德王)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의 치적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으니, 805년(애장왕 6) 공식(公式)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 12도(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郡), 읍(邑)의 경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애장왕의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로 볼 수 있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東宮)의 만수방(萬壽房)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조처로 생각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취해진 공식 20여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개혁으로 봄이 마땅하다.
805년 위화부(位和府)의 금하신(衿荷臣)을 고쳐 영(令)이라 하고, 예작부(例作府)에 성(省)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처도 같은 성격으로 이해된다.
806년에는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오직 수리만을 허락하며, 금수(錦繡)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器物)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 조처 역시 2년 뒤에 취해진 지방 군현의 경계를 정하는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체로 원당(願堂)과 같은 절을 세워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애장왕 7년에서 9년에 이르는 개혁조처는 귀족세력을 왕권에 복속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왕권강화를 위한 애장왕의 개혁조처는 중대의 전제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하대사회의 풍조 속에서 많은 도전을 받아 성공할 수는 없었으며, 그 결과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애장왕대의 개혁은 이전 경덕왕대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이은 것으로 왕권강화이지만, 그 개혁의 주체는 애장왕이 아니라 당시 실력자인 김언승과 수종(秀宗:뒤의 興德王)이라고도 추측된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對唐外交)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均貞)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제수하고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803년에는 일본국과 우호하여 수교하였다. 그리하여 804년, 806년, 808년에 각각 일본국 사신이 내조(來朝)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응(順應), 이정(利貞)에 의하여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웠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809년 7월 언승이 제옹(悌邕)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26대 헌덕왕(憲德王) : 신라왕 41대
휘는 언승(彦昇), 소성왕의 친동생, 비는 귀승부인 김씨, 각간 예영의 딸. 왕은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이 되었다. 악무를 좋아했고 숭례전에서 잔치를 배풀며 스스로 고금(鼓琴)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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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는 백성이 많아 자식을 팔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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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년 국내의 제방을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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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년 한산이북의 사람 1만명을 징발하여 패강(대동강)에 300여리의 장성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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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826년) 10월에 돌아가시니 동천동 사적 제29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29호
시 대 - 서기 826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동천동 80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18,007m²
경주 북천변에 있는 이 능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토(封土) 밑에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밑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웠으나, 현재 면석은 없어진 것이 많다.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키고 아울러 탱석에는 등간격으로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현재 십이지신상은 해(亥), 자(子), 축(丑), 인(寅), 묘상(卯像)의 5개만 남아 있다.
또 호석 밖으로는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고 호석과 난간(欄干) 사이 바닥에는 판석을 깔아 회랑으로 하였다.
난간 석주(石柱)는 상하로 두 개의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으나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외에는 아무런 외호물(外護物)이 없다.
아마도 이 능의 전방으로 흐르고 있는 경주의 북천(北川)이 범람하여 능의 일부가 유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은 본명이 김언승(金彦昇)이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에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폈으나,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과 김범문(金梵文)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치적 또한 두드러지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831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천림사(泉林寺)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왕릉의 남쪽에 사지(寺址)가 있어 이를 천림사(泉林寺) 터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27대 흥덕왕(興德王) : 신라왕 42대
휘는 수종(秀宗), 헌덕왕의 친동생, 비는 장화부인 김씨, 소성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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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828년) 장보고를 청해진(완도) 대사로 삼고 병졸 만명으로 왜적을 방어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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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근이 심하고 도적이 여러곳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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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년 복색제도를 고치고 분에 넘치는 사치를 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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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 12월에 돌아가시니 유언대로 장화부인과 합장하였다. 안강읍 육통리 사적 제30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30호
시 대 - 서기 836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61,983m²
흥덕왕릉(興德王陵)은 괘릉(掛陵)과 함께 능묘제도가 잘 갖추어진 신라 왕릉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과 왕비를 합장(合葬)하였다고 전한다. 능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며 봉토(封土) 밑에는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다. 호석은 바닥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켰다. 아울러 탱석에는 각각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괘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조각수법은 괘릉에 뒤진다. 호석의 주위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그 밖으로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 두곳에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는 형식이다. 현재 난간 석주는 없어진 것이 많다. 왕릉의 외부에는 네 모서리에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사자 배치와 같다. 능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한쌍과 무인석(武人石) 한쌍, 석화표(石華表) 한쌍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왕릉의 전방 좌측에는 능비(陵碑)를 세웠는데, 능비는 현재 귀부(龜趺)만 남아 있고 비신(碑身)과 이수는 없어졌다. 귀부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귀부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왕릉은 성덕왕릉과 괘릉의 형식을 모방하여 건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인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은 본명이 김수종(金秀宗, 또는 景徽)이고,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재위기간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고 재배시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양(安康北 碑火壤)"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흥덕(興德)"이란 명문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어 이 능이 흥덕왕릉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28대 희강왕(僖康王) : 신라왕 43대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이찬 헌정의 아들, 비는 문목부인 김씨, 대아찬 충공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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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837년) 죄수중 사형수 이하의 죄인에게 대사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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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3월 상대등 김명[민애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진하였다. 내남면 망성리 사적 제220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220호
시 대 - 서기 838년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34
지 정 일 - 1971년 4월 28일
지정 면적 - 9,488m²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에 있으며, 북쪽에 인접하여 민애왕릉(閔哀王陵)이 위치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4m, 높이 3.4m이다. 봉분만 있을 뿐 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43대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은 본명이 김제륭(金悌隆)이고, 이찬 헌정(憲貞, 또는 草奴)의 아들이자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이며, 왕비는 문목부인(文穆夫人)이다. 재위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는다. 희강왕(僖康王)은 그의 당숙과의 왕위쟁탈전 끝에 김명(金明)의 추대로 즉위하였으나 그를 추대했던 김명(金明)이 난을 일으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38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희강(僖康)이라 하고, 소산(蘇山)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소산의 위치는 알 수 없다.
29대 민애왕(閔哀王) : 신라왕 44대
휘는 명(明), 원성왕의 증손 대아찬 충공의 아들. 비는 윤용왕후 김씨. 형정을 바로잡고 상대등으로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등극. 그러나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와 합세하여 달구벌(대구)에서 왕의 군사를 물리쳤고 왕은 도망하다가 김양의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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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2년만에 김우징[신무왕]에게 왕위를 내주었다. 능은 내남면 망성리 사적 제190호
지정번호 - 사적 제190호
시 대 - 서기 838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산 40
지 정 일 - 1970년 2월 6일
지정 면적 - 11,302m²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능 남쪽 가까이에 희강왕릉(僖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2.5m, 높이 3.8m이다. 이 왕릉은 광복 이전에 두 차례나 도굴(盜掘)당하였고, 1981년에도 도굴 미수사건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봉분과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가공석으로 호석을 축조하였는데, 밑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가공한 장대석으로 3단으로 쌓아올린 다음 갑석(甲石)을 덮었다. 이 호석(護石)에는 또 두께 35cm, 길이 100-130cm의 단면 5각형으로 가공한 지주석 20개를 봉분의 둘레를 따라 190-290cm 간격으로 받쳤는데, 조사 결과 이는 후에 보강한 것이었다. 능 전방에는 장방형 판석 2매로 조립한 작은 상석(床石)이 놓여 있다.
봉분 주변에 대한 조사결과 봉분 밑둘레 외곽으로 깊이 13cm, 지름 25cm 크기의 구멍 12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파고 납석제(臘石製)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하나씩 묻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십이지신상은 높이 10cm 내외의 작은 것으로 무덤의 바깥쪽을 향하게 놓여졌다. 조사 당시에는 쥐·소·닭·돼지상 등 4가지 상만 발견되었는데, 나머지는 호석 받침석이 세워질 때 파손되고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능 주변에서 능이 축조된 뒤에 매장된 골호(骨壺)가 발견되었는데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중국 당(唐)나라 때의 연호(年號)로서 서기 815년에 해당한다.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 敏哀王이라고도 한다. 재위 838-839)은 본명이 김명(金明)이고,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비(妃)는 김씨는 윤용왕후(允容王后). 이홍(利弘)과 더불어 희강왕(僖康王)을 협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역시 곧 피살되었다. 재위기간은 왕위쟁탈전의 혼란한 시기였으며, 별다른 치적도 남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피살사건과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전할 뿐 장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또한 원화 십년명 골호가 이 능이 조성된 뒤에 묻혀, 이 능은 서기 815년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민애왕의 연대와는 맞지 않는다.
30대 신무왕(神武王) : 신라왕 45대
휘는 우징(祐徵)이니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요 희강왕의 종제이니 어머니는 정교부인 박씨이다. 비는 진종부인 김씨니 명해의 따님이다.
기미 원년(당 개성4년 서기 839) 4월에 즉위하고 조고 예영은 혜강왕으로 고 균정은 성덕왕으로 어머니 박씨는 현목태우라 추존하고 아들 경응을 태자로 세웠다. 7월 23일 왕이 훙하니 신무라 시호 올리고 문성왕이 즉위하여 선왕을 형제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31대 문성왕(文聖王) : 신라왕 46대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요 모는 진종부인이고 비는 소명부인 김씨니 시중 위흔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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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 원년(당 개성 5년 서기 840) 8월에 대사(죄수를 석방하고 감면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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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를 노공하여 청해장군을 삼고 장복(章服)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8년에 자객을 보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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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이 자주 들고, 모반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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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아들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14년 10월에 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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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정월에 관원을 보내어 서남지방의 백성들을 안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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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8월에 시중 김양이 졸하니 왕이 심히 애통해 하였으며 서불한(舒弗翰)을 추증하고 증부(부조를 말함)와 염장을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랐으며 태종왕릉에 배장(왕릉곁에 장사함)하였다. 9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문성이라 시호를 올리고 헌안왕이 즉위하였고, 서악동 사적 제178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78호
시 대 - 서기 579년, 85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사적 제 177호에 포함됨
경주의 서악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6m, 높이 5.5m 규모이다. 봉분(封墳)의 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지왕(眞智王)은 신라 제25대로 중고시기의 왕이고
문성왕(文聖王)은 제 46대로, 하대의 왕으로
두 왕은 계보도 다르고 재위시기에도 3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는데 그 왕릉들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규모 또한 왕릉으로 보기엔 작은 편이다.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은 본명이 김경응(金慶膺)이고, 신무왕(神武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57년 9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공작지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며, 다음 왕인 헌안왕(憲安王)의 장지도 공작지라고 하였다.
32대 헌안왕(憲安王) : 신라왕 47대
휘는 의정(誼靖), 신무왕의 이복동생 모는 조명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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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859년) 기근이 심하여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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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1월 돌아가시니 서악동 사적 제179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79호
시 대 - 서기 861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사적 제177호에 포함됨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며 지름 15.3m, 높이 4.3m로 봉분(封墳)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봉분 아래에 호석(護石)의 받침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몇 개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은 본명이 김의정(金誼靖, 혹은 金祐靖)이고, 신무왕(神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재위기간동안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지만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하는 등 권농(勸農)에 힘썼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61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공작지의 위치는 알 수 없다.
33대 경문왕(景文王) : 신라왕 48대
휘는 응렴(膺廉), 아찬 계명의 아들, 희강왕의 손자, 모는 광화부인 비는 문의왕후 김씨(처음에는 영화부인 김씨 헌안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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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말엽으로 국내 정세는 내란과 동요가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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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에 당나라 의종이 사신을 보내 선왕을 조문하고 책문과 선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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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년(874년) 최치원이 당에서 급제하였고, 황룡사 탑을 증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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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성은 김씨, 이름은 응렴(膺廉), 혹은 의렴(疑廉)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김씨이다. 왕비는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김씨이고,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晸: 헌강왕), 윤(胤)이고, 딸은 만(曼: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위홍(魏弘)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에는 興輪寺僧이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 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경문왕은 불교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 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邀元郎), 예흔랑(譽昕郎)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舍知)인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玄琴抱曲〉, 〈대도곡 大道曲〉, 〈문상곡 門詳曲〉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伊飡) 김정(金正)을 상대등으로, 아찬(阿飡) 위진(魏珍)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왕비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允興)과 그 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의 모반, 874년 근종(近宗)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그리하여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歷史學報 80, 1980)
34대 헌강왕(憲康王) : 신라왕 49대
휘는 정(晸), 경문왕의 태자로 모는 문의왕후 비는 의명부인. 왕의 성품이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한번 눈으로 보면 모두 암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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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왕은 조원전에서 인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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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학사들에게 경의(經義)를 강론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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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시중 민공이 “음양이 고루 화평하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농사가 잘 되어서, 백성의 생활이 충족하며, 변경은 잠잠하여 거리가 환락에 찼으니 이는 성덕의 소치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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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886년) 최치원이 당에서 돌아왔고,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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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보로국(여진족)이 신라와 화통하기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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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7월 왕이 돌아가시니 남산동 사적 제187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7호
시 대 - 서기 886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 55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69,626m²
경주 남산의 동록 통일전(統一殿) 북쪽 가까이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로 남쪽에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길이 60-120cm, 너비 30cm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을 4단으로 쌓은 호석(護石)을 둘렀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長臺石)은 지대석(地臺石)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으나 갑석(甲石)은 덮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호석의 구조는 이 능 남쪽에 있는 정강왕릉(定康王陵)과 같은 형식이다. 능 전면에는 장대석으로 짠 석상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놓이지 않았다.
이 능은 일찍이 도굴의 피해를 입어 1993년 장마철에 석실 개석과 벽 일부가 내려앉아 내부의 긴급 수습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조사 결과 석실은 평면 방형(方形)에 궁륭천정이었으며 남쪽으로 난 선도는 석실 동쪽으로 편재되어 있었다. 석실 서벽에 붙여 1대의 1인용 시상(屍床)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석제 두침(頭枕)과 족좌(足座)가 출토되었다.
부장품은 모두 도굴되었으나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편이 약간 수습되었다. 그런데 석실(石室)의 구조나 토기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헌강왕의 재위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큰 아들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이 왕 대 백성의 집은 지붕을 갈대로 덮지 않고 기와로 덮었으며, 밥을 짓는 데는 나무를 쓰지 않고 숯으로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886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35대 정강왕(定康王) : 신라왕 50대
휘는 황(晃), 헌강왕의 아우이고 경문왕의 제 2자로서, 조차인 요가 출생후 돌 전이라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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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8년 황룡사에서 백고자를 베풀고 친히 청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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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후 바로 돌아가셨는데 후사가 없어 누이인 진성여왕에게 계승하였고, 남산동 사적 제186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6호
시 대 - 서기 88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 53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35,702m²
이 능은 신라 정강왕(886-887)의 무덤이다.
경주 남산의 동록 통일전 바로 북쪽 송림 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 북쪽에는 선왕인 헌강왕릉이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15.7m, 높이 4m이다. 봉분의 밑부분은 가공한 장대석(長臺石)을 3단으로 쌓아 호석을 돌렸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은 지대석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고, 그 위 2단은 이보다 약간 들여 쌓았다. 그러나 별도의 갑석(甲石)은 없다. 이외에 난간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구조의 호석을 가진 신라왕릉으로는 이 능과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봉분의 전면에는 얕은 석단 위에 작은 석상이 놓여 있고, 석단에서 조금 떨어진 아랫부분에 장대석이 일렬로 놓여 있다.
신라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은 휘(諱)는 황(晃)이고, 경문왕(景文王)의 둘째아들로 형인 헌강왕(憲康王)에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이 짧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8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정강(定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현재 정강왕릉(定康王陵)과 헌강왕릉의 북쪽 가까이에 통일신라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있어 그곳을 보제사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능과 인접하여 있고 호석의 구조도 같은 형식인 헌강왕릉의 내부가 1993년 조사되었는데, 그 석실 구조와 출토유물은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이 왕들의 재위 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왕은 왕위에 올라 일년 만에 병환으로 돌아가게 되자, 아들이 없어 유언으로 여동생을 왕으로 세우게 함으로써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무덤은 흙으로 쌓아올린 원형 봉토분으로서 무덤의 밑둘레에는 길게 다듬어 만든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보호석으로 삼았다.
36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신라왕 51대
휘는 만(曼), 헌강왕의 여동생이며 정강왕의 누이. 각간인 위홍과 내통하며 정사를 의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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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에서 조세가 걷히지 않고 도적이 발호. 견훤, 궁예 등이 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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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에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향가집 삼대묵을 편찬케 함. 위홍이 죽자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요직을 주어 기강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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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궁예가 명주(강릉) 일대 10여 군,현을 침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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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 완산(전주)의 도적 견훤이 후백자라 자칭하고 무주(광주) 동남 군,현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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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 최치원이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지어 올리고 아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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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적고적(붉은 바지의 도적)이 일어나 서울 서쪽 모량리까지 들어와 민가를 약탈하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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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 6월 왕은 “근년 이래로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봉기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라. 현인을 가리어 왕위를 선양하려 한다”라 하고 태자 요(堯)에게 선위하고 그 해 12월 북궁에서 돌아가시니 왕산에 장사했다.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에 봉해진 김계명(金啓明)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晸:헌강왕)·황(晃:정강왕)·윤(胤) 등이 있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賊黨)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에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溟州:지금의 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武州:지금의 光州)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猪足)·생천(生川)을 거쳐 한주(漢州)·철원(鐵圓)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崔致遠)은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嶢: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居陀知)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37대 효공왕(孝恭王) : 신라왕 52대
휘는 , 헌강왕의 서자, 모는 김씨 의명왕태후 비는 이찬예겸의 딸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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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와 견훤의 발호(跋扈)로 신라기강은 날로 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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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궁예가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했다. 5년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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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궁예가 신라제도를 모방하고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9년 궁예가 국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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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견훤에게 일선군 이남 10여성을 빼앗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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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나주에서 견훤군과 궁예군의 큰 싸움이 있었다. 이 해에 궁예가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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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천한 첩에 홀리어 정사를 돌보지 않음으로 대신 은영이 간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은영은 그 첩을 잡아다가 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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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4월 왕이돌아가시니 도반동 사적 제183호 왕릉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3호
시 대 - 서기 91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 14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37,993m²
신문왕릉의 동쪽 얕은 구릉상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21.2m, 높이 5m이다. 봉분 밑에 호석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보이고 있어 무열왕릉과 같은 형식의 호석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외의 장식물은 하나도 없다.
신라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은 본명이 요(嶢)이고,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이다. 재위기간은 국정이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후고구려의 궁예(弓裔)에게 국토를 유린당하여 많은 국토를 빼앗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912년 왕이 죽자 시호를 효공(孝恭)이라 하고, 사자사(師子寺, 또는 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이 죽자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그 유골을 모아 구지제(仇知堤)의 동산 옆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왕릉의 남쪽에 사지가 있어 사자사터로 추정하고 있다.
38대 경순왕(敬順王) : 신라왕 56대
서기 927년, 경순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부(傅)이며 문성왕의 후손이다. 왕은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라 전 왕의 시신을 모시고 신하들과 함께 통곡한 후, 시호를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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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서기 929년) 6월에 천축국(인도)의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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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견훤이 의성부성(지금의 의성)을 공격하자 고려 장군 홍술이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으나, 전날 원봉의 공을 생각하여 이를 용서하고 순주를 현으로 고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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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서기 930년) 태조가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에서 견훤(甄萱)과 싸워 크게 이기고 견훤군을 참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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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서기 931년) 2월에 고려 태조는 50여 병사를 이끌고 도성 가까이 와서 신라 왕을 만나자고 하였다. 왕은 신하들과 함께 교외로 나가서 맞이하고, 궁으로 모시고 와서 큰 잔치를 베풀며 술을 권하였다. 잔치가 무러익어 가자, 왕은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하여 환난이 끊이지 않고, 견훤이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하며 우리 나라를 쳐서 빼앗으니 얼마나 통분할 일인지 모르겠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울었다.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을 위로하고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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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서기 935년) 10월, 왕은 사방의 강토가 모조리 남의 땅으로 빼앗기고 나라의 힘이 약하여 스스로 지킬 수 없슴을 알고, 신하들과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하들은 각기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의논이 분분하였다. 이 때 왕자(마의 태자)가 말하기를, "나라가 존재하거나 망하는 것은 반드시 하늘이 정하는 것이오. 그러니 마땅히 충신과 의로운 사람들을 모아 민심을 수습하고, 우리 힘으로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이면 모르거니와, 어찌 천 년을 지켜온 국가를 하루 아침에 남에게 내줄 수가 있으리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우리의 힘으로는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 이제 와서 더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을 만큼 약하게 되었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고 시랑(侍郞) 김봉규(金封休)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울며 하직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곳에서 왕자는 베옷 차림에 풀뿌리, 나무 열매를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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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고려 태조는 국서를 받아보고, 대상 벼슬의 왕철 등을 신라까지 보내어 경순왕을 맞게 하였다. 마침내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나 송도로 향하는데, 행렬이 30리에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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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이 송도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맞아 위로하니, 이로써 신라는 나라를 세운 후 922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경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후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長南面)에 있다
경순왕(?-979)은 신라 56대 왕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승하한 뒤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쪽으로 기울었다. 935년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처의 군웅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김봉휴로 하여금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경순왕은 태조로부터 유화궁을 하사 받고 태조의 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며 정승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경주의 사심관으로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왕릉으로는 경주를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백성들을 위해 천 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경순왕이 잠드신 능은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다. 봉분 주위에는 보호석이 둘러 있으며, 주변에 나지막하게 둘러 쌓아놓은 담이 있다. 능 앞에 '신라 경순왕지능'이라는 비석이 있으며, 그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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